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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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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꿈치 사회>(갈라파고스)의 저자인 강수돌 교수는 이 시대 가정의 이미지는 더 이상 ‘보금자리’가 아니라 ‘버스정류장’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른과 아이 모두 일중독에 내몰리는 처지인지라 집이라는 ‘버스정류장’에 간간이 들러 냉장고 문을 열고 먹을 것만 챙겨 먹고 가볍게 떠난다는 것이지요.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사는 그들은 앞만 보고 달려가다 옆 사람을 팔꿈치로 가격해 좌절시키는 것을 일상화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은 밥이다>(RHK)의 저자인 김경집 전 가톨릭대 교수는 ‘팔꿈치 사회’를 화두로 한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서열 매김이 한심하지만 이른바 ‘좋은 대학’에 지원이라도 하려면 내신이 2등급은 되어야 한다. 그런 대학을 졸업해도 이른바 ‘좋은 직장’에 들어갈 확률은 아무리 넉넉히 잡아줘도 20%가 되지 않는다. 100명의 학생 가운데 고작 두세 명만 그런 직장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승자가 된 두세 사람마저도 40대 중반이면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상황에 부닥칩니다. 피 터지는 경쟁의 승리자들이 겨우 20년의 ‘안정적인 삶’을 누리다 가만히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강 교수의 주장대로 내면화된 경쟁이라는 천박한 탐욕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많은 학부모의 그런 욕구가 지난 6·4 지방선거에서 진보 성향의 교육감을 대거 당선시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은 2년 기한의 비정규 일자리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제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소리치는 정치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일자리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일자리인가가 더욱 중요해졌으니까요.
지그문트 바우만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새물결)에서 “인간이 생산한 모든 것이 쓰레기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 자체가 쓰레기화되고 있다”며 “이것이 바로 당신의 미래일지도 모른다!”고 경고했습니다. 이제 인간은 산업폐기물이나 생활쓰레기처럼 1회용으로 이용되고 곧바로 버려지는 처참한 처지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전에도 이런 경고가 없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보수적인 중상류층 출신이면서도 오랫동안 저소득의 빈곤 국가를 전전한 경험이 있는 데이비드 C 코튼이 20세기 말에 집필한 <경제가 성장하면 우리는 정말로 행복해질까>(사이)에서 ‘성장’이라는 담론에 집착해 “기업들이 인간의 삶을 장악하고 지구의 생명 유지 장치와 이 사회의 구조, 수십억 인류의 생명을 파괴해 왔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해놓았다”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코튼은 재미있는 우화를 소개합니다. 아다나 행성의 지도자들은 지표면 높은 허공에 떠 있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도시 ‘스트라토스’에서 예술에만 전념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아래 아다나의 황폐한 지표면에 살고 있는 거주자 ‘트로글리테스’들은 스트라토스의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사치품들을 수입하는 데 필요한 행성 간 교역권을 얻기 위해 폭력이 난무하는 비참한 광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전체 행성은 지표면에 사는 사람들과 그 지역으로부터 용케도 자신들을 분리시키고 그들의 노동에 의지해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사치품들을 공급받는 지도자들에 의해 식민화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강 교수의 주장대로 내면화된 경쟁이라는 천박한 탐욕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많은 학부모의 그런 욕구가 지난 6·4 지방선거에서 진보 성향의 교육감을 대거 당선시킨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 젊은이들은 2년 기한의 비정규 일자리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이제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소리치는 정치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일자리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일자리인가가 더욱 중요해졌으니까요.
지그문트 바우만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새물결)에서 “인간이 생산한 모든 것이 쓰레기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 자체가 쓰레기화되고 있다”며 “이것이 바로 당신의 미래일지도 모른다!”고 경고했습니다. 이제 인간은 산업폐기물이나 생활쓰레기처럼 1회용으로 이용되고 곧바로 버려지는 처참한 처지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전에도 이런 경고가 없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보수적인 중상류층 출신이면서도 오랫동안 저소득의 빈곤 국가를 전전한 경험이 있는 데이비드 C 코튼이 20세기 말에 집필한 <경제가 성장하면 우리는 정말로 행복해질까>(사이)에서 ‘성장’이라는 담론에 집착해 “기업들이 인간의 삶을 장악하고 지구의 생명 유지 장치와 이 사회의 구조, 수십억 인류의 생명을 파괴해 왔다는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해놓았다”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코튼은 재미있는 우화를 소개합니다. 아다나 행성의 지도자들은 지표면 높은 허공에 떠 있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도시 ‘스트라토스’에서 예술에만 전념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아래 아다나의 황폐한 지표면에 살고 있는 거주자 ‘트로글리테스’들은 스트라토스의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사치품들을 수입하는 데 필요한 행성 간 교역권을 얻기 위해 폭력이 난무하는 비참한 광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전체 행성은 지표면에 사는 사람들과 그 지역으로부터 용케도 자신들을 분리시키고 그들의 노동에 의지해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사치품들을 공급받는 지도자들에 의해 식민화되었습니다.
코튼은 우화가 실제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돈이 정말로 많고 권력이 대단한 자들은 높다란 고층 빌딩의 멋지게 치장한 중역실에서 일하고, 리무진과 헬리콥터를 타고 회의 장소로 이동하고, 구름 위로 높이 오르는 제트기를 타고 대륙을 오가고, 상냥한 승무원들이 가져다주는 최고급 와인을 마음껏 마시고, 환경이 잘 보호되어 녹지가 푸른 교외의 대저택에 살거나 혹은 예술과 미의 중심지에 자체 보안 시스템이 완벽하게 갖춰진 스트라토스의 지도자들이 트로글리테스들의 삶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이 지구의 자원을 고갈시키면서 현실에서 동떨어져 ‘환상의 세계’에 살고 있기에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달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지구는 1%의 ‘스트라토스’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99%다”라는 슬로건의 출현은 미국의 불평등 문제에 대한 논쟁에서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말하는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의 대가>(열린책들)에서 50년 후 미국의 미래상에 대해 “부유층은 폐쇄된 지역 사회를 이루고 살면서 자녀들을 교육비가 많이 드는 학교에 보내고 일류 의료 서비스를 이용하는 반면에, 나머지 계층은 좋지 않은 교육과 제한된 배급제나 다름없는 의료 혜택을 받으며 그저 중병에 걸리지 않기만을 바라는 불안정한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이미 현실입니다. 이제 팔꿈치로 옆 친구를 가격하는 일을 버리고 책을 함께 읽으면서 친구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한 현장 교사는 “평등한 독자로서 상대방을 통해 ‘나’를 보기도 하고, ‘나와 다름’도 만나면서 상대방이 가진 지식과 공감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분명히 ‘그’가 되고 ‘나’는 분명히 ‘나’가 되어 소통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자존감을 회복해야 할 이들이 독서모임을 소망하는 이유”라며 “서로 존중하는 공동체, 이상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공동체”를 만들자고 역설했습니다. 공독(共讀)의 역사가 바로 학문의 역사가 아닌가요? 그런 세상을 빨리 만들어야 합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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