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마태복음 빛의 사자............... 조회 수 1119 추천 수 0 2014.06.14 10:16:11
.........
성경본문 : 마20:20-23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생사의 기로에서

마20: 20- 23

 

미국의 한 중환자 병동에 아주 심한 화상을 입고 생사의 기로를 헤매는 십대 초반의 어린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따라 처음 자원봉사를 나온 대학생 한 명이 멋모르고 중환자 병동에 들어와서 (원래 자원 봉사자들은 중환자 병동에는 들어오지 않도록 되어 있었다) 이 소년의 기록을 보고 나이를 확인한 다음, 중학교 2학년 과정에 해당되는 영어 문법의 동사 변화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소년이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이 순진한 대학생 자원봉사자는 며칠 동안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의사들이 회복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다고 판정을 내렸던 이 소년의 상태가 기적같이 나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 주, 두 주가 지나면서 완전히 고비를 넘기고 정상으로 돌아오고 있음에 모두가 놀랐는데, 다들 이 소년의 회복 원인에 대해 궁금해 했습니다. 얼굴의 붕대를 풀던 날 소년에게 그 원인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소년의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사실은 저도 가망이 없다고 스스로 포기하고 있었는데, 한 대학생 형이 와서 다음 학기 영어 시간에 배울 동사 변화를 가르쳐 주기 시작해서 놀랐습니다. 그 형은 '네가 나아서 학교에 돌아가면 이것들을 알아 둬야 공부에 뒤떨어지지 않을 거야'라고 하더군요. 그때 저는 확신했죠. '아, 의사 선생님들이 내가 나을 수 있다고 판단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나에게 다음 학기 동사 변화를 가르쳐 줄 리가 없지.' 그 때부터 마음이 기쁘고 소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생사의 기로에서도 끝까지 믿음과 희망(소망)을 가지는 것은 생명을 찾는 길입니다.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잠14:32)

 

사람들은 때로 자신이 생각해 온 것과는 다른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는 당황하곤 합니다.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고 나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려는 최초의 시도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통고를 받게 되면 비로소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동안 살아온 삶이 평범했고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삶을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중병을 앓게 되면서 진지하게 내가 누구인지 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갈 것인지 알고자 합니다. 분명한 사실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히9:27)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4:14)

 

슈바이처의 저서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산 중에서 맹수에게 쫓기는 토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토인은 그가 어느 부족에 속하였는지를 살폈습니다. 그리고 자기 부족임이 확인되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구출하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지만 만약에 다른 부족으로 인식이 되면 무관심하게 그냥 지나쳐버립니다. 철저한 너와 나의 구별이 부족의 한계에서 너무도 선명해지는 것이 아프리카 토인의 당연한 윤리라고 슈바이처는 지적 합니다. 너 없는 나, 나 없는 너. 이것은 외롭고 무기력합니다. 슈바이처의 아프리카 관찰 중에서 생사의 기로에서 쫓기는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구하는 데까지 부족의 구별부터 한다는 것만으로도 미개한 민족이라는 낙인을 받아 마땅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에게도 아프리카의 미개한 토인과 같은 생각으로 지나왔던 길목은 없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음을 아파하는 인간애의 애끓는 가슴 없이 대수롭지 않게 비극 앞을 지나쳐 버린 무감각한 발길이 우리의 길목에는 남지 않았는가 말입니다. 타인의 아픔보다 오히려 자신의 안일과 출세에 현혹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본문에 보니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예수를 찾아와 절하며 청합니다.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될 때 두 아들을 좌우편에 앉혀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녀의 청이 잘못되었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메시야로 통치하러 나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러 가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좌우편에 앉으려고 하기보다 먼저 주께서 마시려는 잔을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출세하려고 하기보다 희생하려 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본문 23절입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즉 주께서 잔을 보이시며 마시지 않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주의 잔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떠합니까? 자신의 소원을 이루려는 이기적인 자리에 그저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십자가를 지시려는 주님의 아픔에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출세만 구하는 모습은 혹시 아닙니까? 먼저 주께서 마시려는 잔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리에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께서 마시려는 잔은 과연 어떤 잔입니까?

첫째로 고난의 잔 인도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썬다싱이 25살 나던 해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일름 지역에 들어가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도중 붙잡혀 감옥에 들어가서 갖은 고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썬다싱은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주님 때문에 받는 고난을 기뻐하며 밤에는 날이 새도록 찬송을 불렀고, 낮에는 작은 창문을 통해 설교를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재판장이 그를 끌어내어 판자위에다 발과 손목을 묶고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시장바닥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몰려와 돌을 던지며 욕지거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승려들이 수 십마리의 거머리를 썬다싱의 몸에 쏟아 부었습니다. 거머리는 썬다싱의 피를 빨아 살을 파기 시작했고 그의 몸은 보는 이로 하여금 진저리칠 정도로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도 썬다싱은 찬송과 복음을 전하여 군중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예수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난의 잔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2절입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마시려는 잔은 고난의 잔입니다. 고난의 잔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극히 견디기 힘든 고통의 잔입니다. 예수의 고난은 채찍질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채찍(Whip)은 나무 손잡이에 길이가 다른 세 가닥 가죽 줄이 달려 있습니다. 각 줄에 두 개의 납 구슬과 한 개의 뼛조각이 달려 있습니다. 줄 끝에 달린 납 구슬은 피부를 멍들게 하고 뼛조각은 피부 조직을 파고들어 찢습니다. 가죽 끈은 길이가 달라 한 번 채찍질에도 여러 곳에 큰 고통이 가해집니다. 채찍질하는 목적은 죄인의 몸 상태를 죽기 직전까지 몰고 가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40번까지만 하도록 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 군인들은 수의 제한을 두지 않았습니다. 결국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전에 이미 죽을 만큼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피와 물을 다 쏟으셨습니다. 온 몸이 채찍질로 피투성이가 된 고통이 어떠했겠습니까? 이러한 고난의 잔을 앞두신 예수께서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다. 잔을 피하고 싶어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했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고 성경은 전합니다. 고난의 잔을 앞두고 기도하실 때에 땀이 핏방울 같이 되었습니다. 고난의 잔을 앞두고 고뇌를 겪으신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권하시는 잔은 고난의 잔입니다. 쉽게 따라 마실 수 있는 잔이 아닙니다. 마시고 싶지 않은 잔입니다. 죽을 만큼 고뇌하고 피 땀 흘릴 만큼 힘들게 받아야만 하는 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위한 고난의 잔을 마시는 자리로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기억하기 위해 세워진 홀로코스트 기념관에는 야누쉬 코르착이라는 사람의 청동 부조상이 있습니다. 아이들을 끌어안고 있는 그의 모습이 그곳에 남아 있습니다. 야누쉬 코르착의 본명은 헨리크 골드슈미트, 폴란드인으로서 의사이며 유대인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과 학교를 운영했던 교육자입니다.

1942년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어느 날, 자신이 돌보는 고아원에 느닷없이 나치 독일군이 들이닥쳤습니다. 그 방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집단 학살이라는 끔찍한 운명이 아이들 앞에 있었던 것입니다. 야누쉬 코르착은 군인들에게 항의했습니다. 항의가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애걸을 했습니다. ‘제발 이 아이들을 데려가지 마세요. 아이들을 살려주세요.’ 소용없었습니다. 결국 수많은 아이들이 군용트럭에 실려 가게 되었습니다. 보다 못한 코르착은 아이들과 함께 군용트럭에 올라탔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이 아니니 내리라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포에 떨고 있는 아이들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얘들아, 무서워하지 마! 우리는 지금 소풍 가는 거야.’ 예쁜 옷과 가방을 들게 한 후에 아이들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마지막 생사의 기로에서 그는 놀라운 선택을 합니다. 도저히 아이들을 홀로 죽음의 자리로 보낼 수 없었기에 그는 아이들과 ‘함께’ 죽음의 길을 선택합니다. 당신을 빼주겠다는 나치 장교의 말을 그는 끝까지 거절하고, 아이들과 ‘함께’했습니다.

야누쉬 코르착의 삶은 실로 숭고합니다. ‘함께’한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닌가? 죽음의 길을 걷는 아이들과 ‘함께’했던 그의 모습은 예수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도 죽음 아래 놓인 죄인들과 ‘함께’했습니다. 십자가는 죄인들과 ‘함께’ 죽음의 자리로 가신 자리입니다.

그러나 야누쉬 코르착이 흉내 낼 수 없는 것이 그 다음에 나옵니다. 코르착은 ‘함께’ 죽었지만, 그것으로 끝입니다.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함께 죽으신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결국 ‘함께’한 죄인들을 살리셨습니다(엡2:5∼6). 왜일까요? 예수는 죽음 아래 놓인 죄인이 아닌,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한 죄인이 다른 죄인을 위하여 ‘함께’했던 사건이 우리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면, 영원하신 하나님 아들이 미물과 같은 죄인과 ‘함께’하신, ‘임마누엘’의 사건은 얼마나 더 놀랍고 위대합니까?

코르착의 숭고한 사랑도 ‘임마누엘’의 사랑 앞에서는 빛을 잃어버립니다. 야누쉬 코르착의 사랑 앞에서 우리가 감동을 받는다면, 임마누엘의 사랑 앞에서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충격과 전율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오늘따라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잠12:28)

 

예수님은 생사의 기로에서 겟세마네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마26:36- 40)

우리도 생사의 기로에 처했을 때 예수님처럼 죽음의 십자가 앞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히스기야도 죽을병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15년의 수한이 연장되었습니다.(사38:1- 6) 생사의 기로에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6)

둘째로 희생의 잔 존 헤론 선교사는 알렌 선교사와 함께 한국 최초의 병원 제중원에서 의료선교 사역에 힘썼습니다. 당시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헤론은 최선을 다해서 전염병 퇴치에 헌신했습니다. 날씨가 더워지고 위생 관념이 희박한 상황 속에서 이질은 급속도로 퍼져갔습니다. 헤론 선교사는 이질과 싸웠습니다. 그러다 자신도 이질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내한한지 5년 만에 결국 그는 이질 때문에 죽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조국보다도 한국을 사랑했고, 자신의 가족보다도 더욱 한국인을 사랑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묘비에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

자신의 신앙고백을 적어놓았습니다. 믿음으로 선교하다가 주님을 위해 한국인들에게 자신을 주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마시라고 건네시는 잔은 희생의 잔입니다.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주께서 우리를 위해 다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주의 이름으로 남을 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2장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주님은 우리에게 희생의 잔을 마시라 요구하십니다. 희생은 반드시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예수의 희생이 자발적이었고, 스데반도 스스로 희생당하였고, 열 두 제자들 모두 스스로 기꺼이 희생당하였습니다. 그들의 희생을 통해서 세상이 살림 받았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때로 명성이나, 편안한 삶을 포기하기를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희생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고 세상을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희생이 나의 삶 가운데 메아리치고 있습니까? 희생의 보혈이 나의 몸속에 흐르고 있습니까? 주의 희생만큼 아름답고 귀한 것은 없습니다. 부디 주가 마시려 하셨던 그 희생의 잔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세월호 침몰시 생사의 기로 속에서 구명조끼를 벗어주며 자기 목숨보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챙기고 희생한 교사와 승무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수사 A모씨는 짙은 바다 속에서 세월호 구조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구명조끼를 입은 남자 고등학생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아 고인에 대한 예의를 표한 후 시신을 배 밖으로 밀어내려는 순간, 묵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래 쪽으로 늘어져 있는 남학생의 구명조끼 끈을 당기자 구명조끼의 끈과 끈으로 연결된 맨발의 여학생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잠수사는 남학생 시신을 먼저 구조하려 했지만 이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남학생 시신이 물 위로 떠오르지 않은 것입니다. 두 학생의 시신을 수습한 잠수사는 "시신은 떠오르게 마련인데 이 아이들이 떨어지기 싫어서 그런지... 너무 가슴이 아파서 머리가 멍했다."고 당시의 슬픔을 전했습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우정을 보인 것입니다.

무려 46명의 귀한 생명을 앗아간 천안함 사건과 300명 이상의 세월호 사건, 이렇게 예기치 못했던 ‘죽음’이 오랫동안 전 국민의 눈과 귀를 붙들어 놓은 적이 있었던가. 그들의 죽음이 한 달 이상 매일 중계되다시피 했습니다. 아니, 아직도 세월호 사건은 진행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한 번 죽습니다. 그런데 마치 불사(不死)인양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드는 자들에게 이 일련의 사건은 경종 그 자체입니다. 다윗은 늘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나와 사망의 사이는 ‘한 걸음뿐’(삼상 20:3),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시 23:4),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시40:2)에 던져진 존재임을 인식하였습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이와 같이 초상집에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을 아는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오늘을 살면서 ‘오늘밤 내 영혼을 도로 찾는다면’(눅 12:20)이란 질문을 던져봅시다. 전과는 다른 나를 발견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마라. 하루 사이에 무슨 변이 생길지 모른다”(잠27:1)

 

셋째로 용서의 잔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직전 다른 화가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가 용서를 구하기보다 분노하며 헤어졌습니다. 다빈치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리에 앉았지만 여전히 화가 나서 복수를 계획하였습니다. 완전한 계책을 꾸몄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팔았던 배신자 가룟 유다의 얼굴을 그 화가의 얼굴로 그렸습니다. 분노에 사로잡힌 다빈치는 미친 사람처럼 신속하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의 뛰어난 기억력은 원수의 얼굴의 세세한 부분까지 생각해냈고 그것을 유다의 얼굴로 그렸습니다. 잠시 후 다빈치가 예수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는 데 그리스도의 형상에 대한 영감이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좌절감에 사로잡혀 붓을 던졌습니다. 곧이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다른 화가의 얼굴을 유다의 얼굴로 그린 자신의 복수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갈등을 하던 다빈치가 진심으로 회개를 한 후 미워하던 친구의 얼굴을 화폭에서 지우고 나자 다시 영감이 떠올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을 완성시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용서하는 마음을 품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마음에, 삶을 통해 그릴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용서하셨습니까? 용서의 잔을 마실 수 있습니까?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음으로 은혜의 통로가 막히고 기도의 문, 전도의 문이 막힌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로 발견되기 위해서 용서하는 마음으로 가득하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남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누가복음 23장 3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까지 용서하셨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간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용서의 잔을 마시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못 박는 원수들을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용서할 때 상처와 수치가 저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부디 용서의 잔을 마시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용서의 잔을 마실 때 비로소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흑인 노예와 백인이 기차 안에서 싸움을 하였습니다. 성질이 난폭한 흑인 노예에게 백인이 칼을 꺼내 가슴을 찌르려는 순간에 옆에 앉아 있던 백인 목사가 손을 뻗어 칼을 막았습니다. 흑인의 가슴에 칼이 꽂히지 않았지만 백인 목사의 손에 피가 흐르고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자 흑인 노예는 자기 대신 상처를 입고 자신을 살려준 백인 목사의 은혜가 고마워 평생 충성할 것을 다짐하면서 데려가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후 흑인 노예는 백인 목사와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흑인 노예는 거칠고 난폭한 성격을 이기지 못해 좀처럼 옛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툭하면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고집을 부리며 성실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은혜도 잊어버리고 제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럴 때 백인 목사는 조용히 그에게 상처난 손을 보여주었습니다. 흑인 노예는 자신을 위해 다친 칼자국을 볼 때마다 머리를 숙이고 순종했습니다. 그 흑인 노예는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스테반은 순교하기 전에​ 자기를 향해 돌을 던지는 자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행7:60)

 우리도 생사의 기로에 처했을 때 예수님과 스테반을 본받아 이웃의 허물과 잘못을 용서하는 기도를 하여야 하겠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생사의 기로에서 주님이 마시려는 잔은 우리가 마셔야 했던 잔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어야 했던 것은 바로 나였습니다. 나는 주의 은혜로 사는 자임을 고백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 대신 쓴 잔을 마신 주의 은혜를 기억하고 이제 주님이 마시려는 잔을 우리가 마셔야 합니다. 잔을 피하지 않고 마심으로 은혜를 받은 자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부디 고난의 잔을 마시기 바랍니다. 희생의 잔을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의 잔을 마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 이 세상 나그네 길을 끝없는 탐심과 이기심으로 살지 말게 하시고 주님과 그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는 뜨거운 열정을 주시옵소서.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살게 하시고 언제 부르셔도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자신있게 준비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0866 마태복음 작은 척 하는 큰 인물 마18:1-6  이한규 목사  2014-06-14 1298
10865 마태복음 모든 행복과 희망의 뿌리 마28:1-10  이한규 목사  2014-06-14 1345
10864 마가복음 삶에서 가장 중요한 3가지 막15:33-39  이한규 목사  2014-06-14 1623
10863 요한계시 용서하고 기다리시는 주님 계3:19-22  이한규 목사  2014-06-14 1005
10862 요한계시 행복과 불행의 최대 원천 계3:14-18  이한규 목사  2014-06-14 918
10861 요한계시 주님의 사랑 받는 교회 계3:7-13  이한규 목사  2014-06-14 1317
10860 마태복음 믿지 말 것과 믿을 것 마26:31-35  이한규 목사  2014-06-14 1130
10859 요한계시 요한계시록(20) 진실한 소수가 되십시오 계3:1-6  이한규 목사  2014-06-14 931
10858 마태복음 의심하는 자들에게 마28:16-20  강승호 목사  2014-06-14 1028
» 마태복음 생사의 기로에서 마20:20-23  한태완 목사  2014-06-14 1119
10856 디모데후 자기를 깨끗케 하라 딤후2:20-21  강승호 목사  2014-06-14 1094
10855 요한일서 이단이 무엇입니까? 요일4:1  한태완 목사  2014-06-13 1179
10854 에스더 에스더 전체 개괄 에1:1  김경형 목사  2014-06-13 1052
10853 로마서 불완전한 순종 [1] 롬6:16  한태완 목사  2014-06-12 1131
10852 창세기 안식일 창2:1-3  이정원 목사  2014-06-11 907
10851 창세기 사람을 창조하심 창1:26-31  이정원 목사  2014-06-11 895
10850 창세기 물고기와 새와 짐승 창조 창1:20-25  이정원 목사  2014-06-11 948
10849 창세기 해와 달과 별 창조 창1:14-19  이정원 목사  2014-06-11 1002
10848 열왕기하 신앙의 가지치기 왕하5:1-27  최장환 목사  2014-06-11 1533
10847 역대상 충성스러운 자 대상11:1-25  최장환 목사  2014-06-11 1019
10846 야고보서 하나님께 구하라 약1:5-8  강승호 목사  2014-06-10 1315
10845 잠언 항상 친절하고 사랑을 베풀라 잠3:27-28  한태완 목사  2014-06-09 1070
10844 고린도전 성령과 은사 고전12:4-13  정용섭 목사  2014-06-09 1222
10843 사도행전 승천과 재림 사이에서 행1:8-14  정용섭 목사  2014-06-09 1062
10842 요한복음 사랑함이 사랑받음이다. 요14:15-21  정용섭 목사  2014-06-09 1129
10841 베드로전 어둠에서 놀라운 빛으로! 벧전2:2-10  정용섭 목사  2014-06-09 1254
10840 요한일서 예수는 양의 문이다 요10:1-10  정용섭 목사  2014-06-09 1033
10839 마가복음 풍랑을 잠재우신 예수님 막4:35-41  조용기 목사  2014-06-09 1335
10838 시편 나의 삶을 바꾸자면 시1:1-6  조용기 목사  2014-06-09 1220
10837 누가복음 기도하면 이긴다 눅18:1-8  조용기 목사  2014-06-09 1497
10836 시편 환난 당할 때 그와 함께하여 시91:15-16  조용기 목사  2014-06-09 955
10835 전도서 허망이냐, 희망이냐 전1:1-11  조용기 목사  2014-06-09 1110
10834 여호수아 매일 성경을 읽으십시오 수1:8  한태완 목사  2014-06-09 1248
10833 마태복음 영안을 밝게하라 마6:22-23  강종수 목사  2014-06-08 1047
10832 디모데전 돈과 재물을 사랑하지 말라 딤전6:9-10  한태완 목사  2014-06-08 1633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