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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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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가 끝난 아침 출근길 전철역 앞. 몇주 동안 봐왔던 풍경이 사라졌다. 출근 때마다 전철역 입구 양쪽에 도열해 일제히 인사하는 선거운동원들 사이를 통과해야 했다. 그건 흡사 ‘꽃터널’이다. 빨간색, 파란색에 하얀색까지 옷을 맞춰 입은 운동원들은 양쪽으로 빼곡하게 늘어서 출근하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기호 ○번 XXX입니다”라고 외치며 고개를 숙였다. 꽃터널을 지날 때마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민망했다. 꽃터널을 장식한 누군가는 당선되고, 누군가는 낙선했을 텐데, 오늘 아침에는 빨간꽃도 파란꽃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전날 밤 한바탕 돌풍이 몰아쳤으니 꽃이 져 흔적없이 날아가버리는 것도 당연하겠다.
꽃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었다. 저들은 무엇을 위해 저러는 것일까. 저렇게 하는 것이 과연 선거에서 도움이 될까. 과도한 공손함은 예가 아니라는데 왜 저렇게 과한 예의를 차려 불편하게 하는 것일까. 주민들의 ‘종’이 돼 지역사회에 봉사하겠다고 나선 사람들 아닌가, 그 진정성이 있다면 오히려 당당해야 하지 않을까 등등의 헛된 의문들이다.
흔히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를 움직이는 기초원리다. 하지만 꽃처럼 아름답지만은 않고, 기초원리가 될 만큼 합리적이지도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번 선거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면 말고식 네거티브 공세와 흑색선전, 색깔론, 관권선거에 공작정치 논란까지, 빠지면 서운해할 ‘악역’들이 모두 출연했다. 참 열심히들 살았다. 선거라는 게 그렇다보니 당선될 자격이 없는 사람, 당선돼서는 안될 사람들도 당선되곤 한다. 열심히 살아서 승리한 이들 중 일부는 공직선거법 위반이니 명예훼손이니 등으로 검찰을 들락날락하다 직을 잃을 것이다.
여기에 최근 선거가 보여주는 특징 중 하나가 민주주의가 아닌 선거공학의 장이 돼 가고 있다는 점이다. 민의를 정확히 반영해 공동체를 이끌 권력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표를 많이 얻기 위해 어느 부분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를 과학으로 분석해 실행하는 득표작전의 실험장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지난 대선에서 여실히 목격했다. 이런 선거의 특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렇게 현실의 민주주의는 때론 불편하고, 기대만큼 합리적이지 못하고, 그 의미만큼 숭고하지 못하다. 진흙탕 싸움의 선거전을 볼 때마다 이런 민주주의 “개나 줘버려”라고 외치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다. 역사가 그 교훈을 보여준다. ‘미인박명’이라 불리는 아름다웠지만 너무 짧았던 독일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년)의 비극이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최초로 명문화한 바이마르 헌법은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와 언론·집회·결사·신앙·양심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은 물론 복지권과 사회권, 인간다운 생존권까지 규정한 현대 민주주의의 교범으로 꼽힌다. 그러나 바이마르공화국은 최고의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도 극좌와 극우의 극심한 대립, 계층과 계급 간의 분열, 대공황이라는 경제적 혼란을 겪어야 했다. 지친 독일 국민들은 결국 바이마르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절대권력을 넘겼다. 그리고 그 결과는 독일뿐 아니라 전 인류의 재앙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역시 결론은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은’ 것처럼 민주주의도 아무리 불편하고 불완전해도 좋다는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계속 좌절하고 실망하더라도 민주주의를 버릴 수 없는 이유다. 무엇보다 우리 후손을 위해서다. 여섯살 난 우리 아들의 민주주의는 지금보다 좀 더 나아져야 한다. 시인 김수영을 이렇게 빌린다.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알 때까지 자라라.”
<김준기 사회부 차장>
흔히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를 움직이는 기초원리다. 하지만 꽃처럼 아름답지만은 않고, 기초원리가 될 만큼 합리적이지도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번 선거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면 말고식 네거티브 공세와 흑색선전, 색깔론, 관권선거에 공작정치 논란까지, 빠지면 서운해할 ‘악역’들이 모두 출연했다. 참 열심히들 살았다. 선거라는 게 그렇다보니 당선될 자격이 없는 사람, 당선돼서는 안될 사람들도 당선되곤 한다. 열심히 살아서 승리한 이들 중 일부는 공직선거법 위반이니 명예훼손이니 등으로 검찰을 들락날락하다 직을 잃을 것이다.
여기에 최근 선거가 보여주는 특징 중 하나가 민주주의가 아닌 선거공학의 장이 돼 가고 있다는 점이다. 민의를 정확히 반영해 공동체를 이끌 권력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표를 많이 얻기 위해 어느 부분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를 과학으로 분석해 실행하는 득표작전의 실험장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지난 대선에서 여실히 목격했다. 이런 선거의 특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렇게 현실의 민주주의는 때론 불편하고, 기대만큼 합리적이지 못하고, 그 의미만큼 숭고하지 못하다. 진흙탕 싸움의 선거전을 볼 때마다 이런 민주주의 “개나 줘버려”라고 외치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민주주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다. 역사가 그 교훈을 보여준다. ‘미인박명’이라 불리는 아름다웠지만 너무 짧았던 독일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년)의 비극이다.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최초로 명문화한 바이마르 헌법은 보통·평등·직접·비밀선거와 언론·집회·결사·신앙·양심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은 물론 복지권과 사회권, 인간다운 생존권까지 규정한 현대 민주주의의 교범으로 꼽힌다. 그러나 바이마르공화국은 최고의 민주주의 체제 속에서도 극좌와 극우의 극심한 대립, 계층과 계급 간의 분열, 대공황이라는 경제적 혼란을 겪어야 했다. 지친 독일 국민들은 결국 바이마르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절대권력을 넘겼다. 그리고 그 결과는 독일뿐 아니라 전 인류의 재앙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역시 결론은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은’ 것처럼 민주주의도 아무리 불편하고 불완전해도 좋다는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계속 좌절하고 실망하더라도 민주주의를 버릴 수 없는 이유다. 무엇보다 우리 후손을 위해서다. 여섯살 난 우리 아들의 민주주의는 지금보다 좀 더 나아져야 한다. 시인 김수영을 이렇게 빌린다.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알 때까지 자라라.”
<김준기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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