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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과 재림 사이에서

사도행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062 추천 수 0 2014.06.09 19:2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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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행1:8-14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4.6.2 http://dabia.net/xe/758831 

jys.jpg 정용섭 목사

 

승천과 재림 사이에서

행1:8-14, 부활절 일곱째 주일, 2014년 6월1일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13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예수님의 일대기는 크게 두 대목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대목은 출가 이전의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예수님은 마리아와 요셉의 큰 아들이며, 여러 명 동생들의 형이나 오빠로 살았습니다. 직업은 당연히 아버지 요셉과 마찬가지로 목수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출가 이전, 즉 자연인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해서 복음서 기자들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나 어렸을 때의 몇몇 에피소드를 전하지만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그 시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둘째 대목은 출가 이후 공생애 시기입니다. 복음서 이야기는 대부분 이 시기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이 공적으로 활동한 시기는 예상 외로 짧습니다. 2-3년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는 십자가 처형으로 끝납니다. 그의 나이 서른세 살 때였습니다.

 

일반 역사가들이 예수님의 일대기를 기록했다면 이 대목까지만 다뤘을 겁니다. 서른 살에 출가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가 신성모독과 사회소요라는 죄목으로 서른세 살에 로마 형법에 따라 십자가에 처형당해 죽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서기자들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뒤의 일을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부활 경험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들의 참된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즉 부활의 빛에서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행위와 그의 운명이 바로 메시아의 그것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바로 이런 부활의 빛에서만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부활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부활이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이라는 사실을 알긴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손에 잘 잡히지 않을 겁니다. 신약성경도 그것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실증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 부활은 카메라 기자가 사진을 찍듯이 경험하거나 증명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도 이 말을 타당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사진으로 찍어서 증명할 수는 없는 거와 같습니다. 부활 경험, 또는 부활 신앙으로 들어가기 위한 최선은 그것을 경험한 제자들의 설명을 따라가는 겁니다. 모차르트 음악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그의 곡을 자주 듣고, 가능하면 연주하고, 해설을 들어야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아주 독특한 설명을 듣게 될 것이다. 그것을 전해준 사람은 누가입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인 행 1:6-14절은 부활 이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 있었던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때가 언제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때와 시기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지금은 성령의 권능에 의지해서 당신의 증인으로 사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후에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9,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런 구절만으로는 예수님의 승천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를 알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실제로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름을 마음대로 부리는 손오공처럼, 또는 공중부양의 도술을 부리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이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런 만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훨씬 근원적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본문에 두 가지 나옵니다.

 

하나는 구름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구름을 탄 게 아니라 구름이 오히려 예수님을 가렸다고만 말합니다. 구름이 가렸다는 것은 예수님의 승천이 가림의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옮기셨습니다. 그게 예수님의 올림, 즉 승천 사건의 본질입니다. 하나님 안에 숨김을 당했다는 말은 하나님과 일치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곧 부활입니다. 사도행전 기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승천이라는 말로 바꿔서 설명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장면에 나타난 흰 옷 입은 두 사람입니다. 천사를 가리키겠지요. 이런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경험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에도 나옵니다. 눅 24:1-12절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예수님을 따르던 여자들이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 문이 열려 있었고 예수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들이 걱정하고 있을 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찬란한 옷은 흰 옷과 같은 의미입니다. 부활 현장에 나타난 천사들이 승천 순간에 그대로 나타난 겁니다. 이것은 곧 이 두 사건이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께 올림 받는다는 뜻의 승천은 부활 사건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성경을 꼼꼼하게 읽는 분들은 부활과 승천이 동일한 사건에 대한 다른 표현이라는 설명을 조금 의아하게 생각할 겁니다. 행 1:3절에 따르면 부활의 주님은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내다가 승천하신 걸로 나옵니다. 부활과 승천 사이에 40일이라는 간격이 있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여기서 40이라는 숫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원래 40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출애굽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눅 4:1절에 따르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기도하던 중에 마귀에서 시험받았습니다. 사도행전은 부활과 승천 사이에 40일간의 시간적인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객관적인 사실로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핵심은 부활의 주님이 유령이나 환상이 아니라 제자들과 공생애를 함께 했던 바로 그 예수라는 사실입니다. 

 

  부활은 하나님께로 올림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이 있습니다. 그 내용이 승천 순간에 나타난 흰 옷 입은 두 사람의 입을 통해서 이렇게 선포됩니다. 11절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승천하신 예수님이 다시 세상에 오신다는 겁니다. 소위 재림신앙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 구절을 문자대로 받아들여서 실제로 예수님이 하늘에서 도술을 부리듯이 내려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치 UFO를 타고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1992년 한국 기독교와 사회 전반에 소용돌이를 쳤던 다미선교회는 해당 연도의 10월 아무개 날에 예수님이 자신들의 집회 장소에 재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방송국 티브이 카메라가 그 앞에서 대기하는 씁쓸한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재림신앙은 다미선교회만이 아니라 정통 기독교인들에게 비슷하게 남아 있습니다. 사이비 이단은 정통의 다른 얼굴이지 완전히 다른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그런 시간과 공간의 방식으로 재림하신다면 도대체 어디로 오시게 될까요? 대한민국, 이스라엘, 미국, 중국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그런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로 변화되었기에 재림도 그런 공간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말하는 이들이 있으면 그들은 사이비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서 재림이 언급되었다는 것은 재림도 큰 틀에서 승천과 마찬가지로 부활 사건에 속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를 알려면 재림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먼저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재림 신앙에 따르면 세상 마지막인 종말에 다시 오실 예수님은 세상을 권능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분의 심판은 곧 생명의 종말론적인 완성입니다. 최종적인 완성입니다. 이게 우리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순간을 기다립니다. 주님의 재림을, 그 종말을 기다립니다. 그때가 되면 우리가 기존에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평가됩니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기준들도 달라집니다. 그때가 되면 가난한 자와 우는 자와 외로운 자가 복되다는 말씀을 실질적으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잠정적이고 무상했던 삶이 영원하고 참된 삶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 이런 생명, 이런 세계가 바로 예수님에게 선취의 방식으로 일어난 부활의 성취이며 실현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런 거룩한 꿈을 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우리의 삶은 이런 거룩한 꿈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생명의 완성은커녕 아주 작은 일로 인해서 치사해지는 게 오늘 우리의 삶입니다. 뭔가 완전히 변해서 부활의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은 있으나 현실에서 그게 잘 이뤄지지 않습니다. 제 정신을 차린 사람들에게는 그게 정상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현재 삶이 승천과 재림 사이에 놓여 있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승천은 부활의 주님이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숨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그것을 실질적인 것으로 경험하지 못합니다. 재림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완성과는 너무 거리가 멉니다. 승천과 재림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는 끊임없이 갈등하고, 시행착오를 겪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갈등을 피하려고 세상을 등지는 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이 그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경험한 제자들이 감람원이라는 산에서 내려와 예루살렘으로 들어왔습니다. 마가의 집으로 추정되는 집의 다락방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 모인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 명의 이름이 일일이 거론되었습니다. 그곳에는 그들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도 있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추종하던 여자들입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런 여자들 중에는 부자들도 꽤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들도 거기에 모였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와 동생들입니다. 그들이 모여서 한 일은 기도였습니다. 1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

  
 
이들이 최초 교회의 구성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승천과 재림 공동체의 구성원들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목도한 이들이었고, 재림에 대한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승천과 재림 사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곧 기도입니다.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모든 것입니다.

 

오로지 기도에 힘쓴다는 말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상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고 기도원에 들락거리기만 합니다. 전문적인 기도꾼들입니다. 온갖 종류의 기도모임에 참석합니다. 철야기도를 밥 먹듯이 합니다. 기도 능력이 뛰어난 이들에게 안수와 안찰을 받으려고 쫓아다니기도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표시를 내고 싶어 합니다. 더 심한 경우에는 믿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기도해보니 당신의 신앙생활에 문제가 많은 것 같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시간이 많으면 기도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기독교인의 모든 것인 양 생각하는 겁니다.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는 말은 기도하는 시간이 많았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삶의 방향이 영적이었다는 뜻입니다. 삶의 모든 무게를 영적인 데에 두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인 것은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입니다.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은 오로지 거기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토대이고, 원초적 본질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의 승천과 재림만을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되면 결국 광신도들이 되는 거 아니냐, 하고 염려하는 분은 안 계신가요? 승천과 재림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한 앞의 설명을 다시 기억해보십시오. 그것은 부활을 가리킵니다. 부활은 극치의 생명 현상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완성되는 순간이 바로 재림입니다. 그런 순간을 기다리는 것 말고 우리가 더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없습니다. 죽음을 넘어섬으로써, 또는 죽음을 통과함으로써 주어질 하나님의 생명을 꿈꾸며 사는 것 말고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 생명이 오늘 여기에 은폐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이 모든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났으며, 그를 통해서 완성될 것이라는 사실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 바로 ‘오로지 기도에 힘쓴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런 기도의 삶이 오늘 우리의 신앙 정체성입니다. 여기서만 기독교 신앙의 정체가 확보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 이어지는 행 1:15절 이하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가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의 숫자는 대략 120명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제안에 따라서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제자로 선택했습니다. 이런 일은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별로 급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마가 다락방 공동체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맛디아 선택이었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것이 무엇을 가리킬까요?

 

승천과 재림 사이의 중간 시기에는 교회 제도를 만들고 사람을 뽑는 일이 중요합니다. 이런 일은 은혜롭지 않은 것이라고 해서 버려두면 교회는 공중에 떠버리고 맙니다. 다행스럽게도 교회의 원형이라 할 마가 다락방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이런 일을 솔선해서 감당했기에 지난 2천년 교회의 역사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승천과 재림 사이의 중간 시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오로지 기도 영성에 최선을 다 할 뿐만 아니라 건강한 교회를 꾸리기 위해서 각자 맡은 바의 구체적인 역할을 잘 감당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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