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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내세에 대한 약속이 아니다.

마가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1312 추천 수 0 2014.05.22 20: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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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12:18-27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4.4.22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부활은 내세에 대한 약속이 아니다.
막12:18-27





우리가 본문을 읽고 들어서 아시겠지만 그 내용은 이런 것이죠.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에게 ‘부활 신앙’ 에 대한 논쟁을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수요 성서읽기를 할 때 누누이 말씀을 드렸지만, 흔히 ‘사두개’사람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대지주이거나 사제그룹이었습니다. 평신도라고 해도 그들은 대부분 귀족 계층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다른 종파 즉, 바리새인이나 예수 공동체나 엣세네 공동체와는 달리 종교와 정치 경제 등의 모든 분야에서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처형하는 일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었으면서도 복음서에는 그다지 예수님과는 논쟁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논쟁의 대상으로도 여겨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본문이 사두개인과 예수님의 논쟁으로는 유일한 본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사두개인들이 제시하는 시비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부활’에 대한 이해의 문제였습니다. 당시에는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믿음이 사람들 사이에, 특히 평민 사이에 널리 퍼져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평민’이라는 말은 ‘가난한’ ‘천한’ ‘무식한’ 사람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부활신앙’은 ‘가난하고 무식한’평민들의 신앙으로 시작해서 점점 대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문에 지식인들 가운데는 이 ‘부활신앙’을 신학화 하려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다른 지식인들은 그 허황된 면을 비꼬았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바리새인은 사두개와 달리 경제 정치적으로 평범하거나 평범 이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였기 때문에 당연히 바리새인들은 부활신앙을 받아들이는 입장이었습니다.

여하튼 사두개인들은 약간 명이 부활신앙을 이해하려는 측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부활신앙’을 한갓 무지몽매한 미신 따위로 취급을 했습니다. 그들의 이런 주장은 구약 성서를 근거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말하길 구약성서어디에도 ‘부활신앙’을 말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사야서의 몇 구절과 다니엘서와 약간 등장을 하지만, 그건 후대에 저술된 중요하지 않은(모세오경과 같지 않은)책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 부활신앙을 받아들이는 근거로 제시하는 구전 전승들은 율법에 무지한 이들의 서툰 지식이라고 몰아 세웠습니다. 이래서 사두개와 바리새인들 사이에는 ‘부활 신앙’이 미묘한 갈등의 요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인 모임에서는 조심스럽게, 비공식적인 모임에서는 상대방에 대해서 원색적으로 비난과 냉소적이곤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배경 속에서 출발을 하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이 볼 때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 모임의 주인공은 예수였고,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백성들을 미혹하는 사이비 예언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에게 부활신앙의 허점이라고 여길만한 점을 들이대서 그를 궁지에 빠뜨림으로 백성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예수에게 던지는 질문의 요지가 되는, 그들의 생각에 부활신앙의 허점이라고 할 만한 것은 무엇입니까?

이른바 ‘시형제 결혼 법’에 따라 일곱 번이나 결혼을 하게 된 여인의 경우, 당신들 말대로라면 그 여인에게 남편은 누가 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부활신앙에서 말입니다. 부활이 있다면 이게 말이 되느냐 그겁니다. 이것에 대해서 말해 보라는 겁니다. 이와 같은 사두개인들의 공격성 질문을 보면 그들은 부활신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신앙을 ‘내세론적인 지식’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신앙을 죽은 이후에 일어나는 어떤 사건으로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 시대 우리들의 신앙과 유사합니다. 우리도 ‘부활’그러면 ‘이다음 죽어서 천국에 가는’내세론적 지식으로 연결을 하잖아요. 어쩌면 그게 전부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사두개들의 공격적인 질문에 대해서 뭐라고 하시는지 들어 보세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너희의 생각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27) 이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부활신앙은 곧 내세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이제 우리는 성서 속에서 진리를 읽어 내야합니다. 그냥 들려주는 대로 듣고 믿지 마시고 여러분 스스로 성서에 귀를 대고 듣고, 눈을 떠서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바르게 깨닫고 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본문에 나오는 두 등장인물인 사두개와 예수사이에 벌어지는 논쟁의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양자 간 부활을 바라보는 시각차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신앙을 내세에 초점을 두어서 이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부활신앙을 ‘지금 여기’살고 있는 실존적인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의 생각을 읽자면, 부활신앙은 죽은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한 자식들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엄마와 어버지 그리고 그걸 맥놓고 지켜보고만 있는 백성들, 이런 현실에 부활신앙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이 속에서 어떤 삶의 구체적인 현실과 꿈이 담겨 있는지를 암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 철없는 자식들을 물에서 헤매며 찾고 있는 부모들에게 부활은 어떤 의미를 갖을까요? 사두개식으로 하지 말고 예수 식으로 생각해 보십시다. ‘에라 모르겠다. 이미 죽은 자식이니 어쩌겠나. 이다음에 내가 죽어서 천국에서나 만나보면 좋겠다’이러면 되는 것입니까? 이건 누구방식입니까? ‘내 아이가 죽어서 정말 고통스럽다. 이 고통은 지금 내게 당한 현실이다. 그러면 어쩌면 좋으냐?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뭣 때문에 생겼는지 그걸 알아야겠고, 그 다음에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일어나더라도 기꺼이 하늘의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사람들이 처신하면 좋겠다’ 이 둘 중에 어느 경우의 해석이 예수의 부활신앙 이해에 적합한 것일까요?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 중에도 성서 본문에 등장하는 사두개의 비난에 해당하는 해석인 ‘부활신앙’을 갖고 있는 이들이 태반입니다. 부활 신앙은 사두개인들처럼 내세적인 지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해대로라면 현실의 극복이고 그리고 그에 대한 소망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예수의 부활을 기점으로 시작된 그리스도교의 역사에서 사두개식 부활이해는 변함없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만나게 되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신앙이 바로 ‘내세론에 기초한 부활신앙’입니다. 그들이 전하는 지식은 내세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와 유사한 종교집단들도 거개는 ‘내세론적 부활신앙’에 근거하여 대중을 선동합니다. 비록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아니라고 해도 대부분의 주류교회도 별다른 차이는 없습니다. 교회만 그런 게 아닙니다. 신학에서도 그게 미래적이냐 현재적이냐를 두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떻든 우리에게 부활신앙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와 무관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T.S Eliot의 ‘황무지’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거기에 ‘쿠마의 마녀’라는 1세기 그리스 소설에 나오는 인물이 인용되는데, 이 쿠마의 마녀 시빌은 아폴로 신에게 영원히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서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미처 ‘늙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를 빼먹었습니다. 그래서 늙고, 병들고, 쪼그라든 비참한 모습으로 영생을 하게 됩니다. 그에게 영생은 차라리 죽음보다 못한 비참한 영생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소설을 쓰느냐? 그리스도교의 어긋난 부활신앙이 뿌리 내리는 것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이 잘못 발전되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부활신앙을 내세론적 지식으로 연결하는 것은 ‘어긋난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흉물스러운 해석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음흉한 인간의 욕구와 결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내세론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 대 지옥’이라는 도식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조금도 죄를 짓지 않고는 살지 못합니다. 그러니 죄를 지은 인간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베푸는 교회의 권력에 승복을 해야만 합니다. 이로써 세례를 베푸는 권한을 가진 교권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절대적 존재가 됩니다. 또한 교회가 보증해준 권력은 어느 경우든 정당하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 개개인의 삶이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종교 권력이 쥐고 흔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점점 종교 권력은 신을 대신하게 되고 대중은 권력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순종이 미덕이라고 배우게 됩니다. 진리에 순종하는 게 아니라 권력에 복종하도록 길들여지는 겁니다.  

‘천국 대 지옥’이라는 도식이 가장 빛나던 시대는 중세입니다. 이는 한층 더 정교한 해석으로 발전합니다. 그게 ‘연옥’입니다. 쟈크르 고프라는 이가 쓴 ‘연옥의 탄생’이라는 책을 보면, 이 연옥이라는 신앙은 민간신앙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게 12세기에 오면서 기독교에 들러붙어 괴물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이 12세기는 갑자기 대두한 신흥 부자들이 등장하는 시대입니다. 고리대금업을 해서 돈이 많다든지, 사악하게 벌어들인 재산가들이 많아지던 시대입니다. 교회는 이런 사람들의 주머니를 어떻게 털 것인지를 궁리한 것입니다. 그게 연옥신학입니다. 죽은 아버지를 위해 헌금을 내면 이미 죽은 아버지도 천국으로 옮겨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부활신앙이 새로운 상품가치가 있는 제품으로 재생산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말씀을 드린 것처럼, 부활신앙은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내세론이 아닙니다. 죽은 뒤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전하면서 현세를 준비하라는 것이 아니지요. 거기에는 현세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지금 여기’에서의 갈구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내세의 삶, 부활 이후의 삶을 준비하기 위해 지금을 사는 게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채워지지 못한 갈구가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부활신앙이 이렇다면, 피치 못한 경우로 결혼을 두 번한 신앙인들은 정말 문제가 아닙니까? 그러니 사두개인들이 예수를 한 방에 엎어지게 하려는 질문이었던 ‘남편이 일곱인 여인의 진짜 남편은 부활 이후에 세계에서 누구냐’와 같이 사두개인들처럼 관점을 내세로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던 이 여인이 겪었을 그리고 겪고 있는 현실, 그 무자비한 폭력성을 주목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 여인처럼 살고 있고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주시는 선물이 바로 ‘부활신앙’인 것입니다.

참고로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부활에 대한 언급은 예외 없이 고난의 상황에서 선포되고 있습니다.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부활신앙’으로 격려를 하신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바탕으로 부활신앙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왜 고통스러울까요? 권력의 횡포 때문입니다. 저항하기 벅찬 불의가 판치고, 카인의 칼에 난자당한 아벨의 피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비명도 지를 수 없는 현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던지는 희망의 소리가 바로 ‘부활의 신앙’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었지만 부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이 우리에게 내세를 약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영원히 죽지 않는 괴물을 탄생시키려는 게 아닙니다. 물론 내세가 있다면 그것은 그 때 말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부활을 이야기 하는 것은 그때, 내세 자체를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우리 염원의 최대치를, 우리 소망의 극단을 강조하려고 하는데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활신앙은 언제 고백될 수 있을까요? 누구나 아무 때나 가능할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고난 중에서만,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역사와 현실의 괴기스러운 상황 속에서만 고백될 수 있는 언어입니다. ‘희망 없음’이라는 절망의 꼬리표가 붙을 때 토해내는 숨과도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상황 속에서 ‘부활신앙’은 우리에게 ‘인내’하는 의지를 주며, 역경을 헤쳐 나갈 단련된 강한 에너지를 제공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된 제자들이 좌절의 골짜기를 뛰어넘어 온 세상을 향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며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게 된 이유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신앙을 갖게 되면, 이다음에 따뜻한 천국의 아랫목을 상상하며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삶을 목숨 바쳐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지금 여기’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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