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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이후, 대통령이 유족과 국민들에게 사과 또는 그에 해당하는 연설을 할 때마다, 신문과 방송은 ‘진정성’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였다. 대통령을 둘러싼 사람들이 그 연설에 담겨 있다고 말하려 했던 것이 바로 이 ‘진정성’이었지만, 그 내용을 마뜩잖게 여긴 사람들이 늘 부족하다고 여기고 의심하였던 것도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고 방송이 그 얼굴을 클로즈업해서까지 증명하려 했던 ‘진정성’인데, 정작 이 말은 국립국어원에서 발간한 <국어대사전>에 올라 있지 않다. 그렇게도 빈번하게 사용된 이 낱말이 아직 공식적으로는 한국어가 아닌 셈이다.
이 낱말은 처음 외국어 사전 편찬자들이 서양말 ‘authenticit y’ 대응할 한국어를 찾다가 만들어낸 말이다. 서구어는 어떤 말이나 행위절차가 공식적 권위를 지녔다거나 말이 사실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뜻을 지니지만, 문서가 위조된 것이 아니라거나 골동품이 진품이라고 말할 때도 사용된다. ‘진정성’을 외국어사전에서 해방한 것은 1980년대의 운동권으로, 그때 이 말은 담론의 진실성과 효력을 뜻했다. 한자로는 물론 ‘眞正性’이다. 그러나 이 말을 유행시킨 것은 1990년대의 문학비평이다. 문학에서 말은, 특히 시의 말은 그 한마디 한마디가 감정의 크고 작은 굴곡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겨질 때 특별한 효과를 거둔다는 것이 이 ‘진정성’의 이데올로기이다. 아마도 이 낱말을 표제어로 올려 놓은 유일한 사전일 ‘고려대 한국어사전’이 그 한자를 ‘眞情性’이라고 쓴 것도 이 맥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의 말이 시인의 말과 같은 방식으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거기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역사적 정황이 있다. 우리가 같은 사안, 같은 말에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를 조금 심각하게 묻다 보면 곧바로 민주주의의 문제와 만나게 되고 결국은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두운 바닷물 속에 다시 돌아올 길 없이 잠긴 생령들을 생각하며, 뭇사람들의 인정이 그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과 죄의식을 어떤 방식으로건 표현하고 싶어할 때, 다른 한편에는 그 애도의 마음을 의심하고 우려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그 감정까지 차단하려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거대한 권력을 쥐고 있거나 그 언저리를 맴도는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생각이나 감정을 공유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라고 믿고 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여기는 감정 가운데는 조국의 민주화를 바라는 오랜 열망이 거의 첫 자리에 포함되어 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34주기 기념일을 맞게 된 것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여를 넘기고 애도의 감정이 깊고 넓어졌을 때였다. 기념식에서 정부의 관계 부처는 여러 가지 핑계와 낯익은 수단들을 동원하여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을 막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민주화운동과 깊이 연결되어 한 시대의 슬픔과 희망을 동시에 드러내고 고창하는 노래이지만, 멀리는 만주 독립군들의 의기에서부터 가까이는 4·19혁명 이후 조국을 민주화하려는 비원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노래다. 우리의 현대사가 지극한 고통 속에 들어 있는 순간에 지극히 고결한 정신으로 만들고 부른 이 노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어떤 사람들의 증오를 사고 오명을 둘러쓰게 된 것도 사실이다.
대단한 이야기를 할 것도 없다. 이 노래를 부르며 거리로 나가는 젊은이들을 붙잡아 고문했던 사람들은 그만두고라도 그들을 바라보며 ‘공부하기 싫어서 데모를 하는 놈들’이라고 굳게 믿으려 했던 사람들은 이 노래와 함께 이루어진 민주화가 자신들의 삶을 부정하고 조롱하는 것만 같을 것이다. 그들은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조국의 민주화를 역사적 발전이라고 생각하기는커녕 세상이 잠시 물구나무를 서고 있다고 믿으려 할 것이며, 도처에서 비정상이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도착된 현실을 볼 것이다. 저 깊고 넓은 애도의 감정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한탄하고 있을 그들의 사과나 애도에 진심이 담겨 있을 리 없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지 못하기에 역사 속에서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한다.
대통령은 그동안 통일 ‘대박’을, ‘원수’ 규제를, 해경 ‘해체’를 말하였다. 대통령은 감정의 동의를 얻기보다는 감정의 파도를 일으키고 싶어한다. 파도에는 격렬한 출렁임이 있을 뿐 깊이가 없다. ‘진정성’이 어떻게 정의되건 그것은 한 인간이 제 마음 깊은 자리에서 끌어낸 생각으로 자신을 넘어서서,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을 때에만 확보된다.
<황현산 |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대통령의 말이 시인의 말과 같은 방식으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거기에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고 역사적 정황이 있다. 우리가 같은 사안, 같은 말에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를 조금 심각하게 묻다 보면 곧바로 민주주의의 문제와 만나게 되고 결국은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두운 바닷물 속에 다시 돌아올 길 없이 잠긴 생령들을 생각하며, 뭇사람들의 인정이 그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과 죄의식을 어떤 방식으로건 표현하고 싶어할 때, 다른 한편에는 그 애도의 마음을 의심하고 우려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며 그 감정까지 차단하려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거대한 권력을 쥐고 있거나 그 언저리를 맴도는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생각이나 감정을 공유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이라고 믿고 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여기는 감정 가운데는 조국의 민주화를 바라는 오랜 열망이 거의 첫 자리에 포함되어 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34주기 기념일을 맞게 된 것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여를 넘기고 애도의 감정이 깊고 넓어졌을 때였다. 기념식에서 정부의 관계 부처는 여러 가지 핑계와 낯익은 수단들을 동원하여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을 막았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민주화운동과 깊이 연결되어 한 시대의 슬픔과 희망을 동시에 드러내고 고창하는 노래이지만, 멀리는 만주 독립군들의 의기에서부터 가까이는 4·19혁명 이후 조국을 민주화하려는 비원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노래다. 우리의 현대사가 지극한 고통 속에 들어 있는 순간에 지극히 고결한 정신으로 만들고 부른 이 노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어떤 사람들의 증오를 사고 오명을 둘러쓰게 된 것도 사실이다.
대단한 이야기를 할 것도 없다. 이 노래를 부르며 거리로 나가는 젊은이들을 붙잡아 고문했던 사람들은 그만두고라도 그들을 바라보며 ‘공부하기 싫어서 데모를 하는 놈들’이라고 굳게 믿으려 했던 사람들은 이 노래와 함께 이루어진 민주화가 자신들의 삶을 부정하고 조롱하는 것만 같을 것이다. 그들은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조국의 민주화를 역사적 발전이라고 생각하기는커녕 세상이 잠시 물구나무를 서고 있다고 믿으려 할 것이며, 도처에서 비정상이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도착된 현실을 볼 것이다. 저 깊고 넓은 애도의 감정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한탄하고 있을 그들의 사과나 애도에 진심이 담겨 있을 리 없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을 넘어서지 못하기에 역사 속에서 자신을 객관화하지 못한다.
대통령은 그동안 통일 ‘대박’을, ‘원수’ 규제를, 해경 ‘해체’를 말하였다. 대통령은 감정의 동의를 얻기보다는 감정의 파도를 일으키고 싶어한다. 파도에는 격렬한 출렁임이 있을 뿐 깊이가 없다. ‘진정성’이 어떻게 정의되건 그것은 한 인간이 제 마음 깊은 자리에서 끌어낸 생각으로 자신을 넘어서서,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을 때에만 확보된다.
<황현산 |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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