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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6: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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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남에게 베풀고 대접하라
본문: 누가복음6: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사도행전 9장 36- 42절에 보면 도르가(다비다)라는 성도가 나옵니다. 도르가는 항구도시인 욥바 출신의 신실한 여신도로 복음전도 초기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선행과 구제를 통해 그리스도적 사랑을 몸소 실천한 따뜻한 사랑과 희생적인 봉사를 한 인물로서 병으로 죽었다가 베드로의 기도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러한 도르가의 소생소식이 욥바 전체에 퍼짐으로써 처음 살아있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생명 가운데로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도르가는 어려운 이웃 사람들을 위하여 많은 구제와 선행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죽었을 때 많은 과부들이 도르가가 만들어준 겉옷과 속옷을 내어 보이며 울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녀의 생전의 삶의 모습을 웅변적으로 반증해 줍니다. 성경에 과부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사람들입니다.(출22:22, 신10:18) 우리 예수님도 과부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눅7:13) 도르가가 과부들을 특별히 돌보아주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마음을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선행을 베풀되 많은 재산이 있어서가 아니라 손수 시간과 정성을 들여 그들의 옷을 만들어 과부들과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입니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4:9-10)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6:17-18)
또한 성경은 우리에게 형제를 사랑하라는 명령과 함께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피를 나눈 형제도 사랑해야 하지만, 피를 나누지 않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부자는 끼니를 잇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 때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손님 대접하기를 천사 대접하듯이 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삶의 양식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구역 예배를 통해 자기 집을 공개하는 것도 이런 훈련 중 하나가 됩니다. 동창회 같은 것 말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초대한 일이 몇 번이나 있습니까? 앞으로는 이런 일들이 많이 있기를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목회자를 초대하면 정성껏 식사를 대접할 것입니다. 거지도 그런 마음으로 대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대접할 가치가 없는, 대접할 대상이 아닌 분들을 예수님 모시듯이 잘 대접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대인 관계의 독특성은 고난 받고 있고, 학대받고 있고, 감옥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고난 받는 형제들에 대한 깊은 긍휼과 애정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눈물 어린 긍휼을 기억하며, 지체를 대해 보십시오. 그 긍휼의 풍성함으로 사람을 대해 보십시오. 그 사람뿐 아니라 당신에게도 놀라운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14:31)
이스라엘에 가면 큰 호수가 두 개가 있습니다. 너무 커서 바다라고 합니다. 하나는 갈릴리호수이고 다른 하나는 사해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푸르고 청청합니다. 그 호수 안에는 많은 물고기가 살고 있습니다. 성지순례 때 갈릴리 해변에서 식사를 하게 되면 베드로 고기라고 하는 그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를 먹게 해줍니다. 그러나 사해는 염분이 높은 매우 짠물로 되어 있습니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사람도 거기 들어가면 몸이 둥둥 뜨게 되어 익사할 염려가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너무 물이 짜서 물고기가 없습니다. 다른 생물도 없습니다. 조개 같은 패류도 없습니다. 진흙 갯벌뿐입니다. 두 호수는 왜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두 호수의 근원은 같습니다. 북쪽 헬몬산에서 눈이 녹아 물이 내려오면 그 물은 갈릴리 호수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갈릴리 호수는 계속하여 그 물을 요단강을 통하여 하류로 내려보냅니다. 그런데 사해는 그 물을 받기만 하고 다른 곳으로 흘려 보낼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염분이 높아져 아무 생물도 살지 못하는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해(死海)라고 합니다. 영적인 해석입니다. 줄줄 아는 자는 복 받은 자입니다. 베풀 줄 모르면 사해와 같은 죽은 바다처럼 됩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에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다” 하였고,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하였습니다.
남에게 베풀고 대접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남에게 인정을 받고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 축복받기를 원하며 이웃에게 대접받기를 원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남에게 인정도 받고 사랑도 받고 하나님께 축복도 받고 대접도 받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있을까요? 공자의 제자 중에 자공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자공이 공자에게 “선생님! 우리가 평생 동안 실천할 도리를 한마디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게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 이것이 바로 일생을 살아갈 삶의 모토라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에게 괴로운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고 했습니다. 유명한 유대교 랍비인 힘엘 역시 “네 자신에게 싫은 것은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의 전부요, 나머지는 해설에 불과하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극적으로 나가지 아니하시고 한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데로 남에게 대접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동윤리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위대한 축복의 법칙을 사용한 분인 것입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과 이웃을 극진히 대접한 것입니다.
더구나 무엇보다도 그는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에 나가서 크게 승리하고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올 때 하나님의 제사장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고 그 제사장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14장 18절로 20절에 보면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멜기세덱은 그 당시 중동에 거하는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올 때에 그 멜기세덱이 환영하는 환영에 참석해서 떡과 포도주를 받고 난 다음에 축복을 얻고 모든 얻은 전리품 중에 십일조를 다 계산해서 온전히 제사장에게 드렸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건이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현실생활 속에 함께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끊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의 삶속에 멸시하고 무시하는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축복받은 가장 근본적인 비결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순종하고 온전한 제사를 드림으로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구약시절에는 주의 종 제사장이 축복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창세기 15장 1절에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그리고 창세기 15장 4절로 6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축복받은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고, 이웃을 극진히 대접하였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이유는 부지불식간에 하나님과 천사를 대접했습니다.
어린이 대공원과 아차산 사이의 능동로 가구거리에 가구대리점을 하시는 최 집사가 20대 때 시골에서 상경하여 그 가구점 점원으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날 소나기가 갑자기 쏟아지는데 바로 자기 점포 앞 대로에서 택시를 기다리던 할머니 한 분이 비를 맞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최 집사는 할머니를 점포 안으로 모셔드려 따뜻한 차 한잔을 권했습니다. 그런 뒤 자신이 택시를 잡아서 할머니를 귀가시켰습니다. 며칠 후 전화를 받고서야 그 할머니가 재벌 회장의 장모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회장은 이런 성실한 청년이 일하는 회사의 가구는 믿어도 될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모든 사무용품을 이 회사 제품으로 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주께 하듯 하면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대접하기를 원했었습니다. 대접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더구나 그 당시에 중동에서는 사람이 객으로 지나가면 나와서 그 사람을 집으로 초청하여 발도 씻겨 주고 대접을 했습니다. 또 밤에 잠자리가 없는 사람은 시중이 앉아 있으면 청해다가 집에서 잠자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 습관이었습니다.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었는데 아브라함은 더구나 손님대접하기를 즐겨했었습니다. 부지불식간에 그는 하나님과 천사를 대접했습니다.
창세기 18장 1절로 5절에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내가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 당신들의 마음을 쾌활케 하신 후에 지나가소서 당신들이 종에게 오셨음이니이다 그들이 가로되 네 말대로 그리하라”
처음에 이렇게 말할 때 아브라함은 그 세 분이 하나님 일행이신줄 모르고 단지 나그네인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천사를 데리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아브라함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냥 나그네인줄 알고 그는 손 대접하기를 즐거워하기 때문에 이분들을 청해서 대접하기를 원했습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13:1, 2)
아브라함은 정성어린 대접을 했습니다.
창세기 18장 6절로 8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급히 장막에 들어가 사라에게 이르러 이르되 속히 고운 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가 반죽하여 떡을 만들라 하고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 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과 천사 두 사람이 잡수셨습니다. 살찐 송아지로 요리한 것을 하나님은 기쁘게 잡수셨습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이 대접하는 그 정성을 보십시오. 고운 밀가루로 빵을 만들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방앗간도 시원찮아서 손으로 밀가루를 찍었기 때문에 고운 밀가루를 만들려면 상당한 힘이 들었습니다. 대개 거친 밀가루를 먹었는데 고운 밀가루는 특별히 귀한 손님이 오실 때만 대접하는 것인데 그가 고운 밀가루를 가지고 빵을 구우라고 말한 것입니다. 손님이 오면 제일 좋은 음식으로 아브라함처럼 우리가 대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보면 소떼 중에 들어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골랐습니다. 빼빼 마른 송아지 고르지 않으셨어요.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입니다. 그런데 세 사람의 손님을 대접하는데 송아지 온통 한 마리를 다 잡아 요리했습니다. 얼마나 정성을 다하고 풍성하게 손대접하기를 힘쓴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버터와 우유를 가져왔습니다. 담백질이 풍부하고 지방과 칼슘이 많은 버터와 우유를 대접해서 여행하는데 피곤을 풀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렇기 하니까 그 세 분이 이 음식을 다 맛있게 드시고 그리고는 축복을 해주었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창18:9, 10)
보통 나그네인줄 알았는데 이제 알고 보니 여호와 하나님이 두 천사를 데리고 지나가다가 아브라함의 장막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고 말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 10- 13)
나그네와 손 대접을 잘하면 하나님을 대접할 수 있는 기회도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한 문둥병 환자가 성 프란시스를 찾아와 하룻밤을 자고 가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의 얼굴과 손은 문들어져 있었고 또 다 헤어진 신발사이로 썩어가는 발가락이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성 프란시스는 자신의 그 옷을 벗어 그를 감싸안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프란시스는 따뜻한 물로 진물나는 그의 상처를 씻어주고 저녁식사를 극진히 대접한 후 하나밖에 없는 방에서 그와 함께 잠을 잤습니다. 그날 밤 프란시스의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손을 잡으며 “프란시스야 오늘 대접 잘 받았다. 고맙다.” 깜짝 놀라 프란시스가 깨어나 보니까 같이 잠을 자던 문둥병 환자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향기만 물씬하게 나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는 문둥병 환자인줄 알고 대접을 했는데 주님이 문둥병 환자의 모습으로 그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나그네를 대접하자 부지불식간에 예수님을 대접하게 됩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이 우리를 방문하실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대하듯 정성껏 나그네를 대접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구두장이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이 구두장이 할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은 예수님을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꿈 속에 나타나 내일 너희 집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어찌나 기뻤던지 온갖 정성을 들여 음식을 가득 차려놓고 기다렸으나 어찌된 셈인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예수님은 그 날 저녁 가게문을 닫을 때까지도 오시지 아니하였습니다.
단지 거지가 한 번 오고, 또 한 번은 청소부 할아버지가 오고, 저녁 때는 사과장수 아주머니가 왔을 뿐이었습니다. 이 구두장이 할아버지는 그만, 거지와 청소부할아버지와 사과장수 아주머니에게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을 나누어 주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모두 너무나 불쌍하게 보였고 실제로 추위 때문에 또 배고픔 때문에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날 밤 예수님께서 꿈속에 다시 나타나시매 이 구두장이 할아버지는 왜 오시지 않으셨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나는 오늘 너희 집에 세 번이나 갔었는데 세 번 다 대접을 잘 받았다. 참으로 너는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알겠다. 네 이웃에 사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곧 나를 대접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톨스토이의 작품 속에 나오는 것으로 마태복음25장에 언급된 최후의 심판광경을 생각나게 합니다. 최후의 심판시 의인으로 판결을 받은 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고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의인들은 오히려 놀라서 언제 이런 일을 당한 주님을 도와 드린 적이 있느냐고 반문을 합니다. 이에 심판주되신 임금님은 “분명히 말하건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심판의 근거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며 용기를 북돋우어 주는 것이 곧 주님을 대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여주었으며 내가 목마를 때 너희가 마셨으며 내가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으며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봐 주었다. 주님 언제 우리가 그렇게 하였나이까. 너희 이 지극히 적은 소자 중 한 사람이 한 것이 바로 내게 해준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심정으로 대접하고 돌보아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장막을 지나가던 세 사람의 손님을 지극한 정성으로 대접한 결과로 하나님과 천사들을 대접하고 형언할 수 없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 한 잡지에 실린 기사를 보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이기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31%나 되고 비인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23%나 되고 위선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19%나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안 믿는 사람들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을 부정적인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결과에 대해서 우리가 가슴 아프게 생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접하는 마음으로 이웃에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주었으면 오늘날 불신의 사회가 우리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와 같은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7:12)
이 황금률은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두는 자연법칙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씨를 뿌리고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은 만고 불변의 진리입니다.
인생은 심은 대로 거둡니다. 어떤 제자가 스승인 현인에게 물었습니다.『제게 왜 기쁨이 없습니까? 왜 다른 사람들이 제게 행복을 주지 못합니까?』 현인은 말했습니다.
『그대는 어찌 한 되짜리 그릇을 갖고 한 말의 쌀을 받아 오려고 하는가. 한 조각의 천을 들고 옷 만드는 집에 가서 한 벌의 옷을 지어 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매사를 찡그린 얼굴로 대하면서 기쁨이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정한 이웃, 베푸는 사람이 되지 않고서 어찌 다른 사람이 행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성경은 말씀합니다.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잠11:18)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잠22:8)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잠26:2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6: 7- 10)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126:5)
「사람의 행위를 따라 갚으사 각각 그의 행위대로 받게 하시나니」(욥34: 11)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고후9:6)
적게 심는 자가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가 많이 거두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가라지를 심고 보리를 기대하지 말라. 악습을 심으며 어떤 날 우연히 고매한 품성의 인물이 되리라고 기대하지 말라. 시기와 증오를 심으며 우정과 사랑을 기대하지 말라. 뱀의 알을 품고 병아리가 깨일 것을 기대하지 말라. 남의 인격을 멸시하는 사람아 그대가 존경받을 것을 기대한다면 탱자를 심어놓고 감귤을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생은 씨 뿌리고 심은 대로 거둡니다.
셋째로,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이유는 그에게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이 원하셨을 때 그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재물로 드리라고 말했습니다.
창세기 22장 1절로 2절에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여러분 이것이야 말로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어느 일본 목사님이 설교를 하면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외독자를 바치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은 순종했으나 자기는 딸이 둘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를 바치라하면 도망을 치고 말겠다고 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할 것입니다. 어떻게 내 자식을 불로 태워서 드릴수가 있습니까?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가장 귀중하고 귀중한 독자라도 하나님 명령에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절대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창22:3)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히11:17)
정말로 어려운 일이지만 자기에게 가장 귀한 것이라도 하나님이 내놓으라면 내놓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복종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로 23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크게 기뻐하시고 말씀에 불순종 하는 것은 우상 사신에 절을 하고 사수를 행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아브라함은 그 외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에 사흘길을 걸어가서 산위에 올라가서 제단을 만들고 장작을 펼쳐 놓고 그 아들 이삭을 장작위에 얹어 놓고 발로써 목을 밟고 칼로써 그 경동맥을 끊으려고 했었습니다.
창세기 22장 15절로 18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에게 자기의 가장 귀한 것을 성령의 음성을 쫓아 드리면 하나님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복을 내리십니다.
옛날 평안북도 정주에 백사겸이라는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게 되자 열심히 전도하고 교회일에 충성을 다해 봉사했는데 그 마을에 선교사가 들어와서 교회를 지으려고 땀을 흘리며 벽돌을 쌓고 고생했으나 교회당을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백사겸 성도님은 전답 1천 평 전부를 다 팔았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를 짓는데 바쳤습니다. 그후 선교사님은 미안해서 백사겸 성도를 사찰로 임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농사를 지을 수 없습니다. 전답을 다 팔아서 교회에 바쳐 버렸으니 농사지을 수 없으므로 교회 사찰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아들을 학교에 보내 교육을 시키고 나중에 미국 유학까지 시켰습니다. 그 아들은 미국 파커 대학을 졸업하고 프린스톤 신학교와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예일대학에서 철학박사, 파커대학에서 신학박사, 스프링필더 대학에서 인문학박사, 디포대학에서 법학박사, 연세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분이 바로 연세대 총장을 했고 교육부장관을 지낸 한국기독교의 거장인 백낙준 박사였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성령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사업에 다받쳐 놓고 난 다음에 하나님은 그 아들을 한국 역사에 우뚝하게 남는 위대한 인물로 복을 내려 주신 것입니다.
성경 시편 25편 12절로 1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고 말한 것입니다.
한국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외형적으로 우리 한국을 바라보면 한국 사람은 단결이 잘 안되고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이며 퍽 부정적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신문에 보면 늘 분열하고 싸움하는 것입니다. 남북이 갈려있어 늘 투쟁하지요. 여당과 야당정치인들의 싸움, 동서가 갈려서 비난공격하지요. 노사가 끊임없이 분쟁을 하고 있지요. 계층간에 투쟁이 있지요. 연령간에 투쟁이 있습니다. 어느 곳에 가나 분쟁이요, 혼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이 망할 것 같으면서도 안 망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한국 사람이 복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세계에서 한국 사람만큼 푸짐하게 손대접 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은 손님대접하기를 잘합니다. 자기들은 굶을지라도 손님은 아주 풍성하게 대접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똑같이 하나님께 복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이런 심성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한국인만큼 푸짐하게 손대접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또 한국인은 선물주기를 좋아합니다. 아주 선물도 푸짐하게 줍니다. 일본 사람들은 선물을 어쩌다가 주는데 작은 과자봉지 하나 줍니다. 작은 과자봉지. 한국에는 그런 선물주면 부끄럽게 여기고 그런 선물 안줍니다. 미국이나 구라파에는 가면 장미꽃 한포기. 달랑 들고 갑니다. 한국 사람은 큰 보따리에 선물을 싸서 방문도 하고 또 선물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한국 사람이 너무 선물주기를 좋아하다 보니까 그것이 빗나가서 뇌물천국이 되어서 사회적인 물의가 생깁니다. 선물주기를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 눈으로 볼 때에는 좋은 품성입니다. 한국인은 자기는 먹지 않고 쓰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선물을 주는 그런 푸짐하고 좋은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뇌물을 주면 안됩니다. 뇌물은 지혜자(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합니다.(출23:8, 신16:19)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잠17:23)
한국 성도들은 헌금과 십일조 드리기를 열심히 합니다. 그 때문에 한국교회가 세계 기독교의 역사상에 유래를 볼 수 없을 만큼 축복을 받고 발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 자그마한 나라가 미국 다음으로 선교사를 제일 많이 보내고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보게 될 때 선교사를 반을 보낸 나라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옛날에는 구라파와 영국이 온세계 선교사를 보낼 때 구라파가 세계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미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선교사를 보내고 있고 미국이 하늘아래 가장 강대한 국가인데 미국 다음으로 한국이 이 조그마한 나라에서 선교사를 가장 많이 내보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그러므로 한국 사람들은 여러 가지 단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결점도 많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장점을 보시고 복을 허락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될 것은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정성껏 헌금을 드리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며 삶을 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복받고 창대케 한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베풀고 대접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봉사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 벌어놓고 봉사하겠다, 돈 벌어놓고 베풀겠다는 생각은 모두 사단 마귀의 작전입니다. 오늘 해야 합니다. 지금 해야 합니다. 잠언 27장 1절에서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그 부자에게는 감사가 없었습니다. 큰 재물 가진 것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는 건강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복 가운데 제일 큰 복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감사를 모른 채 인생을 살았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부자로 살던지, 거지로 살던지 한번은 죽음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 부자는 음부에 들어갔고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직접 주신 이야기입니다. 거지 나사로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이름이 없습니다. 성경학자들은 해석합니다. 그것은 그 부자의 유가족을 생각해서 예수님은 실명을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을 갖고 계십니까? 베푸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물질이 있어야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적게 가지고 있어도 베풀어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이것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부모님들이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 모두 구제의 손길을 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넬료의 구제를 하나님이 기억하셨듯이 우리의 구제도 하나님이 기억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가 이웃에게 베풀고 대접하기를 좋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들도 아브라함보다 더 큰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이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쓸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보호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모든 날을 되돌아보면 주님의 은혜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복음과 사랑에 빚진 저희가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나누는 일에 힘쓰기보다 나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 살기 급급했던 것을 용서해 주소서. 이제 우리에게 새로운 믿음의 눈을 열어 감사의 조건들을 바라보게 하시고 어렵고 소외된 이웃들을 바라보게 하소서. 우리의 구제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을 소유한 자임을 깨닫게 해주소서. 예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돌보신 것처럼 우리도 소외된 이웃들을 돌아볼 때 더욱더 풍성하게 임하는 주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하소서. 주님께 기도하오니 오늘 세상에서 굶주리고 병들어 앓고 있는 수많은 백성들을 굽어살피소서. 평안하고 평온하게 살아온 우리가 진정 그들과 공감하며 주님께서 그들이 누리기 원하시는 풍성한 삶을 그들이 누릴 수 있도록 모든 능력을 다해 돕게 하소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 하는데로 먼저 남을 대접하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께 복을 받고자 하면 하나님을 먼저 대접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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