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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키는 문화적 기능, 전 세계의 어디에 살아도 민족을 이어주는 민족적 기능, 모든 계층간의 원만한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기능을 지니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우리 선조들은 한문을 좀 더 정확하고 편하게 읽기 위해 한자의 음과 새김을 이용하여 우리말의 조사나 어미를 써넣는 구결(口訣)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문을 우리말로 읽기 위한 구결인 석독구결(釋讀口訣)을 고안해 내기도 하였고, 우리말을 전면적으로 표기하는 향찰(鄕札)과 같은 방식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불편함을 일거에 해소한 것이 훈민정음이다. 훈민정음은 읽기와 쓰기를 모두 우리말과 우리 문자로 해결한 문자생활의 완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훈민정음 제자 원리와 그 과학성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는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이다. 즉 발음기관의 모양을 상형하여 만들고 옛날 전서를 본떴다고 하는 것이다. 훈민정음의 자음과 모음의 기본 글자는 상형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기본 글자 이외의 글자는 가획과 합성, 병서, 연서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이 방법이 옛날 전서를 만드는 방법을 따른 것이다. 20여 가지나 되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그 중에서 ‘도(到), 반(反), 상향(相向), 상배(相背), 상배향(相背向)’이나 ‘가(加)’와 ‘미가감(微加減)’의 방법을 훈민정음을 만들 때 이용한 것이다. ‘가’(加)는 매우 폭넓은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이어서 획을 더하는 것과 글자들이 병렬되는 것을 다 포함한다. 상하로는 획을 더하고, 좌우로는 동일한 글자를 첨가시킨다. ‘미가감’은 특히 세로로 가획할 때 적용하였던 방법으로 그 세로획의 길이를 반 이상으로 줄이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훈민정음은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만들고 문자의 변형원칙에 따라 만들었으므로 언어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한 음절을 초성, 중성, 종성으로 구분하였고 초성과 종성은 소리로서는 다른 소리이지만, 음소로서는 한 음소이어서 한 글자로 만들었다. 그래서 한글은 흔하지 않은 과학적인 음소문자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음 글자의 배열순서도 초성과 종성에 두루 쓰이는 문자를 앞에 아음, 설음, 순음, 치음, 후음의 순서로 배열하고 뒤에 초성에만 쓰이는 자모를 동일한 방법으로 배열하였다. 모음 글자는 개구도(開口度)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배열하였다. 나아가 고유어와 한자음과 외국어를 서체까지 달리하여 표기하려는 가장 언어학적 과학성을 지니고 있다.
훈민정음은 선과 점과 원으로 모든 소리를 표기할 수 있어 경제적이다. 모음 글자는 점과 선을, 자음 글자는 선과 원을 서로 결합하여 가장 단순한 형태로 모든 한글을 표현함으로써 가장 간편하여 어떠한 사람이라도 쉽게 배울 수 있는 편의성이 있다. 한글의 선형들이나 자모의 조합이 규칙적일 뿐만 아니라 한 글자에 한 음가를 유지하고 있다. 겹글자가 많지 않고, 자모의 명칭이 몇몇을 제외하고는 매우 단순하며, 가로쓰기와 세로쓰기가 자유로워 구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문자 창제에 성리학이라는 당시의 철학적 사고가 밑바탕이 됐다. 현대적인 의미에서도 훈민정음은 정보화에 유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정보화에 적합한 문자이다.
언어문화적 측면에서 본 한글의 변화
창제 당시의 한글 명칭은 훈민정음(訓民正音)과 정음(正音)이었지만, 주로 언문(諺文)이란 이름으로 사용되어 왔다. ‘언문’은 ‘한글을 낮추어 부르는 명칭’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언문’은 한자에 대립하여 사용한 명칭일 뿐이다. 만주문자, 몽고문자, 일본문자들도 언문이라고 하였다. 한글이 ‘국문’, 즉 국가 문자로 인정받게 된 것은 1895년(고종 32년)이다.
‘한글’이란 명칭은 주시경 선생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글’이란 단어가 처음 출현한 것은 1913년 3월23일에 창립한 배달말글몯음(조선언문회) 창립총회의 전말을 기록한 <한글모 죽보기>에서다. 이 말이 보편화된 것은 1927년 이후인데,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글’의 명칭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 남한은 ‘한글’인데, 북한은 ‘조선글’,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은 ‘고려글’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중국 동포들은 ‘조선글’과 ‘한글’을 동시에 쓰고 있다.
(1) ‘국한혼용’에서 ‘한글 전용’으로
목판본이나 활자본으로 찍어낸 문헌 중에서 최초로 한글 전용을 실행한 문헌은 1755년에 목판본으로 간행한 <천의소감언해(闡義昭鑑諺解)>다. 이것은 언해문의 양식의 변화에 기인한다. 언해문 양식의 변화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부터 한글과 한자와 그 한자의 한자음까지 쓰는 방식이 주류를 이루어 오다가 15세기말부터 한글만 쓰는, 즉 한글 전용으로 바뀌어 16세기에서 17세기 중반까지 그 흐름을 이어갔다. 이후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는 국한 혼용이 주류를 이루어 왔고, 다시 이것이 19세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왔다.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한글 전용이 다시 일어나 그 기운이 역시 19세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루어져 온 것이다. 그러나 국한 혼용과 한글 전용의 두 가지 기운이 일어나게 된 것은 18세기 중반부터이다.
(2)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던 15세기에는 한글은 세로쓰기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19세기말에 와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방향, 즉 가로쓰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최근에 와서 이 가로쓰기가 거의 표준화되었다. 특히 컴퓨터로 글을 쓰는 시대가 되면서 가로쓰기는 대세가 되어 버렸다. 물론 외국인이 우리나라 말에 대해서 쓴 책, 즉 대역사전이나 한국어 문법책에서는 알파벳을 써야 하기 때문에 가로쓰기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 중에 가로쓰기를 최초로 한 책은 1895년에 편찬된 <국한회어(國漢會語)>라는 국어 대역사전이다.
(3) ‘띄어쓰지 않기’에서 ‘띄어쓰기’로
지금까지 알려진 문헌 중에서 처음으로 띄어쓰기를 한 것은 1877년에 존 로스(1841~1915)가 지은(조선어 첫걸음)로 알려져 있다. 본격적으로 띄어쓰기가 이루어진 것은 ‘독립신문’부터이다. 띄어쓰기가 이루어진 이유는 한글전용으로 인한 중의성 해소 때문이었다. 국한혼용문은 띄어쓰기를 하지 않아도 중의성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한글의 과학화
(1) 한글의 모스부호화
한글기계화의 시초는 한글 전신부호이다. 한글 전신부호는 한글 모스 부호인데, 이것이 처음 등장한 것은 <전보장정(電報章程)>에서다. 이것은 1888년(고종 25년)에 우리나라에서 제정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 규정 이름이며 동시에 그것을 써놓은 문헌이다. 이 장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국문 전신부호의 최초인 ‘국문자모 호마타법’이다. 여기에서 규정한 내용은 오늘날의 한글 전신부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오늘날에는 여기에서 규정하지 않은 ‘ㅔ’와 ‘ㅐ’의 두 글자가 추가된 것뿐이다. 한글 모스 부호를 처음 만든 사람은 김학우(1862~1894)였다. 이 부호는 짧은 점과 긴 점의 두 가지 기호를 조합하여 만든 것이어서 2진법의 구성으로 된 것이다. 이 2진법의 한글 전신 부호가 오늘날 한글 코드로 발전됐다.
(2) 한글 타자기
한글을 정확하고 균일하게 쓰기 위한 방안으로 개발된 타자기는 이원익의 한글타자기(1913년), 송기주 한글타자기(1930년), 공병우 타자기(1947년), 김동훈식 타자기(1959년)를 거쳐 왔다. 타자기는 한글 기계화의 길을 열었고, 오늘날 컴퓨터의 한글 표준자판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 한글 문서작성기
우리나라에 컴퓨터가 도입된 것은 1967년이다. 정보화를 이끈 가장 중요한 도구는 문서작성기이다. 국내 처음 등장한 문서작성기는 ‘고려글’로 알려져 있다. 이어 ‘아름글’, ‘팔란티어’, ‘보석글’, ‘아래한글’, ‘훈민정음’ 등의 문서작성기가 출시됐다. 특히 뒤에 나온 3가지 프로그램은 우리나라의 문서작성을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선조들 생활 속의 한글
한글이 쓰인 생활용품들을 관심 있게 들여다보면 언어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주위의 물건들은 생활과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그 생활용품에 문자를 써넣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다. 한글이 쓰인 생활용품도 더 귀하다. 음악, 그림, 관혼상제, 생활, 종교, 놀이 등과 연관된 생활 자료 속에 쓰인 한글을 검토하여 보면 국한혼용과 한글전용, 한글의 궁체·민체 등으로 분야마다 한글을 특징있게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글은 결코 하층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상류층이나 지식인들도 두루 사용했다. 따라서 지금까지 한글을 하류계층의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였다는 억측은 불식돼야 한다. 한글은 명실공히 우리 모두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유일한 매체였다. 이러한 변화는 18세기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19세기 말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한글이 우리나라의 근대화에도 큰 몫을 담당했음은 물론이다.
<홍윤표 | 국립한글박물관 개관위원장>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 우리 선조들은 한문을 좀 더 정확하고 편하게 읽기 위해 한자의 음과 새김을 이용하여 우리말의 조사나 어미를 써넣는 구결(口訣)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문을 우리말로 읽기 위한 구결인 석독구결(釋讀口訣)을 고안해 내기도 하였고, 우리말을 전면적으로 표기하는 향찰(鄕札)과 같은 방식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불편함을 일거에 해소한 것이 훈민정음이다. 훈민정음은 읽기와 쓰기를 모두 우리말과 우리 문자로 해결한 문자생활의 완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홍윤표 국립한글박물관 개관위원장이 지난 7일 오후 서울 양재동 서초구민회관에서 열린 석학인문강좌에서 한글을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정지윤 기자 color@kyunghyang.com |
훈민정음 제자 원리와 그 과학성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는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이다. 즉 발음기관의 모양을 상형하여 만들고 옛날 전서를 본떴다고 하는 것이다. 훈민정음의 자음과 모음의 기본 글자는 상형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기본 글자 이외의 글자는 가획과 합성, 병서, 연서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이 방법이 옛날 전서를 만드는 방법을 따른 것이다. 20여 가지나 되는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그 중에서 ‘도(到), 반(反), 상향(相向), 상배(相背), 상배향(相背向)’이나 ‘가(加)’와 ‘미가감(微加減)’의 방법을 훈민정음을 만들 때 이용한 것이다. ‘가’(加)는 매우 폭넓은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이어서 획을 더하는 것과 글자들이 병렬되는 것을 다 포함한다. 상하로는 획을 더하고, 좌우로는 동일한 글자를 첨가시킨다. ‘미가감’은 특히 세로로 가획할 때 적용하였던 방법으로 그 세로획의 길이를 반 이상으로 줄이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훈민정음은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만들고 문자의 변형원칙에 따라 만들었으므로 언어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한 음절을 초성, 중성, 종성으로 구분하였고 초성과 종성은 소리로서는 다른 소리이지만, 음소로서는 한 음소이어서 한 글자로 만들었다. 그래서 한글은 흔하지 않은 과학적인 음소문자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음 글자의 배열순서도 초성과 종성에 두루 쓰이는 문자를 앞에 아음, 설음, 순음, 치음, 후음의 순서로 배열하고 뒤에 초성에만 쓰이는 자모를 동일한 방법으로 배열하였다. 모음 글자는 개구도(開口度)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배열하였다. 나아가 고유어와 한자음과 외국어를 서체까지 달리하여 표기하려는 가장 언어학적 과학성을 지니고 있다.
훈민정음은 선과 점과 원으로 모든 소리를 표기할 수 있어 경제적이다. 모음 글자는 점과 선을, 자음 글자는 선과 원을 서로 결합하여 가장 단순한 형태로 모든 한글을 표현함으로써 가장 간편하여 어떠한 사람이라도 쉽게 배울 수 있는 편의성이 있다. 한글의 선형들이나 자모의 조합이 규칙적일 뿐만 아니라 한 글자에 한 음가를 유지하고 있다. 겹글자가 많지 않고, 자모의 명칭이 몇몇을 제외하고는 매우 단순하며, 가로쓰기와 세로쓰기가 자유로워 구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문자 창제에 성리학이라는 당시의 철학적 사고가 밑바탕이 됐다. 현대적인 의미에서도 훈민정음은 정보화에 유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정보화에 적합한 문자이다.
언어문화적 측면에서 본 한글의 변화
창제 당시의 한글 명칭은 훈민정음(訓民正音)과 정음(正音)이었지만, 주로 언문(諺文)이란 이름으로 사용되어 왔다. ‘언문’은 ‘한글을 낮추어 부르는 명칭’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언문’은 한자에 대립하여 사용한 명칭일 뿐이다. 만주문자, 몽고문자, 일본문자들도 언문이라고 하였다. 한글이 ‘국문’, 즉 국가 문자로 인정받게 된 것은 1895년(고종 32년)이다.
‘한글’이란 명칭은 주시경 선생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글’이란 단어가 처음 출현한 것은 1913년 3월23일에 창립한 배달말글몯음(조선언문회) 창립총회의 전말을 기록한 <한글모 죽보기>에서다. 이 말이 보편화된 것은 1927년 이후인데,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한글’의 명칭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 남한은 ‘한글’인데, 북한은 ‘조선글’,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은 ‘고려글’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중국 동포들은 ‘조선글’과 ‘한글’을 동시에 쓰고 있다.
(1) ‘국한혼용’에서 ‘한글 전용’으로
목판본이나 활자본으로 찍어낸 문헌 중에서 최초로 한글 전용을 실행한 문헌은 1755년에 목판본으로 간행한 <천의소감언해(闡義昭鑑諺解)>다. 이것은 언해문의 양식의 변화에 기인한다. 언해문 양식의 변화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부터 한글과 한자와 그 한자의 한자음까지 쓰는 방식이 주류를 이루어 오다가 15세기말부터 한글만 쓰는, 즉 한글 전용으로 바뀌어 16세기에서 17세기 중반까지 그 흐름을 이어갔다. 이후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는 국한 혼용이 주류를 이루어 왔고, 다시 이것이 19세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왔다.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한글 전용이 다시 일어나 그 기운이 역시 19세기를 거쳐 오늘날까지 이루어져 온 것이다. 그러나 국한 혼용과 한글 전용의 두 가지 기운이 일어나게 된 것은 18세기 중반부터이다.
(2)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훈민정음이 창제되었던 15세기에는 한글은 세로쓰기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19세기말에 와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방향, 즉 가로쓰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최근에 와서 이 가로쓰기가 거의 표준화되었다. 특히 컴퓨터로 글을 쓰는 시대가 되면서 가로쓰기는 대세가 되어 버렸다. 물론 외국인이 우리나라 말에 대해서 쓴 책, 즉 대역사전이나 한국어 문법책에서는 알파벳을 써야 하기 때문에 가로쓰기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 중에 가로쓰기를 최초로 한 책은 1895년에 편찬된 <국한회어(國漢會語)>라는 국어 대역사전이다.
(3) ‘띄어쓰지 않기’에서 ‘띄어쓰기’로
지금까지 알려진 문헌 중에서 처음으로 띄어쓰기를 한 것은 1877년에 존 로스(1841~1915)가 지은
지난 7일 서울 양재동 서초구민회관에서 열린 석학인문강좌에서 참석자들이 홍윤표 국립한글박물관 개관위원장의 강연을 경청하고 있다. 이날 강연에는 서울 배문고 학생(위쪽 사진) 등 젊은 청중들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 정지윤 기자 |
한글의 과학화
(1) 한글의 모스부호화
한글기계화의 시초는 한글 전신부호이다. 한글 전신부호는 한글 모스 부호인데, 이것이 처음 등장한 것은 <전보장정(電報章程)>에서다. 이것은 1888년(고종 25년)에 우리나라에서 제정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신 규정 이름이며 동시에 그것을 써놓은 문헌이다. 이 장정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국문 전신부호의 최초인 ‘국문자모 호마타법’이다. 여기에서 규정한 내용은 오늘날의 한글 전신부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오늘날에는 여기에서 규정하지 않은 ‘ㅔ’와 ‘ㅐ’의 두 글자가 추가된 것뿐이다. 한글 모스 부호를 처음 만든 사람은 김학우(1862~1894)였다. 이 부호는 짧은 점과 긴 점의 두 가지 기호를 조합하여 만든 것이어서 2진법의 구성으로 된 것이다. 이 2진법의 한글 전신 부호가 오늘날 한글 코드로 발전됐다.
(2) 한글 타자기
한글을 정확하고 균일하게 쓰기 위한 방안으로 개발된 타자기는 이원익의 한글타자기(1913년), 송기주 한글타자기(1930년), 공병우 타자기(1947년), 김동훈식 타자기(1959년)를 거쳐 왔다. 타자기는 한글 기계화의 길을 열었고, 오늘날 컴퓨터의 한글 표준자판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3) 한글 문서작성기
우리나라에 컴퓨터가 도입된 것은 1967년이다. 정보화를 이끈 가장 중요한 도구는 문서작성기이다. 국내 처음 등장한 문서작성기는 ‘고려글’로 알려져 있다. 이어 ‘아름글’, ‘팔란티어’, ‘보석글’, ‘아래한글’, ‘훈민정음’ 등의 문서작성기가 출시됐다. 특히 뒤에 나온 3가지 프로그램은 우리나라의 문서작성을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선조들 생활 속의 한글
한글이 쓰인 생활용품들을 관심 있게 들여다보면 언어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주위의 물건들은 생활과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그 생활용품에 문자를 써넣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다. 한글이 쓰인 생활용품도 더 귀하다. 음악, 그림, 관혼상제, 생활, 종교, 놀이 등과 연관된 생활 자료 속에 쓰인 한글을 검토하여 보면 국한혼용과 한글전용, 한글의 궁체·민체 등으로 분야마다 한글을 특징있게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글은 결코 하층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상류층이나 지식인들도 두루 사용했다. 따라서 지금까지 한글을 하류계층의 사람들이 주로 사용하였다는 억측은 불식돼야 한다. 한글은 명실공히 우리 모두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의사소통의 유일한 매체였다. 이러한 변화는 18세기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19세기 말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한글이 우리나라의 근대화에도 큰 몫을 담당했음은 물론이다.
▲ 홍윤표 국립한글박물관 개관위원장
서울대 국문학과와 석·박사 과정(국어학 전공)을 수료한 후 연세대 교수를 지냈다. 국어학회 회장, 한국어학회 회장, 국어사학회 회장, 한국사전학회 회장, 한국어전산학회 회장, 겨레말큰사전 남측편찬위원장을 역임했다. 동숭학술연구상, 세종학술상, 일석 국어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글이야기 1, 2> <살아있는 우리말의 역사> <17세기 국어사전>(공저), <한국어와 정보화>(공편), <조선후기 한자어휘 검색사전>(공편) 등의 저서가 있다.
서울대 국문학과와 석·박사 과정(국어학 전공)을 수료한 후 연세대 교수를 지냈다. 국어학회 회장, 한국어학회 회장, 국어사학회 회장, 한국사전학회 회장, 한국어전산학회 회장, 겨레말큰사전 남측편찬위원장을 역임했다. 동숭학술연구상, 세종학술상, 일석 국어학상 등을 수상했다. <한글이야기 1, 2> <살아있는 우리말의 역사> <17세기 국어사전>(공저), <한국어와 정보화>(공편), <조선후기 한자어휘 검색사전>(공편) 등의 저서가 있다.
올 한글날 문 여는 국립한글박물관…“한글 독창성·과학적 가치 느껴보세요”
전시실·체험실·배움터 등 갖춰
한글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국립한글박물관이 한글날인 오는 10월9일 개관한다.
한글박물관은 2010년 3월 건립 기본계획을 수립, 지난해 8월 건물을 준공했다. 현재는 정식 개관을 앞두고 내부 인테리어와 전시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한글박물관은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적 가치를 온몸으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를 위해 한글 관련 자료의 체계적 수집과 관리, 연구와 전시·교육, 정보화와 관련한 내용을 준비하고 있다. 지하 1층·지상 3층, 건축 연면적 1만1322㎡ 규모를 자랑하는 박물관은 국가 대표 콘텐츠로서 한글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취지로 건립됐다. 1층에는 한글에 관한 자료를 자유롭게 검색하고 열람할 수 있는 자료실 ‘한글누리’가 마련됐으며 상설전시실(2층), 특별전시실·교육체험실·한글배움터(3층)도 들어섰다.
주 전시공간인 상설전시실에서는 한글의 창제원리, 확산과정을 교육, 예술, 인쇄 등의 분야를 통해 보여준다. 다양한 한글 자료와 영상·체험 프로그램이 한글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게 한다.
개관에 맞춰 특별전시실에서는 ‘세종대왕, 한글문화 시대를 열다’를 주제로 기획전이 마련된다. 세종의 일대기, 세종시대의 문화, 그리고 세종정신 등 세종대왕 관련 자료와 함께 한글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현대미술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이 밖에 ‘교육체험실’에서는 어린이들이 한글 창제원리를 체험할 수 있으며 ‘한글 배움터’는 외국인과 다문화가정 주민들이 한글을 익힐 수 있는 공간이다.
한글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국어의 문자이자 한국 문화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뿌리이다. 따라서 한글박물관은 문자로서의 한글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관점에서 한글을 조망하는 전문박물관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이와 함께 한글의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고, 국내외에 널리 알리며, 한글을 통한 문화의 창조·발전에 중심 역할을 담당할 예정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부지에 들어선 한글박물관은 용산가족공원과 산책로로 연결되어 있어 자연과 문화가 조화된 복합 문화공간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최성희 | 국립한글박물관 과장>
<기획 | 한국연구재단> 전시실·체험실·배움터 등 갖춰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들어선 국립한글박물관. 오는 10월9일 개관한다. | 강윤중 기자 |
한글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국립한글박물관이 한글날인 오는 10월9일 개관한다.
한글박물관은 2010년 3월 건립 기본계획을 수립, 지난해 8월 건물을 준공했다. 현재는 정식 개관을 앞두고 내부 인테리어와 전시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한글박물관은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적 가치를 온몸으로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를 위해 한글 관련 자료의 체계적 수집과 관리, 연구와 전시·교육, 정보화와 관련한 내용을 준비하고 있다. 지하 1층·지상 3층, 건축 연면적 1만1322㎡ 규모를 자랑하는 박물관은 국가 대표 콘텐츠로서 한글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취지로 건립됐다. 1층에는 한글에 관한 자료를 자유롭게 검색하고 열람할 수 있는 자료실 ‘한글누리’가 마련됐으며 상설전시실(2층), 특별전시실·교육체험실·한글배움터(3층)도 들어섰다.
주 전시공간인 상설전시실에서는 한글의 창제원리, 확산과정을 교육, 예술, 인쇄 등의 분야를 통해 보여준다. 다양한 한글 자료와 영상·체험 프로그램이 한글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게 한다.
개관에 맞춰 특별전시실에서는 ‘세종대왕, 한글문화 시대를 열다’를 주제로 기획전이 마련된다. 세종의 일대기, 세종시대의 문화, 그리고 세종정신 등 세종대왕 관련 자료와 함께 한글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현대미술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이 밖에 ‘교육체험실’에서는 어린이들이 한글 창제원리를 체험할 수 있으며 ‘한글 배움터’는 외국인과 다문화가정 주민들이 한글을 익힐 수 있는 공간이다.
한글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국어의 문자이자 한국 문화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뿌리이다. 따라서 한글박물관은 문자로서의 한글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관점에서 한글을 조망하는 전문박물관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이와 함께 한글의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고, 국내외에 널리 알리며, 한글을 통한 문화의 창조·발전에 중심 역할을 담당할 예정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부지에 들어선 한글박물관은 용산가족공원과 산책로로 연결되어 있어 자연과 문화가 조화된 복합 문화공간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최성희 | 국립한글박물관 과장>
<홍윤표 | 국립한글박물관 개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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