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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0: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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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2014.5.11 http://dabia.net/xe/754709 |
정용섭 목사
예수는 양의 문이다
요10:1-10, 부활절 넷째 주일, 2014년 5월11일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6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다음의 질문에 대답해보십시오. 우리는 왜 교회에 다닐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왜 믿는 걸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렇게 당연한 게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그리고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불행해지는 일은 없으며 부도덕한 사람이 되는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더 편하고 재미있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죽음, 고독이 두려워서, 또는 죽어 천당에 가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다 부차적인 요소들입니다. 핵심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에게 우리의 전체 운명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고 믿습니다. 왜 옳은지에 대한 해명을 해야 합니다. 즉 진리논쟁을 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조건 우격다짐으로 우리가 옳다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무조건 우기면 신앙이 아니라 광신에 떨어집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우리와 똑같이 진리논쟁을 벌였고, 그런 진리논쟁의 과정에서 출현한 게 신약성서입니다. 오늘 우리가 제3독서로 읽은 요 10:1-10절도 그런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10절까지이지만 그 내용은 18절까지 이어집니다. 전반부인 1-10절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양의 문’이라고 하셨고, 후반부인 11-18절에서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양의 문이나 선한 목자나 의미는 같습니다. 양들은 문을 통해서만 우리에 들어갈 수 있고, 선한 목자를 만나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에게 구원의 문이고 생명의 인도자라는 겁니다. 이것을 말씀하신 이유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양을 도적질하기 위해서 울타리를 넘어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양을 지키는 게 아니라 도적질하려는 삯군 목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누굴까요? 이 이야기의 전후 맥락을 아는 게 여기서 중요합니다.
설교 본문에 앞서 나오는 요 9장은 예수님이 시각장애인을 고친 이야기를 자세하게 전합니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안식일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예수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사건을 두고 논란이 이어집니다. 바리새인들은 시각장애인이었다가 고침을 받은 사람과 그의 부모를 불러다가 달래기도 하고 협박을 가하기도 하면서 예수님의 범법 사실을 증명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안식일 법을 수호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이런 바리새인들은 영적인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요 9:3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발끈해서 ‘우리도 맹인인가?’ 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셨습니다.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이어서 오늘 설교 본문인 ‘양의 문’과 이어서 ‘선한 목자’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뒤에 나오는 요 10:19절 이하에서 또다시 논란이 벌어집니다. 예수가 귀신에 들렸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서로 의견이 갈렸습니다. 그들은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면 분명하게 대답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리스도다.’하고 직접 대답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의 발언은 신성모독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한다는 것은 정말 황당한 일입니다. 전도관의 박태선과 통일교의 문선명을 우리가 정신 나간 사람으로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초기 기독교 신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주변에 선포하는 게 얼마나 어려웠을지 상상이 갑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증명해보라고 하며, 돌을 들어 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공동체는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만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대담하게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이비 그리스도를 도둑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본문 10절은 그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둑이 하는 일은 도둑질과 살해와 멸망입니다.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대상을 파괴합니다. 문제는 이게 겉으로 확연하게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도둑이 표시를 내면 도둑도 아닙니다. 작은 도둑은 표시가 나지만 큰 도둑은 아주 은밀해서 웬만하면 눈치를 챌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과 대립하고 있던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세련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율법은 대단히 합리적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전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베풀 수 있는 권위를 인정받습니다. 그들은 확 드러날 정도로 틀린 말은 하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악을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선을 행한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을 고친 날이 안식일이어서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을 매도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도 장애 치유를 좋은 것으로 봅니다. 만약 예수님이 안식일이 아니라 다른 날에 장애를 고쳤으면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굳이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한 겁니다. 바리새인들도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지를 깊이 생각했을 겁니다. 장애를 고친 게 좋은 일이니 안식일 문제는 모른 척 지나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의 예외를 허락하면 또 그런 일이 반복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일벌백계로 처리하는 게 옳은 거라고 판단한 겁니다. 이런 판단은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기자는 이 사태를 아주 엄정하게 판단했습니다. 그들의 태도를 도둑놈의 그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안식일 규정으로 예수라는 존재와 행위를 부정하는 것은 결국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합리성이 있더라도 근본이 잘못되었다면 결국 생명을 파괴합니다. 당장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고 맙니다.
세월호 여객선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 가까이 되었는데도 대한민국은 지금 총체적인 난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승객들을 선실에 남아 있게 하고 자신들만 탈출한 선장과 승무원들의 행동은 불가사의입니다. 사고 직후 적극적으로 인명 구조에 나서지 못하고 며칠을 허송함으로써 삼백 여명의 실종자들 중에 단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해경의 역할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둑질의 종합세트 같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배는 세월호와 다를 게 없습니다. 입만 열면 경제발전, 경쟁력 제고, 수출, 한류 등을 외칠 뿐이지 생명 존중, 생태 윤리, 정의와 평화, 노동해방, 남북화해, 전인교육에 대해서는 꿀먹은 벙어리입니다. 교회의 모든 에너지를 교회 성장에만 투입한 채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한국교회도 역시 비슷합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몰아 돌로 치려한 바리새인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세련된 복장과 언어구사 능력을 지닌 도둑입니다. 도둑은 은밀하게 도둑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풍성하게 얻게 하려고 오신 분이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 양들이 구원받고 꼴을 얻으려면 이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구원의 문, 생명의 문이라는 사실은 요한복음 곳곳에 나옵니다. 그리고 복음서를 비롯해서 모든 신약성서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도둑은 양을 훔치지만 예수님은 양에게 풍성한 꼴을 줍니다. 삯꾼은 위험이 처했을 때 양을 버리고 달아나지만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목숨을 바칩니다. 도둑과 삯꾼이 어떻다는 건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건 손에 잘 잡히지 않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걸 이해하려면 성경이 말하는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배고픈 거보다는 배부른 게 좋습니다. 아픈 거보다는 건강한 게 좋습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으면 나름으로 만족감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즉 도둑질을 통해서라도 그런 조건들을 획득하느라 눈코 뜰 새 없습니다. 이 시대가 그걸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아무도 거기서 벗어나서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목표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다음은 무엇인가요? 그 모든 것의 마지막은 무엇인가요? 죽음입니다. 죽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이는 게 우리의 실존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제가 인생이 뭔지를 아는 척하면서 고상한 인생론을 펼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이 생명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설명하려는 하는 것뿐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생명에 대한 성경의 설명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생명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사실입니다. 생명은 사람의 소유가 아닙니다. 내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이걸 단순히 공자 왈로 들으면 곤란합니다. 사람들은 생명을, 즉 인생을 자기의 소유로 여깁니다. 자신의 노력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 모든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원하는 정로도, 또는 넘치거나 모자라는 정도로 진행될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걸 생명이라고, 즉 인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생명은 오로지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명을 얻는 길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 설명이 너무 막연하다, 하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거는 좋은데, 그 다음에 우리의 삶에 무슨 일이 구체적으로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라고 요구할 분들도 있겠지요. 설명한다고 해도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소유에서만 삶을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존재라는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에 마음이 꽉 묶여 있으면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말이 공허하게 들립니다. 수능시험에만 영혼을 맡긴 입시생에게는 바람이 흔들리거나 햇살이 반사되는 참나무 잎을 보라는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거와 같습니다. 우리는 먼저 어디에 우리의 영혼을 맡기고 있는지를, 그리고 영혼의 소리를 들을 귀가 준비되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기자의 설명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생명을 풍성하게 얻는다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라고 저는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 생명을 선물로 받을 수 있을 뿐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른 노력이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노력과 업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선물을 받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힘이 들어가면 갈수록 이 생명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삶, 생명, 인생에 대한 선입견을 내려놓고 이 사실에 집중해야 합니다. 쉬운 예로 우리가 세상에 어떻게 왔는지를 생리적인 차원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가 결합되어 배아가 되고, 그것이 자라서 태아가 되고, 때가 되어 어머니의 몸에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과정에 우리 자신의 노력과 의도가 개입되어 있을까요? 이 위대한 생명 사건은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의 삶도 사실은 다 주어진 것입니다. 주어졌다는 것은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더 근원적인 생명을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이런 생명만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해서 더 근원적인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을 근원적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전의 생명은 근원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죽음 이전의 생명이 무의미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죽음 이전의 생명은 죽음을 넘어서는 근원적인 생명과 비밀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음 이전인 지금 여기서의 삶에 종말의 궁극적인 생명이 숨어 있습니다. 마치 화려한 꽃이 씨앗 안에 숨겨 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성하실 화려한 꽃과 같은 생명이 기다려지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이 근원적인 생명을 예수님에게서 경험하고 인식했습니다. 이 생명은 곧 부활입니다. 그것은 그 어떤 방식으로 채워도 다 채워지지 않는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새롭게 행하시는 생명으로 변화된다는 뜻입니다. 질적으로 새로워진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그 부활생명을 요한복음의 다른 말로 바꾸면 영생입니다(요 11:25,26). 그것을 하나님이 선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생명을 풍성하게 받는다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풍성하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부족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생명의 조건들은 늘 부족합니다. 돈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부족합니다. 친구와 가족이 우리를 실제로 풍성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그런 조건에 의해서 좌우되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외로워도, 병들어도 하나님의 생명은 훼손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런 풍성한 생명을 알고 계신가요? 경험하셨나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양의 문입니다. 선한 목자이십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님에게서 일어났습니다. 이 엄청나게 놀랍고 새로운, 그래서 기적 중의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풍성한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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