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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6: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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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불완전한 순종
본문: 로마서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한 농부가 기르던 암소가 어느 날 갈색 바탕에 흰점이 있는 쌍둥이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농부는 무척 기뻐하면서 “여보, 우리 저 두 놈을 잘 키워서 때가 되면 내다 팔아 수익금의 한 마리 분은 하나님께 바칩시다.” 하고 충동적으로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두 마리 중 어느 것을 하나님께 바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잠시 주춤거리더니 “그런 것은 지금 생각하지 않아도 되오!”하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 농부가 실의에 빠진 표정을 지으며 부인이 일하고 있는 부엌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나쁜 소식이오.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소.” 하고 말했습니다. 농부는 왜 죽은 송아지를 하나님의 송아지라고 말했을까요? 욕심 때문입니다. 우리의 욕심은 자신을 향해서는 부유하기를,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가난하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지만 이 농부처럼 하나님을 우선하지 아니하고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완전한 순종입니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시119:1)
삼상 15장 1- 35절을 보면 사울은 "아말렉을 철저히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지만 자신의 생각을 따라 철저히 진멸하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좋은 것, 살진 것들까지도 진멸한다는 것은 너무 아깝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제사드리면 하나님도 기뻐하실 것 같아서 남겼습니다. 사무엘이 '그것이 탐심의 결과'라는 것을 일깨워 줄 때 "내가 잘못 하였나이다. 지금이라도 순종하겠나이다."하면 모든 것은 해결됩니다. 그런데 사울은 끝까지 변명하고, 합리화하고, 핑계대고, 자기 체면을 생각하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3)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사실상 대 놓고 불순종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불완전한 순종도 불순종임을 깨달읍시다. 깨닫는 순간 돌이킵시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만약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라는 하나님의 엉뚱한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며 반응하는 대신에 "하나님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하실 리 없어"라고 반응했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만약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나는 여기가 좋은데, 어디로 떠난단 말입니까?"라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만약에 예수님이 다른 데 가지 말고 성령님을 기다리라고 하셨을 때 열두 제자들과 함께 120명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생업 전선에 다시 뛰어드는 반응을 보였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만약에 안디옥 교회가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성령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그들을 계속적으로 자기 교회의 담임 목사로 묶어 두려고 했다면? 만약에 언더우드가 한국에 선교사로 가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주님의 음성을 무시하고 애초 계획했던 인도로 갔다면 한국의 기독교는 어떻게 됐을까요?
만약에 이화여대를 설립한 52세의 스크랜톤 여사가 자기는 남편과도 사별한 데다가 너무 늙어서 젊은 사람들이나 선교하는 것이라고 했다면 한국의 여성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주님 앞에 우리가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안 돼요. 나는 못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실 때, 나에게 일을 맡기시려고 할 때 언제나 해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저는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순종은 한 종류뿐입니다. 그것은 온전한 즉석의 순종입니다. 부분적이거나 지연된 순종은 불순종입니다. 내가 순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브라함이 한 것같이 온전하고 즉석의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맡은 사명과 의무를 부분적으로 하거나 연기하고 뒤에 가서 전력을 기울여 그 일을 하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완전한 순종입니다. 부분적이거나 연기된 의무수행은 즉시 수행한 의무처럼 완전한 축복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없는 순종은 아무리 육신의 순종적 행동을 하였다해도 진정으로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3:22)
열왕기하 9장과 10장에 보면 예후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예후는 님시의 손자이며 여호사밧의 아들로서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아합의 집을 멸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예후는 그때 하나님이 택하신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엘리사는 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를 시켜서 예후의 머리에 기름을 붓게 하였다. 그 생도는 은밀히 예후를 만나기가 무섭게 기름병을 예후의 머리에 붓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을 삼노니”(왕하9:6)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 속에는 다음과 같은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왕권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은 왕들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통치하는 자 만이 정당한 통치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그 통치자를 임명하시며 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후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주관에 의하여 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합의 집에서 왕국을 빼앗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명령을 떠난다면 아합과 같은 운명이 될 것입니다.
선지자 생도는 그 다음으로 예후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수행자로서 그에게 부과된 무서운 임무를 선포했습니다.(왕하9:7-10) 이때부터 예후는 아합의 집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아합의 아들 요람을 죽이고 아합의 사위로 유다 왕이 된 아하시야 왕을 죽였습니다. 이세벨과 아합의 아들 70명을 한꺼번에 죽였습니다. 아합의 친근자와 유다 왕 아하시야의 형제 42명을 죽였습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아합에게 속한 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바알 신봉자를 다 모아서 죽이고 우상을 모두 소탕하고 바알 신당을 변소로 사용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힘있는 군대장관이었습니다. 그는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아합의 집을 지상에서 완전히 쓸어버리는 심판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네가 나 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나리라”고 하시며 축복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후는 이스라엘 중에서 아합의 집과 바알과 그 신당을 멸하였으나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여호와를 위한 열심을 자기 자신의 권한을 강화시키는데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한번 왕위에 좌정하고 더 이상 아합 가문의 피를 쏟을 필요가 없어지게 되자, 그는 종교개혁에 무관심하게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이 금송아지 숭배를 강화시켜 왕국분열을 지속시키는 것이 그가 정권을 계속 장악하는데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예후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송아지 숭배가 악한 것 인줄 알면서도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그대로 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시엘과 아랍인들의 침략으로 요단 동편의 대부분의 땅을 빼앗겼습니다. 예후는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나 자신은 어두웠습니다. 예후는 바알 숭배자를 진멸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금송아지 숭배에서 떠나지 않음으로써 악한 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역대의 왕들처럼 하나님을 떠난 사악한 우상숭배자로 그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돈이거나 권세이거나 명예이거나 자식이거나 심지어 자기 자신이라도 하나님보다 더 우선하고 앞세우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자기에 대한 전폭적인 포기가 없이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합당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마10:38, 마16:24, 막8:35, 갈2:20, 딛2:12)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3)
성경 말씀에서 얻은 단순성의 통찰은 철저한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보다 그 점이 극명하게 드러난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긴급대책을 세우거나 조건이나 구실을 달지도 않았습니다. 긴 고통의 과정을 통해 아브라함의 삶은 한 가지 진리를 배웠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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