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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계 미국 비평가 가브리엘 슈왑은 최근 발표한 에세이에서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을 지칭해 “미래에서 온 유령”이라는 표현을 썼다. 체르노빌은 구 소련에서 발생한 원전사고의 현장이다. 얼마 전 유튜브에 공개된 영상을 보면 사고 이후 30여년이 지난 지금 재난의 현장은 자연을 통해 치유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숲이 무성하고 동물들이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이 뛰어놀고 있다. 게다가 한때 대피했던 주민들까지 다시 돌아와 살고 있다.
변화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심지어 체르노빌을 구경하기 위해 관광객이 밀려들고 있다. 한편으로는 안전을 국가과제로 설정하면서 또 한편으로 이렇게 재난에 무감각한 행동을 보이는 모순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슈왑은 이런 ‘재난의 상품화’에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눈길에 들어온 것은 체르노빌로 다시 돌아가서 살고 있는 주민들의 진술이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에 이들은 삶의 터전을 버릴 수 없어서 자신들이 살던 집으로 돌아갔다. 그 공포의 장소에서 주민들은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유전병에 아랑곳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남겨진 일은 ‘그래도’ 살아가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보다 자신의 터전에서 편안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이들의 주장을 반박하기란 쉽지 않다. 슈왑은 이런 체르노빌의 현실이야말로 우리에게도 닥쳐올 수 있는 미래라고 말한다. 막상 재난이 닥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재난은 부정성의 세계이다. 일상에 도사리고 있다가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앗아가기 때문이다.
6·4 지방선거의 결과에 대해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야당 지지자들의 입장에서는 선거 결과가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월호 참사에서 보여준 무능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선거 결과는 의외로 여당의 선방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강한 야당’에 대한 요구도 등장한다. 물론 양당에 한정해서 이번 선거 결과를 들여다보면, 큰 변화를 발견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눈을 조금 돌려서 다른 지점을 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결과들이 많다.
가장 중요한 결과는 교육감 선거에서 진보를 선명하게 내세운 후보들이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생태주의를 표방하는 녹색당이 0.43%의 지지율을 획득했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득표율이 정당법 기준인 2%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등록이 취소될 수밖에 없지만, 원전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올린 성과이기 때문에 정당으로서 실패했을지언정 운동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성과라는 생각이다. 이 결과들은 선거제도를 통해 고착된 정치공학의 산물이라기보다 세월호 참사라는 재난에 대처하기 위한 윤리적 결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평가를 두고 ‘정신승리’라고 힐난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슈왑의 “미래에서 온 유령”을 상기한다면 이런 생각이 지나친 예단이라고 일축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체르노빌의 유령은 과거에서 온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왔다. 마찬가지로 6·4 지방선거에서 진보 교육감을 당선시키고 녹색당을 지지한 이들은 침몰한 세월호라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세월호를 막기 위해 한 표를 행사한 것이다. 세월호의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 미래에서 온 유령이라는 사실을 이들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투표라는 절차적 형식도 중요하겠지만, 목적을 가져야만 투표가 형식에 머물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투표의 목적을 만들어내는 것이 윤리라고 한다면,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슈왑이 지적한 부정성이다. 우리의 존재를 사라지게 만들고, 모든 생명을 죽음에 빠뜨리는 부정성의 공포와 윤리적 결단은 서로 만난다.
지금까지 이 공포를 적절하게 이용했던 이들은 한국의 우파들이었다. 한국전쟁에서 기인한 전쟁이라는 부정성의 공포를 핑계로 이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이들이 상기시키는 공포는 이제 과거를 끊임없이 호출하는 것 이외에 다른 생각을 가로막아버린다는 점에서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낼 수가 없다. 세월호 참사는 이런 퇴행을 전면적으로 돌아보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재난의 공포를 미래로 확장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만들어낸 정치성은 온전하게 투표행위를 통해 재현할 수가 없다. 앞으로 이 정치성이 어떻게 “미래에서 온 유령”을 환대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이번 선거 결과가 남긴 과제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6·4 지방선거의 결과에 대해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야당 지지자들의 입장에서는 선거 결과가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월호 참사에서 보여준 무능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선거 결과는 의외로 여당의 선방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자연스럽게 ‘강한 야당’에 대한 요구도 등장한다. 물론 양당에 한정해서 이번 선거 결과를 들여다보면, 큰 변화를 발견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눈을 조금 돌려서 다른 지점을 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결과들이 많다.
가장 중요한 결과는 교육감 선거에서 진보를 선명하게 내세운 후보들이 당선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생태주의를 표방하는 녹색당이 0.43%의 지지율을 획득했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득표율이 정당법 기준인 2%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등록이 취소될 수밖에 없지만, 원전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올린 성과이기 때문에 정당으로서 실패했을지언정 운동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성과라는 생각이다. 이 결과들은 선거제도를 통해 고착된 정치공학의 산물이라기보다 세월호 참사라는 재난에 대처하기 위한 윤리적 결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평가를 두고 ‘정신승리’라고 힐난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슈왑의 “미래에서 온 유령”을 상기한다면 이런 생각이 지나친 예단이라고 일축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체르노빌의 유령은 과거에서 온 것이 아니라 미래에서 왔다. 마찬가지로 6·4 지방선거에서 진보 교육감을 당선시키고 녹색당을 지지한 이들은 침몰한 세월호라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세월호를 막기 위해 한 표를 행사한 것이다. 세월호의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 미래에서 온 유령이라는 사실을 이들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투표라는 절차적 형식도 중요하겠지만, 목적을 가져야만 투표가 형식에 머물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투표의 목적을 만들어내는 것이 윤리라고 한다면,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슈왑이 지적한 부정성이다. 우리의 존재를 사라지게 만들고, 모든 생명을 죽음에 빠뜨리는 부정성의 공포와 윤리적 결단은 서로 만난다.
지금까지 이 공포를 적절하게 이용했던 이들은 한국의 우파들이었다. 한국전쟁에서 기인한 전쟁이라는 부정성의 공포를 핑계로 이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이들이 상기시키는 공포는 이제 과거를 끊임없이 호출하는 것 이외에 다른 생각을 가로막아버린다는 점에서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낼 수가 없다. 세월호 참사는 이런 퇴행을 전면적으로 돌아보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재난의 공포를 미래로 확장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만들어낸 정치성은 온전하게 투표행위를 통해 재현할 수가 없다. 앞으로 이 정치성이 어떻게 “미래에서 온 유령”을 환대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이번 선거 결과가 남긴 과제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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