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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7:29-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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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4.2.18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전7:29-31
사람의 뇌의 무게는 남자가 1.4kg이고 여자가 1.2kg 정도 된답니다. 그러면 이 뇌 속에서 일어나는 ‘정신’이랄까 하는 것은 무게가 있을 리 없으니 크기로 말해본다면 얼마나 될까요? 인간의 정신은 세상을 얼마나 감싸 안고 포용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톨스토이도 이 질문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는 <천국은 그대 마음속에 있다>라는 책에서 정신이 얼마냐 크냐 하는 것은 각 사람의 마음 그릇에 따라 그 크기가 결정된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 그릇이란 결국 각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철학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그릇, 즉 어떤 철학을 가지고들 사는지 봅시다.
제일 많은 사람들이 갖고 사는 마음의 그릇은 ‘동물적인 그릇’입니다. ‘동물적 그릇’이란, 그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 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동물의 이기성과 사회성에 대한 실험을 했습니다. 우리가 돼지고기 구워 먹을 때 사용하는 쇠 철망을 사이에 두고 개 두 마리와 침팬지 두 마리를 이용하여 각각 실험을 했습니다. 철망 너머에 짐승의 살코기를 한 덩어리 달아 놓고 개 두 마리에게 보여줍니다. 두 마리의 개는 철망을 들이받으면서 서로 먼저 먹기 위해 필사적으로 철망에 덤벼듭니다. 그러다가 여의치 않게 되자 개 두 마리는 자기들끼리 물고 뜯고 싸웁니다. 이번에는 같은 방법으로 침팬지 두 마리를 철망 앞에 풀어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한 마리가 철망을 슬적 건드리는 사이에 다른 한 마리가 철망 옆으로 돌아서 살코기 쪽으로 가다말고 다른 침팬지에게 손짓을 합니다.
이 실험에서 개 두 마리는 그저 ‘동물적인 그릇’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침팬지는 개에게는 없는 사회성 즉, 자기의 뒤를 돌아다보고 다른 종족을 위할 줄 아는 ‘사회적 그릇’이 있는 것입니다. 보통의 짐승들은 이 실험의 개처럼 그저 자기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돌진하며 삽니다. 사람도 그런 ‘동물적인 그릇’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자기 자신만의 행복이 전부인줄 알고 사는 거죠. 이런 사람은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가운데에 인생의 목적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는 남이 희생을 당하든 말든, 내게 행복이 된다면 뭐든 삼키고, 내게 이익이 안 되면 뭐든 뱉어 버리는 것이 정당화 됩니다. 이건 다원적인 적자생존의 세계, 동물들의 세계 그대로입니다.
그 다음 인간이 지닌 그릇 가운데 개체적인 자신을 넘어서 자신이 속한 사회, 종족, 국가를 감싸 안는 ‘사회적 그릇’을 지닌 사람이 있습니다. 앞의 실험에서 침팬지가 보여준 삶의 방식입니다. 여러분이 이미 아시는 것처럼 침팬지는 인간과 게놈 유전자가 98.99%나 동일합니다. 그래서 침팬지는 동물이라고 하지 않고 ‘인간군’에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적인 그릇’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삶의 기쁨이나 삶의 가치를 발견합니다. 내 항복도 행복이지만 남의 행복도 나의 행복만큼 행복하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그릇, 사회적 그릇을 가진 사람은 아무래도 ‘동물적 그릇’을 가지고 사는 사람보단 정신의 크기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윤리’라는 말을 쓰고 ‘죄’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이건 아무나 아무 때나 등장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윤리’나 ‘죄’라는 말은 한 인간이 ‘동물적 그릇’에서 ‘사회적인 품격’의 그릇으로 진화했을 때 즉, 나만 말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사회’를 갖게 되었을 때 비로소 ‘윤리’ 또는 ‘죄’라는 단어를 쓰게 됩니다.
‘윤리’라는 말의 영어는 ethics입니다. 이 단어는 희랍어 ethos에서 왔습니다. ‘에토스’라는 단어는 그 뜻이 ‘거주하는 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윤리’란 사람과 사람이 거주해야하는 터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회적인 그릇’을 지닌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겁니다. 이 윤리라는 개념과 함께 ‘죄’라는 개념도 비로소 ‘사회적인 그릇’을 지니는 사람이 등장하면서부터 생겨났습니다. 어거스틴은 그래서 ‘법 없이 죄도 없다’했습니다. 법이란 사회가 구성되면서 생기는 것이니까요. ‘죄’는 ‘사회적인 그릇’을 가지고 사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하는 규범의 그물을 빠져 나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나만 생각하고, 나만 위하지 않고 다른 사람도 생각하며 위해 주며 살려면 ‘동물적으로 사는 방식’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 다른 것을 규범이라고 하는데, 그 다른 걸 받아들이지 않고 살짝 빠져 나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방식을 택한다는 겁니다. 이게 ‘죄’입니다. ‘죄 罪’라는 한자를 보면, 위에 넉사(四) 같이 보이는 게 시른 ‘그물망 罔’자입니다. 그리고 그 밑이 ‘아니다’ 또는 ‘부정 한다’는 ‘비 非’자니 이는 곧 그물을 부정하게 빠져 나간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인간이 지니는 그릇은 ‘신적인 자아의 그릇’입니다. 인간은 뭔가? 이걸 ‘동물적인 그릇’으로 볼 때는 ‘저 혼자 먹고 싸다가 죽는 존재’가 되는 거고, ‘사회적인 그릇’의 인간으로 볼 때는 자칫 정치, 이념, 사상의 갈등 속에서 투쟁하다가 소멸되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헤겔, 선민주의,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등등은 모두 이 ‘사회적인 그릇’의 인간들이 설치한 것들이니까요. 그런데 ‘신적인 자아의 그릇’에 이른 사람들은 이런 이념적이고,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갈등의 관계들을 넘어섭니다. ‘윤리’나 ‘죄’도 넘어서는 것입니다. 필요 없는 게 아니라 ‘넘어서는’ 즉, 전체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인간이 뭐냐?’할 때 앞의 두 경우의 인간처럼 살지 않습니다. 그는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신의 자녀요, 하나님의 자아를 갖은자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신적 자아란 ‘신이다’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만을 위한 동물적인 삶’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설정함으로 생겨나는 여러 갈등’을 넘어섰다는 뜻입니다. 이념이나, 사상, 정치, 종교의 갈등구조를 넘어섰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인은 마땅히 이 세 번째 인간의 그릇, ‘하나님의 정신의 크기와 자아’에서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하겠습니다. 이게 이들의 인생철학이고, 정신의 크기이기 때문에 그걸 실천하며 살기 위해 이미 인간이 되어 ‘하나님의 정신의 크기로 자아를 완성’한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은 ‘동물적인 인간’ ‘사회적인 인간’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나라의 인간’이 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려면 거기에 마땅한 그릇을 가져야 하고, 그게 바로 ‘그리스도인 됨’인 것입니다.
그러면 톨스토이만 이랬냐? 아닙니다. 하워드 가드너라는 ‘다중지능이론’을 창시한 하버드대학의 심리학자도 이와 같은 말을 합니다. 그의 질문의 주제도 톨스토이처럼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입니다. 진,선,미로 살라는 겁니다. 동물적인 그릇인 ‘미적 탐욕’에만 머물지 말고 ‘선’을 실천하되 배제나 갈등에 빠지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는 ‘신적인 자아’인 ‘진리를 추구하고 깨닫는’삶을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이런 삶의 철학 또는 그릇을 바탕으로 신앙의 형태와 종교의 본질이 형성됩니다. 사람들이 같은 종교를 믿어도 그들 각자의 인생철학 또는 마음의 그릇에 따라 각양각색이 됩니다.
‘동물적인 그릇’을 가진 사람은 어떤 신앙 형태를 갖게 될까요? 이런 그릇을 지닌 사람들에게 종교나 신앙은 자기의 목적이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존재로서의 신이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신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사회적 자아의 그릇’을 가진 사람들은 매사를 종족, 국가, 가문과 같은 사회 안에서만 삶을 인식합니다. 그들은 오로지 사회적인 영광만을 도모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어떻게든 사회를 통합시키는 일에 집중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배타주의가 되거나 선민주의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공동체만을 위한 신을 예배하게 됩니다. 이런 집단은 엄격한 윤리와 죄의식의 굴레가 강조됩니다.
‘신적 자아의 그릇’을 인생의 철학으로 삼는 사람들은 생명과 우주의 근원에 대해 묻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 삶의 방향과 목표를 거기에 둡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의 안위, 가족, 국가 따위의 이익과 보장을 포기합니다. 예수님도 “하나님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관계를 끊으라는 말이 아니라 어떤 유형의 ‘정신’ 또는 ‘삶의 철학’ 또는 ‘마음의 그릇’을 갖고 살아야 하느냐를 말하고 계신 겁니다. 뭐가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는 것이고, 뭐냐 진정한 신앙이냐 하는 것입니다. 신적인 인생의 동력은 오직 하나님의 진리고, 하나님의 사랑이며, 이들에게 예배는 오직 절대적인 하나님과 그 진리에 대한 예배 일 뿐입니다.
인생관에는 단지 개인적인 쾌락(동물적인 삶), 사회적인 영광(사회적인 삶), 신적인 진리의 추구(하나님의 의를 구함)가 있습니다. 그게 진, 선, 미의 삶입니다.
힌두교는 이걸 하나 더 나누어서 네 단계로 이야기 합니다. 아르타(부), 카마(욕망의 충족), 다르마(정의), 모크샤(해방)가 그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폴 투루니에가 말하는 인생에 네 단계 즉 봄, 여름, 가을, 겨울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의 조상들도 힌두인 들처럼 인생을 네 단계로 구분했습니다. 원,형,이,정(元,形,利,貞)이 그것인데 이는 본시 주역에서 말하는 천도(天道)의 네 가지 덕입니다. 원(元)은 봄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씨입니다. 형(形)은 씨가 발아하여 뿌리와 잎과 줄기가 뻗치는 단계인 여름입니다. 이(利)는 뿌리와 잎을 통하여 대지와 공기의 자양분을 받아 꽃을 피우는 단계로 가을입니다. 정(貞)은 꽃을 거두고 열매를 남겨 둔 채 사라지는 단계로 겨울입니다.
공자는 이 원형이정((元,形,利,貞)의 인생 단계와 목적을 보다 세분화하여 말했습니다.
三十而立志(나이 서른에는 뜻을 세우고)
四十而不惑(나이 마흔에는 흔들리지 말고)
五十而知天命(오십에는 하늘의 명령을 알게 되고)
六十而耳順(육십에 귀가 순해지고)
七十而從心所欲不踰怇(나이 칠십에는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 행하라)
마19:16-24을 한 번 읽어 봅시다. 여기에는 단지 부자와 가난한자. 천국과 그 반대의 어떤 장소가 편견처럼 인식이 되지만, 결국은 톨스토이의 질문과 답, 하워드 가드너의 심리학적인 인간의 구분, 힌두교의 인간구분, 조상들의 인생 단계, 공자의 가르침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주는 교훈과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인생은 무한한 연장이 아닙니다. 일정한 기간을 살다가 갑니다. 그리고 인생의 유한한 연한에는 일정한 단계가 있고 각 단계마다 이루어야 할 목표와 푯대가 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도 유한한 인생, 단축된 인생을 살아가는 자들이 기억해야 할 As-If(가정법-마치~처럼)의 천리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 진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다 지나감이라(고전7:29-31)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살라’는 말은, 인생이란 하나님의 진리를 향한 나그네 도정이란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릇’으로 사는 것- 진을 추구하며 사는 것-모크샤의 단계에 서는 것-계절의 겨울에 당도하는 것-열매를 거두는 정의 수순에 이르는 것-공자가 말하는 七十而從心所欲不踰怇(나이 칠십에는 마음이 원하는 바를 따라 행하라)는 인생 단계의 오메가 포인트입니다. 최고의 정점이라는 말입니다. 이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인생의 목표요 신앙의 푯대입니다. 이렇게 살면 됩니다.
바울은 거듭 말합니다.
“운동장에서 달음질 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 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 하라”(고전9:24) 또 말합니다.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처럼 하지 말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게 되지 않게 하라”(고전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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