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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벧전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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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외로운 나그네 아브라함
본문: 벧전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창세기12: 1- 5을 보면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아브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나이는 일흔다섯이었다.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재산과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길을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고향집과 살았던 터전을 버리고 새로운 땅으로 떠나라 하신다. 어느 날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이었다. 전혀 새로운 땅으로의 이주는 결코 쉬운 결단이 아니다. 그것은 목숨을 내건 모험이며 생명과 후손을 담보로 하는 엄청난 실험이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떠남은 역사의 시작이며 축복의 출발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고향 아비와 친척과 모든 삶의 울타리를 떠나려는 결단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이스라엘은 없었다. 그의 떠남은 축복과 구원의 발원이었다. 성서의 모든 사건과 역사하심은 떠남이라는 이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떠남은 모든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떠남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떠남과 내려놓음이 없이 하나님의 비전을 이룰 수는 없다. 떠나는 아픔과 결단은 하나님이 인간 역사를 그분의 뜻대로 운행하시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익숙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나에게 있다. 새로운 어떤 사람과 만나는 것이 마음 한구석에서 석연치 않아 주저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늘 내가 만지고 만나고 숨 쉬는 것이 이전과 똑같이 그대로이어야 한다고 믿고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한 곳에서 오래 사는 것이 좋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한다는 것에 대하여 큰 부담을 느끼곤 한다.
아브라함은 세겜과 벧엘을 거쳐 헤브론에 정착했다. 헤브론은 하나님과 사람이 교통하는 곳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한 장막에 거하시려고 그를 부르셨고 연단하셨다. 이 목적을 위해서 그의 이름을 바꾸셨으며 할례를 받게 하셨다. 아브라함은 새 이름을 받고 할례를 받은 후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통 안에 살게 되었다. 그는 귀신의 땅에서 부름 받아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났고, 외로운 나그네 길에서는 믿음으로 사는 것을 배웠으며 이제 새 이름을 받고 할례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결국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새 이름을 받고 할례를 받기 전에 하나님은 여러 가지 모양(영광의 하나님, 지극히 높으신 분, 풍성하신 하나님)으로 당신을 나타내셨다. 그러나 참 완전한 관계는 한 모양과 한 성질 안에서 친밀한 교통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은 얼마나 친밀함을 원하시는지 자신을 스스로 남편이라고 하셨다. 계시의 최종 완성인 새 예루살렘 안에서는 친히 남편이 되시어 신부와 함께 말씀하시는 것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표는 사람 안에서 당신이 생명이 되시는 것이며 그의 목적은 이 생명이 인격이 되어 만유를 복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인 아브라함과 교통하기 위하여 사람의 모양으로 찾아오셨다. 어떻게 사람의 모양으로 찾아 오셨을까, 우리는 그것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참으로 사람과 교통하기 원하시는 분이라면 사람이 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사람과 참된 교통을 할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갈망은 그분 자신이 사람의 모양 안에서 사람과 교통하는 것이었다. 연단을 통하여 새 이름을 주시고 할례를 받게 하신 것은 사람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영접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 자신의 갈망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관습과 실행과 체험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예수를 영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지나가는 사람들로 알고 영접하였고, 자기 장막으로 안내하여 발 씻을 물을 주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함께 담화하였다. 그들은 같은 모양 안에서 만났다. 그 안에는 어떤 이질감도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과 사람의 완전한 교통은 이질적인 모양이 아닌 한 모양 안에서만 가능하다. 개와 사람이 아무리 친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완전한 교통이 될 수가 없다. 한 모양이 아니어도 된다면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 안에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실 필요가 없었고 예수 안에서 인류에게 오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갈망은 사람의 모양으로 사람에게 오셔서 사람과 동거하는 것이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히1:1). 아브라함에게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던 그 하나님은 마지막에 아들(사람)로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으니 요한은 이것을 “말씀이 육체가 되셨다.”고 증거했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 하나님을 만난 것은 은혜 위에 은혜이며 씨를 본 것이 아니라 열매를 보고 만지고 먹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문 맞은편에 선 사람들을 영접하여 음식을 대접했으며 그들의 말을 들었다. 소돔으로 떠난 두 사람을 전송한 후 남은 한사람이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시고 자기 마음을 실토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친구로 여기셨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사람만이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땅에 있는 우리와 교통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땅 위에서 우리와 사람으로 교통하기를 원하신다. 이러한 교통만이 최종적이며 완성적인 교통이 된다. 이것을 부인하거나 거절하는 것은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을 부인하고 거절하는 것이며,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의 일이다(요일서4:1-3). 하나님은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하셨고 사람이 되셨다. 우리에게 도달하시는 최종 완성적인 하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인자다. 곧 죽음을 거쳐 부활 승천하여 지금은 생명주는 영으로 새 피조물의 생명이 되신 분이시다.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방문하신 하나님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셨다. 아브라함은 자기 힘으로 아들을 낳았지만 하나님은 그 아들을 거절하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끝나고 새 이름을 받았을 때 하나님은 너무나 친근하게 찾아오셔서 아들을 약속하셨다. 이때가 바로 생명의 씨가 떨어지는 생명의 때인 것이다.
씨가 바위에 떨어지면 발아하기 어렵다. 그러나 옥토에 떨어지면 쉽게 발아하여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 아브라함이 새 이름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씨가 떨어져서 열매 맺기에 합당한 때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씨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하나님 나라가 된다.
갈대아 우르에서 버려졌던 한 사람을 불러내어 하나님의 친구가 되게 하시고, 배필이 되게 하시어 하나님의 생명을 잉태하여 하나님 아들을 낳게 하시고 그 아들을 통하여 자신의 나라를 이루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시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시10: 14)
성경 이곳 저곳에는 인생을 나그네라고 표현한 곳이 많이 있다. 다윗 왕이 하나님을 향하여 말씀하는 중에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대상29:15)라고 했고, 출애굽기 23:9절에는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은즉 나그네의 사정을 아느니라” 했으며, 신명기 10:19절에는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하였으며 또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25:23)고 했다.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난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약 3- 4년 마다 생활터전을 옮기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아내가 127세를 살고 헤브론에서 먼저 죽는다. 그런데 한평생 나그네로 살아온 아브라함에게는 아내를 장사지낼 땅이 없었다. 그는 아내의 빈소에서 통곡하다가 울고만 있을 수 없어서 장지를 찾아 나섰다. 아내를 장사지내는 일이 문제였다. 그는 햇사람 에브론에게 아내가 묻힐 땅을 팔아달라고 사정한다. 그는 은 4백세겔로 에브론에게 막벨라 밭과 그 안에 있는 굴을 사고 아내를 장사지낸다. 여기에서 그의 삶이 철저한 나그네였음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죽음을 준비한다. 그 일중에 중요한 것이 묻힐 따을 마련하는 일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재산도 넉넉했는데 그런 일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철저한 나그네 삶의 방식이다. 아내를 장사지낸 후에 아브라함도 175세로 세상을 떠난다. 하란을 떠나 1백년을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한 것이다. 그도 아내가 묻힌 막벨라 굴에 묻힌다. 이것이 복받은 사람, 축복의 근원이 된 아브라함의 인생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을 꼽으라면 누구나 아브라함을 말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받은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이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복받기를 원하는데, 우리에게 아브라함처럼 살라고 한다면 그 삶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의 인생은 철저하게 나그네로 시작하여 나그네로 끝났다. 나그네 인생이 얼마나 고단하고 불편하고 외로운지? 하나님께서 “네가 복을 원한다면 일평생 죽어 묻힐 땅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고단하고 외롭고 불편하게 아브라함처럼 살라고 하신다면 선뜻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16:8)
인생은 나그네와 같다. 인간에게 이 땅은 영원한 곳이 아니다. 인간은 얼마동안 이 땅에 살다가 모든 것을 뒤에 두고 하늘 고향으로 가는 사람이다. 그런 줄 알고 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 각자에게는 나그네로 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이 있다. 그 뜻을 찾아서 이루며 살아야 한다. 여러분은 이 나그네의 삶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손을 맞잡고 힘찬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면서 영원한 내일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 기도: 영원히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주님,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묵상합니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속량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심을 믿으며, 그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면서 영원한 내일을 준비하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나를 기억하고 위해서 기도해주는 나의 부모와 가족과 친구들과 사랑하는 자들을 축복하시기 원합니다. 아무도 자기를 기억해줄 사람이 없고 또 그들을 위해 기도해줄 사람이 없는 자들과, 노약자들과 외롭고 쓸쓸한 자들과 사랑할 대상도, 사랑해줄 사람도 없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내가 특별히 기억하여 기도해야 할 질병과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과, 그의 삶이 지금 위기에 처해 있는 자들 그리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자들과 두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 참회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자들 그리고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자들에게 긍휼과 은총을 베푸시옵소서. 이 시간 내게 주님의 모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나의 모든 죄를 회개하는 마음과 당신 안에서 참다운 평안을 누리는 마음을 허락하옵소서 주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간구하오니 이 기도를 들어주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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