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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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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유족들에겐 청와대로 가지 않을 수차례 기회가 있었다.
유족들의 거친 항의는 방영하지 않고, 그들을 위로하는 대통령의 인자한 얼굴만 보여주는 공영방송의 행태에 분노한 유족들은 KBS 간부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었다. 처음엔 안산 합동분향소에서였다. 그러나 책임지고 사과 혹은 해명할 KBS 관계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유족들은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직접 한밤의 여의도로 향했다. 이때라도 KBS의 책임있는 누군가가 모습을 보였다면 유족들은 수긍하고 뒤로 돌아섰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야당 국회의원, 경찰 등이 유족과 KBS 사이의 대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바삐 오갔으나 사장, 보도국장 등 사태의 중심 인물은 끝내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른 KBS 관계자들이 유족을 막아섰다. 그들은 유족들에게 “출입증을 패용하라” “들어오기로 약속한 사람 숫자가 다르지 않으냐”는 등의 이유를 대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 유족들은 꾹 참아왔던 마지막 말을 외쳤다. “청와대로 가자.”
유족들의 거친 항의는 방영하지 않고, 그들을 위로하는 대통령의 인자한 얼굴만 보여주는 공영방송의 행태에 분노한 유족들은 KBS 간부의 사과를 요구하고 있었다. 처음엔 안산 합동분향소에서였다. 그러나 책임지고 사과 혹은 해명할 KBS 관계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유족들은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직접 한밤의 여의도로 향했다. 이때라도 KBS의 책임있는 누군가가 모습을 보였다면 유족들은 수긍하고 뒤로 돌아섰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야당 국회의원, 경찰 등이 유족과 KBS 사이의 대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바삐 오갔으나 사장, 보도국장 등 사태의 중심 인물은 끝내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른 KBS 관계자들이 유족을 막아섰다. 그들은 유족들에게 “출입증을 패용하라” “들어오기로 약속한 사람 숫자가 다르지 않으냐”는 등의 이유를 대며 시간을 끌었다. 결국 유족들은 꾹 참아왔던 마지막 말을 외쳤다. “청와대로 가자.”
유족들은 청와대 인근에서 밤을 지새며 청와대 수석들을 만났다. KBS 사장은 그러고 나서야 유족 앞에 나타나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만일 유족들이 청와대로 가지 않고 KBS 앞에서 농성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열흘 밤을 지샜어도 KBS 사장의 사과는 듣지 못했을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세월호 참사를 두고 대통령을 탓하는 건 잘못이라고 한다. 대통령은 세월호의 키를 잡지도, 실종자 구조를 방해하지도 않았다. 물론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연안 여객선의 안전 점검 체계, 신속 구조 체제를 마련하라고 지시하지 못한 책임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세월호 참사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왕정 시대도 아니다. 홍수가 나나, 가뭄이 드나 “짐이 부덕한 탓이오”라고 가슴을 치며 하늘로 머리를 조아리던 날들은 지났다. 그런데 왜 여전히 진도 앞바다의 재난에 대해 청와대의 책임을 묻는가.
이상하게 들리지만,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 현상 역시 대통령의 책임이다. 국무총리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도록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킨 데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권한이 유난히 강한 한국의 정치체제이지만, 과거의 중도·진보 정부들은 그 권한을 조금씩 분산시키려고 노력했다.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내려보냈고, 국정원·검찰 등을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평검사와 대통령의 ‘맞짱 토론’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기도 했다.
대통령과 평검사가 직접 토론하는 일이 적당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자. 아무튼 그런 일은 현 정권 아래에서는 벌어질 가능성이 없다. 지금 대통령은 평검사와 토론하기는커녕, 유권자를 대신한 언론의 질문에도 좀처럼 응하지 않는다. 혼자 생각하며, 혼자 결정하고, 혼자 말한다. 구미시장의 표현처럼, 대통령은 ‘반인반신’의 딸인가. 그 효과는 여러 방면으로 퍼졌다. 경찰은 대통령을 풍자하는 포스터를 헌옷 수거함에 붙인 시민을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명예훼손, 모욕죄가 법리적으로 적용되지 않자 엉뚱한 혐의를 꺼내들었다. 지금 권력기관, 관료, 공영방송은 시민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심기를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 그래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시민들은 세월호 유족처럼 행동한다. 국무총리 이하 모든 책임자들이 “청와대로 가자”는 시민의 말을 듣고서야 움찔하기 때문이다.
동양적 태평성대의 이상향이라 할 수 있는 요순시대의 어느 왕이 평민 복장으로 순찰을 나섰다. 왕이 농부에게 “이 나라 왕이 누구인가”라고 묻자, 농부는 “지금 내 생활에 만족하므로 왕의 이름 따위 알고 싶지도 않다”고 답했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 “박근혜가 누구예요?”
<백승찬 사회부 기자>
게다가 지금은 왕정 시대도 아니다. 홍수가 나나, 가뭄이 드나 “짐이 부덕한 탓이오”라고 가슴을 치며 하늘로 머리를 조아리던 날들은 지났다. 그런데 왜 여전히 진도 앞바다의 재난에 대해 청와대의 책임을 묻는가.
이상하게 들리지만, 대통령에게 책임을 묻는 현상 역시 대통령의 책임이다. 국무총리부터 말단 공무원까지, 대통령의 입만 바라보도록 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킨 데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권한이 유난히 강한 한국의 정치체제이지만, 과거의 중도·진보 정부들은 그 권한을 조금씩 분산시키려고 노력했다.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내려보냈고, 국정원·검찰 등을 통제하려 하지 않았다. 평검사와 대통령의 ‘맞짱 토론’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기도 했다.
대통령과 평검사가 직접 토론하는 일이 적당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자. 아무튼 그런 일은 현 정권 아래에서는 벌어질 가능성이 없다. 지금 대통령은 평검사와 토론하기는커녕, 유권자를 대신한 언론의 질문에도 좀처럼 응하지 않는다. 혼자 생각하며, 혼자 결정하고, 혼자 말한다. 구미시장의 표현처럼, 대통령은 ‘반인반신’의 딸인가. 그 효과는 여러 방면으로 퍼졌다. 경찰은 대통령을 풍자하는 포스터를 헌옷 수거함에 붙인 시민을 옥외광고물 등 관리법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 명예훼손, 모욕죄가 법리적으로 적용되지 않자 엉뚱한 혐의를 꺼내들었다. 지금 권력기관, 관료, 공영방송은 시민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의 심기를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 그래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시민들은 세월호 유족처럼 행동한다. 국무총리 이하 모든 책임자들이 “청와대로 가자”는 시민의 말을 듣고서야 움찔하기 때문이다.
동양적 태평성대의 이상향이라 할 수 있는 요순시대의 어느 왕이 평민 복장으로 순찰을 나섰다. 왕이 농부에게 “이 나라 왕이 누구인가”라고 묻자, 농부는 “지금 내 생활에 만족하므로 왕의 이름 따위 알고 싶지도 않다”고 답했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 “박근혜가 누구예요?”
<백승찬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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