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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1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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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4.4.14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뒤엎어 세상을 갈아치운, 예수의 부활
막16:1-8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를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당신네들은 세금을 내는지 안 내는지’를 시비하는 성경 구절(막12:13-17)이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 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하셨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거기 등장하는 ‘가이사’는 누군가 하면 로마의 초대황제입니다. 우리는 그를 ‘아우구스투스’라고도 하고 ‘옥타비아누스’라고도 부릅니다. 가이사 율리우스, 가이사르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 모두 같은 사람의 이름입니다. 성서는 그저 ‘가이사르’혹은 ‘가이사’라고 부르죠. 이 사람은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기 이전인 BC 63년부터 예수님 이후 AD 14년까지 생존 하면서 로마의 황제로 군림하는 최고의 권력자였습니다. 이 사람이 임명한 유대의 왕이 헤롯입니다.
이 황제가 BC 17년에 ‘로마의 평화’라는 것을 선언합니다. 그날이 5월 31일 이었는데요, 당시 150만 가량이던 로마인들은 3일 동안 축제를 합니다. 뭐 ‘로마의 평화’란 이제 이후로부터 로마가 세계의 평화를 책임진다는 뜻이기도 하고, 비로소 내가 세계의 평화를 주도하게 되었다는 대내외적인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이 ‘로마의 평화’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팍스 로마나’라는 말입니다. 로마의 평화 축제 기간 동안 성직자들은 팔라틴 산위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신상이 만들어진 신전 앞에서 수만의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축제사를 올립니다. 어용 시인들은 앞 다투어 경송의 노래를 지어 바치고, 이것을 노래로 만들어 쉰 네 명의 동녀동남들이 합창을 합니다. 물론 옥타비아누스가 모든 정적들을 물리치고 세계를 통일했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로마의 모든 시민들은 그런 권력자를 열광적으로 환호했습니다.
백성들은 이 영웅 옥타비아누스에게서 자신들이 그렇게 흠모하는 그 자신, ‘나도 내 주변의 모든 존재들을 물리치고 영웅이 되었으면 하는’그런 상상속의 희망사항을 투사하고, 투사된 그 대상인 옥타비아누스에게서 대리 성취를 느낍니다. 나도 영웅이 되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고 그 대신 진짜 전쟁의 영웅에게 자신을 투사하여 그게 마치 나 인 것처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더욱 ‘로마의 평화’축제에 열광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치가들은 이제 이후로 ‘신의 나라’가 도래했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로마의 평화 선언’은 순식간에 제국 각지로 퍼집니다. 그리고 모든 식민통치자들은 이 ‘평화선언’을 더 열렬히 홍보합니다. 이제 얼마 되지 않아 도시뿐만 아니라 산골짜기 촌부도 이 말이 낯설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로마의 지배를 받는 모든 나라의 백성들이 이 ‘로마의 평화선언’을 알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진정 평화롭게 살 수 있었을까요? 정말 ‘신의 나라’가 성취 된 것일까요? 헤롯왕 밑에 있던 유대인들이 과연 평화롭게 살았던 가요? 당시의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이 ‘로마의 평화’선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 사람들이 평화라고 하는 말은 사실 평화가 아니라 사막화이다.” 평화는커녕 피지배백성들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만드는, 다시 말하면 나쁜 정치 선동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시대 팔레스타인도 그랬습니다. ‘로마의 평화’와 ‘신의 나라’가 이루어졌다면 그들은 행복했어야 했습니다. 누구에게서도 고통을 당히자 않고, 구누와도 갈등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의 백성들은, 기타 지배국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의 고통과 고난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커져만 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시점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소리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 회개하라.” 자, 이제 세례자 요한이 이 말이 단지 야훼 종교를 지닌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종교적인 의미만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로마의 평화’로 세상을 미혹시키며 ‘신의 나라’가 성취되었다고 선전하는 옥타비아누스 즉, 세상의 권력에 대응하는 선언일까요? 세례요한만 그렇게 외친 게 아닙니다. 예수님도 세례요한과 같은 말씀들을 쏟아놓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주러 왔다.”이것입니다. 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 대목 ‘진정한 평화’는 그저 기도하는 사람들의 상상과 관념 속에 등장하는 ‘진정’이며 ‘평화’일까요 아니면 거짓 ‘평화’와 가짜 ‘신의 나라’를 퍼드린 권력자 그리고 그걸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 환호하는 못난 백성들에게 해당하는 말일까요? 이제 여러분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배경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짐작하시게 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로마의 평화’는 힘으로 세상을 지배한 자가 백성들을 복종하게 하려는 정치적인 술수라는 것이라는 겁니다. 거짓 평화라는 것이고 가짜 신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외침은 거짓‘평화’와 가짜 ‘신의 나라’를 선동하고 또한 믿는 권력자와 백성들을 향한 경고였으며, 예수님의 선포는 아우구스투스가 퍼뜨린 ‘로마의 평화’와 ‘신의 나라’를 단숨에 뒤엎어버리는 전복적 사건입니다. 그것은 사실 평화가 아니며, 신의 나라가 도래한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복당한 자들의 시체 위에 깃발을 꽂고 우악스럽게 부르짖는, 정복당한 신들의 파괴된 제단 위에 오물을 뿌리며 사납게 포효하는 야수의 협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 야수의 발아래 굴복당한 우리의 진실, 우리의 믿음, 우리의 신 즉 하나님의 도래를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온 그 신,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를 이루자는 것입니다. 정복당한 시체, 정복당한 믿음, 정복당한 신, 정복당한 우리의 이성을 예수의 부활로 선언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발 부는 아우구스투스의 그것은 가짜다, 예수의 부활이 말하는 이것이 진짜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종교적인 방식으로 돌팔매질에 의해 맞아 죽지 않고 바로 로마의 반란자 처벌 방식인 십자가형에 처형을 당한 것입니다. 반란 족속인 ‘유대의 왕’이라는 팻말 밑에서 말입니다. 요한은 그들의 비위를 상하게 했기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그들의 정치적인 표어가 가짜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신들의 나라’가 도래 했다는 것은 가짜고 ‘진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고 소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정복자의 이빨에 찢긴 것입니다. 물론 헤롯이 그 역할을 대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충실한 아우구스투스의 개였습니다. ‘로마의 평화’와 ‘신의 나라’가 도래했다는 것을 신봉하고 실천해야 자신의 부귀영화를 담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세례요한이 권력자의 술수에 찢길 때 세례요한이 믿는 신도, 세례요한과 같은 백성들도 정복당하고 있었습니다. 권력자들은 요한을 죽이고 또 소리쳤습니다. ‘팍스 로마나-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짜 ‘평화’와 거짓의 ‘신의 나라’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마가복음 16:1~8입니다.
“희망은 남아 있다. 우리 모두가 이제까지 고통에 고통을 겪으면서 갈구해 마지않는 구원의 소망을...”마가복음은 이런 백성들의 갈망이 살아 있음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그분은 죽지 않았다. 그분은 살아서 고난의 땅, 민중의 땅, 오욕의 땅 갈리리에 계신다.”그러면서 갈망하는 백성들을 향해 “갈릴리로 가자!”고 소리칩니다. 당시에 예수님의 죽음은, 그 좌절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대중의 갈망과 더불어 예수 사건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융기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부활’이 바로 이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죽음은, 영웅(성공)주의 담론이 세계를 지배하고 그래서 무수한 영웅(성공)주의자가 공명할 때, 그래서 마치 세상이 그 전능한 영웅(성공)의 세상인 듯이 보일 때, 그것을 고발했던(세례요한) ‘불온한’정신의 소유자들과 그들의 신의 오침이 짓밟히고 신음 소리조차 잃은 듯이 보일 때, 바로 그 속에서도 ‘침묵당한 진실’을 갈구하는, 그 소망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웅주의’-저는 이걸 ‘성공주의’라는 바꿔 말하지만 말입니다-적인 주류정신에 타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잘 먹고 잘사는 게 진리며 믿음의 실체다’이렇게 세상이 말한다고 해서 거기 속지 말고 또는 타협하지 말고 저항하여 전복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생명이 잉태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 얼마나 가슴 시퍼런 고백입니까?
이 고백을 하려면 얼마나 눈 부릅뜨고 세상을 직시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말아야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요한도 세상의 담론인 영웅주의에 의해 처형당하고, 예수도 저들이 생산한 거짓 진리에 살해당한 다음에, 그걸 똑바로 본 사람들이 세상을 거부하며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부활, 그것은 정복자들의 노래가 아닙니다. 교리화되고 직제화된 잘 짜여진 주류세력들의 개선행진곡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짓 세상을 거부하다가 살해당하고 처형당한 자의 ‘다시 일어섬’이며, 조작된 ‘신’에 의해 정복당한 것처럼 보이는 진짜 신, 하나님의 반란인 것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동참해야 비로소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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