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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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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4.3.18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가룟 유다를 변론함
요12:1~8
‘가룟 유다’라는 이름에서 우리는 얼른 배신자를 떠올립니다. ‘예수를 적에게 넘겨준 자’로 말이지요. 수요일마다 하는 ‘신약성서읽기’때에 이 대목을 읽고 있는데, 많은 교우들과 나눠야 할 것 같아서 주일 설교로 끄집어냈습니다.
사람들은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이유가, 예수님이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혁명을 해 주길 바랬는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배신한 거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유다가 제자들 사이에서 돈을 관장하던 자였는데 그만 돈에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팔았는데 그게 양심의 가책이 되어서 자살을 했다는 겁니다.(자살반대론은 34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정해짐)
유다가 열심당이었다는 이야기는 막14:4-5, 마26:8-9에 기초한 겁니다. 물욕에 눈이 어두웠다는 이야기는 요12:6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보다 더 오래된 문서들, 바울의 서신에서는 단 한마디도 가룟 유다의 배신과 자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를 근거로 할 때, 가룟 유다에 대해서 우리가 갖는 이미지는 성서의 일부분을 과장하거나 과도하게 해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유다의 이야기를 최초로 기록한 막14에서 이 이야기는 가룟 유다의 배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마가복음의 이야기는 종말에 관한 이야기가 주제입니다. 마태복음(26:8-9)도 마가복음의 관점을 그대로 수용을 했고, 누가복음(눅21:29-)은 상당히 많이 바꾸었습니다. 여하튼 이 세 종류의 복음서에서 핵심은 여인이 아니라 ‘제자 대 예수’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가룟 유다의 배반이 아니라 세 남매의 이야기가 주제입니다. 이 말씀을 왜 드리는가 하면 성서의 문맥으로 볼 때 어느 한 구석에서도 가룟 유다가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고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당시대 사람들, 성서를 기록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유다가 있긴 있었지만 그렇게 핵심을 가로지르는 인물이거나 사건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서의 스토리 라인에서(흐름에서)가룟 유다의 배신은 꼭 필요한 장면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토록 예수를 말하고자 할 때 ‘배신자 가룟 유다’를 거품 물고 말하는 것처럼 쏟아내는 걸까요? 그건 성서가 말하는 것이 아닌 일반적인 편견과 증오심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앞에서도 말씀을 드린 것처럼 마가나 마태, 누가 요한복음보다 50년 정도 먼저 기록된 바울서신에서는 유다가 배신자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알았는데 필요가 없어서 기술을 하지 않았는지,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50년이 지난 마가, 마태, 누가, 요한복음 시대에 유다는 배신자로 지목되기 시작합니다. 예수 당시에는 아무도 그를 배신자 운운하여 증오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유대 배신자 설’이 등장한 건 예수님이 돌아가신 약 100년 뒤의 일이 되는 겁니다. 만약 배신자 문제가 일찍부터 있었다면 바울이 “열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가 나타나셨다.”고 말할 수 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 속에서, 가룟 유다가 가공의 인물이라거나, 예수가 누군가에 의해 팔리던 일이 없었다는 게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은 모두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일련의 일들에서 가룟 유다가 배신자로 애초부터(예수님 시대부터) 등장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사후 70~100년 지나서야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배신자 유다’의 이야기가 솔솔 피어올랐다는 말입니다.
마27:3~10에 보면 유다는 잘못을 뉘우치고 목을 매달아 죽습니다. 만약 유다가 악마라면 참으로 허약한 악마인 셈입니다. 얼치기 악마입니다. 악마가 될 수 없는 악마입니다. ‘악마가 될 수 없는 악마’란 스스로 악마가 되었다기보다는 누군가가 그를 악마가 되게 했거나, 악마로 만들었거나 일 것입니다. 자, 이제 여러분의 생각을 넓히셔야 합니다. 누군가 악마가 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참으로 어리석은, 악마 같지 않은 악마가 되었습니다. 악마가 될 수 없는데 어떻게어떻게 악마가 된 겁니다. 이 때, 이 얼치기를 악마로 변모시킨 누군가는 ‘참으로 착한 사람일까요?’아니면 ‘진짜 악마’즉, 악마 같은 악마일까요?
그러면 도대체 ‘악마’는 아무런 조건 없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악, 악마, 악마 성, 이라는 말은 구원이라는 상황을 추구할 때 불가피한 요소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을 받으려면 ‘악마로 부터의 탈출’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아, 악마서, 악마에게서 벗어나서 하나님에게로 들어가는 게 구원이 아닙니까? 악을 제거하는 게 곧 구원입니다. 그런데 악은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악은 강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이 빛이 나고 가치가 있는 법이니까요.
또 문제가 있습니다. 악을 이겨야 구원을 얻는데, 이 악이라는 게 내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혹은 ‘내’가 그 악이 되기도 하며, 때때로 자발적으로 ‘악을 원하고’있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부아가 단단히 나면 그러잖아요. “내가 얼마나 악해지는지 보실래요?” 스스로 이렇게 악 또는 악마 성, 악마가 되려고 한다는 거죠. 그러니 악이란 내가 증오를 하면서도 동시에 욕망하기도 하는 겁니다. 악이란 이런 겁니다. 몸에 붙은 혹 떼듯 툭 떼어내면 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러면 그 악을 제거하고 구원으로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악이 곧 나이기도 하고, 악을 미워하는 내가 어떤 때는 악을 희망하기도 합니다. 나 또는 우리에게서 그 악을 제거하려면 내가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모두 자기 자신을 죽일 수 는 없습니다. 죽이지 않습니다. 이 때 퇴행의 방식이 하나 등장합니다. 나는 죽지 않고 누군가를 ‘악마’의 대표‘로 만들어 죽이는 겁니다. 그리고는 ’악마‘가 죽었으니 이제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되는 겁니다.
가룟 유다, 우리는 이 인물에서 초기 기독교의 퇴행적인 악마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시던 그 때에 구원이란 단지 ‘예수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만 하면 구원이었습니다. 악마를 잡아 죽여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울의 시대까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서 점점 예수의 정신과 삶의 가치는 희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제도가 생겨나고 서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제도와 서열이 서서히 종교인들에게서 악마 성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점점 악, 악마 성, 선한 탈을 쓴 악마의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이들은 자신들의 내면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그 ‘악마 성’을 해결해야 만 했습니다. 그걸 죽여야 하는데 자기들로서는 죽을 수 없고, 그래서 누군가를 한 사람 ‘악마’로 만들어서 죽여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속에 도사리고 있는 그 악마, 바로 그것을 색출하여 처단할 필요성이 생긴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바울서신에는 없는, 예수님도 자신을 배반하여 팔아치우는 유다를 향해 ‘배신자’라고 하지 않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다를 ‘악마가 들어가 예수를 판 악마 같지 않은 악마’로 유포 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 스스로 악마 성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 자신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그들 중 하나를 표적삼아 응징함으로써 악마와의 전쟁을 심리적으로 해소하고자 발명해 낸 악마가 바로 가룟 유다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이렇게 된 겁니다.
오늘 우리는 유다의 이야기를 통해, 유다를 비난함으로 마치 내 안에 악마성이 소멸된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내안에 악마 성을 은폐하기 위해 누군가를 악마로 몰아세우는 ‘악마 담론’을 경계해야 합니다.
유다를 비난함으로 ‘나는 악마가 아니’라거나, ‘악의 성질’이 없는 것처럼 위장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내 안에 상존하는 ‘악마 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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