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인간됨의 도리(道理), 구원과 깨달음

누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947 추천 수 0 2014.05.22 20:01:08
.........
성경본문 : 눅17:20-21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4.1.27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인간됨의 도리(道理), 구원과 깨달음
눅17:20-21





깨달음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거북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럽니다. 반면에, 구원이라는 말에 거북스러워하거나 경계의 빛을 띠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깨달음’과 ‘구원’이라는 두 단어에 대한 이 양극적인 심리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깨달음’이라는 말을 들을 때 웬지 ‘내가 깨닫는다’는 자존적인 뉘앙스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라든지, 무조건적인 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가 힘써서 뭘 어떻게 한다고 하는데 대한 죄의식이 발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북스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구원하십니다’그러면 내가 뻔히 여기 있는데 다른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것 같은 의존적인 뉘앙스 때문에 ‘구원’이라는 말을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이렇게 깨달음은 자각적인 것이고 구원은 의타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이런 양가감정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되니까 깨달음을 말하는 종교는 자각적인 종교 즉, 자력구원의 종교요 구원을 말하는 종교는 의타적인 종교 즉, 누군가의 도움에 의한 종교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불교는 자력종교이고 기독교는 타력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나 구분은 틀린 겁니다.  

구원이라는 게 뭘까요?
인간이 현재적 상태에서 변화되고 초극되어야 할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내 모습 이 상태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그걸 넘어서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의식이 변화되고 초극하기 위해서는 현재적인 상태의 의식에 대하여 더 높은 상태의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대로의 생각이나 사고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가장 높은 의식을 가져올 수는 없으니까, 그걸 신에게서 가져와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 변화를 가능케 하는 의식은 인간에게는 없고 신에게만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걸 신적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낮은 의식은 신적 진리의 빛을 쬐어야만 낮은 상태에서 높은 상태, 변화된 의식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은 현재의 인간적이고 한계적인 나의 의식을 신의 높은 의식의 빛에 의해 신의 의식에까지 당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타 포유동물과 다름없는 일상적인 생활과, 한계가 있는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초월하여 신에 의식과 변화에까지 이르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꾸로 말해서 신적인 진리가 일상적인 인간의 삶에 실현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인간 되심이고, 그 예수를 통해 인간이 구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자면, 여기 엄청난 힘을 가진 큰 자석이 하나 있습니다. 이 광물질은 다른 광물과는 다른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통의 광물질을 붙여 놓습니다. 그러면 어느 때쯤 이 보통의 광물질은 자성을 가진 이 광물질에서 자력이 옮겨져서 전혀 다른 성질을 갖게 됩니다. 인간의 의식이 신적 의식으로 변화한다는 말, 보통 동물과 유사한 인간의 의식이 전혀 다른 의식으로 전환하고 변화한다는 ‘구원’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게 기독교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 안에서 인간은 변화된 의식의 차원으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깨달음이란 뭘까요?
깨달음은 그야말로 ‘깨침’입니다. 깨침은 그냥 ‘깨짐’즉 깨지는 겁니다. 깨달음이란 깨진다는 말을 역동적으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작은 봉지를 큰 봉다리안에 집어 쳐 넣는 것입니다. 그걸 대아가 되기 위해 소아가 깨진다고 말합니다. 작은 내가 깨지지 않고는 큰 내가 되지 못합니다. 반대로 큰 내가 깨지기 위해서는 작은 내가 변화되고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대아니 어쩌니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말도 높은 상태의 의식과 낮은 상태의 의식 수준을 일컫는 다른 말입니다. 그런데 대아에 의해서 소아가 깨진다고는 하지만 그 ‘대아’라는 것 역시 인간 스스로 주문하여 취득할 수 있는 게 아닌 바에는 여전히 자기 의존적이지 않습니다. 혼자 도 닦아서 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라는 말과 ‘깨달음’이라는 말은 그렇게 ‘타동 과 자동’의 양극적 언어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선물로 거저 주시는 거고, 깨달음은 인간 스스로 애쓰고 수련하여 얻어 낼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두 단어의 뉘앙스에 사로잡히면 본질을 잃게 되니 그러지 마시라는 겁니다. “문자는 죽이고 영은 생명을 준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참으로 깨달은 사람은 ‘소아-밴댕이 콧구멍 같은 나’가 깨진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대아-의식이 하늘같은 나’적인 진리가 실현된 사람이며, 이는 모두 신적인 진리에 의해, 하나님에 의해 구원된 사람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며 이런 질문을 하는 앞선 사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불교에도 구원이 있단 말이냐? 인간 내면의 의식이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 구원이라면 ‘천국’이라는 이상향 즉 물질공간은 없다는 뜻이냐? 이렇게 대답합니다. 불교에 구원이 없다는 말은, 기독교엔 구원이 있다는 말이 되는데, 기실 기독교에 구원이 있는 게 아니라 ‘예수’에게 구원이 있는 겁니다. 예수에게 구원이 있다는 말의 뜻은 뭡니까?

예수에 의해서 깨진 마음, 깨친 마음, 예수에 의해서 변화된 의식, 예수에 의해서 작은 생각에서 큰 생각으로 나아가는 것, 그래서 이런 자기 내면의 초극적인 변화를 통해 신적인 진리가 삶에서 구현되는 곳에 천국이 있고 구원이 있는 겁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이고, 이렇게 사는 사람은 죽어도 사는 사람입니다. 천국에 사는 사람입니다. 어제의 내가 아니라 예수의 빛에 쬐어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면서 하늘의 뜻을 실현하는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이고 천국에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느냐하는 것이고, 또 그것을 실현하며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깨달음이라든지 구원이라는 말을 펑펑하면서 ‘작은 나’에서 ‘큰 나’로 나아가지 못했거나, 조금도 의식의 차원이 달라지지 않은 상태로 어제 바라던 것을 지금도 바라며 살고 있다면 그는 아직 구원을 모르는 사람이고, 깨달음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나이같은 건 먹지 않고 처음 그 모습 그대로 살다가 고통 없이 처음 만든 이에게로 되돌아 갈 수 있게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도 부득불 나이라는 걸 한 살씩 두 살씩 먹다가 죽게 한 뜻은 뭘까요? 나이를 한 살 씩 먹는다는 것은 ‘인간은 변한다’또는 ‘인간은 변해야 한다’는 ‘인간 변화의 도리’가 숙제처럼 주어졌다는 뜻일 겁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몸뚱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에 변하지 않는 정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이를 먹을 때마다 사람은 변합니다. 그렇게 변하다가 가장 자연적인 변화의 모습이 치매입니다. 그것도 변화라면 변화입니다. 우리가 거부하고 싶은 변화지만 말입니다. 아닙니까? 그렇게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변하든지  아니면 신적인 의식의 상태로 변하든지 어떻게든 변해야 하는 당위성이 인간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이를 자꾸 먹는 겁니다. ‘변화’를 암시하는 가장 우주적 장치인 셈이죠.

그렇다면 인간이 변화해야 하는 것은 도리입니다. 바로 이 인간변화의 도리가 구원의 도리입니다. 그 도리를 살아내는 것이 구원의 내용입니다. 구원의 도리라는 게 뭡니까? 동물적인 작은 외식의 내가 깨지고 신적인 진리의 큰 내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내용은 낮은 생명의 단계에서 높은 생명의 단계로 변화하여 생명이 질이 증대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의식의 낮은 상태에서는 어떤 부유함도 권력도 지식도 질 높은 삶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높은 의식에 당도하면 어떤 궁핍도 결핍도 질 높은 삶을 사는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낮은 의식의 상태에서는 소유와 무소유, 삶과 죽음이 극명하게 구분이 되지만, 높은 의식의 변화된 상태에서는 그런 구분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울이 고백하는 빈부귀천과 소유무상에서의 자유로움입니다.

십자가상의 도둑이 예수를 통해서 낙원에 거하게 되는 높은 생명의 질을 획득합니다. 처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를 통해 진리의 성녀가 됩니다.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를 통해 신적인 진리의 실천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예들은 모두 인간의 상승적인 변화, 구원의 도리, 구원의 내용에 대한 증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가르침은, 그분의 짧은 생애는, 이 도리를 나타내는 중보적인 매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문명이 극도로 진화한 이 시대에 오히려 사람들은 신음하고 있습니다. 노년은 노년대로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청년은 청년들대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삶의 방향과 방식을 잃고 작은 구멍으로만 치닫고 있습니다. 앞으로 5년 이내에 베이붐 세대, 50대 중반과 후반의 20만 명이 일자리를 잃거나 퇴직하게 되는데, 그 이후 이들의 사회적인 자리매김이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고 사회학자는 예견하고 있습니다. 기술이 부족하고 물자가 부족하고 사람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문제들이 아닙니다. 인류는 전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기술과 물자가 넘쳐 납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과 영혼은 전례 없이 피폐하고 찢겨져 있습니다.

과학은 인류를 물질적으로 해방시키는 위대한 공로를 남겼으면서도, 반대로 인류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현기증의 전무후무한 살상력, 공포, 윤리적인 데카당스(19세기말 프랑스와 영국등 유럽에서 유행하였던 문예현상. 병적인감수성, 탐미적 경향, 전통의 부정 및 비도덕성)와 정신적인 혼돈과 인생의 무의미를 남겨 놓았습니다. 과학적인 진보가 인류에게 유토피아를 가져다 줄 거라는 신화는 이미 깨졌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인간 변화의 도리를 추구하는 종교적인 본질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것의 생물학적인 언질이 바로 ‘나이를 먹는 일’입니다. 그건 변화라는, 변화하는 게 인간이라는 기본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변화하기를 적극 시도해야 합니다. 그게 타율이건 자율이건 따지지 말고 나를 넘어서는 큰 빛에 자기를 맡겨야 합니다. 그럴 때 작은 내가 큰 의식, 진리 의식에 당도하게 되고, 그럴 때 진리를 실현하는 삶을 살게 되고, 그런 삶은 생명의 질을 높이게 됩니다. 그것이 천국에 사는 것입니다.

구원의 도리는 변화의 도리입니다. 변화의 도리는 떡국을 먹고 한 살씩 나이를 먹어야 하는 세상살이의 도리에서 출발합니다. 오늘, 우리가 떡국을 먹고 ‘한 살 더 먹었다’는 뜻은 이런 숨은 그림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0762 마태복음 진리를 실험하며 사시라. 마7:21  허태수 목사  2014-05-22 958
10761 고린도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전7:29-31  허태수 목사  2014-05-22 1253
10760 마가복음 세 번째 약속 안에서 살고 계십니까? 막14:22-24  허태수 목사  2014-05-22 912
» 누가복음 인간됨의 도리(道理), 구원과 깨달음 눅17:20-21  허태수 목사  2014-05-22 947
10758 에배소서 하나님의 선물 엡2:8  한태완 목사  2014-05-22 1211
10757 베드로전 외로운 나그네 아브라함 벧전2:11  한태완 목사  2014-05-22 1138
10756 여호수아 기념비를 세우라 수4:4-7  강승호 목사  2014-05-22 1173
10755 디모데후 좋은 병사 딤후2:1-4  강승호 목사  2014-05-21 1294
10754 여호수아 내가 해야 할 것은 수3:1-17  최장환 목사  2014-05-21 1169
10753 사사기 역경에 숨겨진 축복 삿2:1-23  최장환 목사  2014-05-21 1452
10752 마태복음 화목하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되자 마5:9  한태완 목사  2014-05-20 1335
10751 마태복음 영생의 길을 찾으세요 마7:13-14  한태완 목사  2014-05-20 1318
10750 사도행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행13:21-23  옥한흠 목사  2014-05-18 3208
10749 사도행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됩시다 행13:16-23  김충기 목사  2014-05-18 2023
10748 히브리서 차원 높은 신앙 히11:24-26  강종수 목사  2014-05-18 992
10747 시편 외로움과 고독을 이기는 길 시10:10-14  한태완 목사  2014-05-18 1366
10746 사도행전 믿음의 눈을 뜹시다 행7:55-60  강승호 목사  2014-05-17 2068
10745 사도행전 성령이 임하시면 행1:6-11  한태완 목사  2014-05-17 2504
10744 창세기 공평하고 편애하지 말라 창37:5-28  한태완 목사  2014-05-17 1241
10743 베드로전 제사장의 기업이 되신 하나님 벧전2:2-10  강승호 목사  2014-05-17 1527
10742 시편 희망으로 다시 핀 슬픔 시126:6  한태완 목사  2014-05-17 1158
10741 에스더 하만의 굴욕 에6:1-14  김경형 목사  2014-05-16 1275
10740 시편 간절히 하나님을 찾을 때입니다 시63:1  김남준 목사  2014-05-15 1557
10739 레위기 화목제의 순수성을 지킴 레7:19-20  김남준 목사  2014-05-15 1010
10738 레위기 매일 드려야 할 제사 레7:15  김남준 목사  2014-05-15 923
10737 레위기 하나씩 바쳐진 화목제물 레7:14  김남준 목사  2014-05-15 1330
10736 레위기 감사와 소명 레7:13  김남준 목사  2014-05-15 1340
10735 마태복음 하늘에 계신 하나님 마6:9  김남준 목사  2014-05-15 1099
10734 누가복음 살아계신 하나님 눅11:2  김남준 목사  2014-05-15 1208
10733 마태복음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심 마12:19-20  김남준 목사  2014-05-15 1741
10732 마태복음 나라가 임하옵시며(1) 마6:9-10  김남준 목사  2014-05-15 912
10731 마태복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마6:9  김남준 목사  2014-05-15 944
10730 마태복음 하나님 우리 아버지 마6:9  김남준 목사  2014-05-15 929
10729 잠언 성실히 행하는 자가 복 잠28:6, 10, 18  한태완 목사  2014-05-15 1596
10728 민수기 환경은 나의 선생님 민14:1-25  최장환 목사  2014-05-14 1096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