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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생애와 교훈

창세기 빛의 사자............... 조회 수 1728 추천 수 0 2014.06.17 19: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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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5:28- 29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노아의 생애와 교훈

창세기 5:28-29

먼저 노아의 생애를 간단하게 소개합니다.

노아라는 이름의 뜻은 ‘위로’ ‘위안’ 또는 ‘휴식’ ‘안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의 9대 손으로(눅3:36) 셋의 자손인 라멕이 182세에 낳았습니다.(창5:28-29)

셈, 함, 야벳의 아비(부친)이며 노아는 당세의 완전한 사람이며 의인이었고‘ 하나님과 동행한 자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었습니다.(창6:8-10)

하나님께서 죄가 관영한 세상을 심판하실 때 노아를 선지자로 삼아 1백20년 동안 회개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주었습니다. 노아는 600세 되던 해 둘째 달에 방주에 들어갔고, 그 이후 40주야 계속 비가 내렸습니다.(창7:1-24, 창8:1-17)

601 세 되던 해 정월1일, 지면에서 물이 걷히고, 7주 후인 2월27일에는 그들이 마른 땅에 내려섰습니다. 하나님은 다시는 인간을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는 증표로 노아에게 무지개 언약을 주셨습니다.(창9:8-17)

홍수이후 노아는 포도를 재배하는 농부로 살던 중 순간의 방심으로 술을 마시고 취함으로써 자녀들에게 추태를 보인 약한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노아는 홍수 후 350년을 살고, 950 세를 향년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창9:28-29)

다음으로 노아의 시대는 어떠했으며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떠한 가? 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의 생각과 계획은 어떠했습니까?(창6:5) 그리고 환경은 어떠했습니까? 항상 악하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심리적 죄악의 상태 곧 음란한 생각과 악한 계획들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7절을 보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바로 그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다가 마침내 홍수에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육신의 일만 도모함)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 37- 39)

노아 시대는 심히 부패한 시대였습니다. 창6:2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했음을 봅니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천사를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천사들은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셋의 후손들을 의미합니다. 아벨의 거룩한 계대(繼代)를 이어줘야 할 셋의 후손들도 가인의 무리와 연합하여 어떻게 부패해진 것을 위의 성경은 보여줍니다. 이렇게 가인의 후손도 셋의 후손도 다 같이 타락하게 됐습니다.

창세기6장 5, 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하셨는데 이처럼 노아 시대는 죄악이 관영한 시대요, 사람의 마음이 악하여 하나님을 탄식케 하여 근심케 한 시대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악함과 세상의 죄악은 하나님을 그처럼 슬프게 했고 탄식케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만물과 사람을 처음 창조하신 때는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좋아하셨다는 말씀에 창세기 1장에서 7번이나 나옵니다.(1:4, 10, 18, 21, 25, 31) 그러나 이제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시던 것을 보시고 슬퍼하셨습니다. 죄악이란 이처럼 흉악한 것입니다. 노아 시대는 그러한 죄악이 세상에 차고 넘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암흑한 때이기에 노아는 하늘의 별같이 더욱 빛나게 되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다 하나님을 탄식케 하는 그러한 시대에 오직 노아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시대를 슬퍼하시며 탄식하심이 사실이었으나 의인 노아,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그는 지극히 기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새롭게 할 수 있으셨습니다. 억만 인이 죄악을 범한다 할지라도 오직 죄악을 이기며 의를 행하는 한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존귀함을 우리는 노아에게서 배워야 합니다.(참고: 렘5:1)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는 어떠합니까?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눅12:56)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자기중심적(이기주의)이고, 참으로 음란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세대이며 돈을 무엇보다 귀중히 여기고 자랑하고 교만하며 부모를 거역하고 감사가 사라진 세대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딤후3:1-7)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13:11-12)

이번에는 노아를 통해서 우리가 깨닫고 배울 교훈이 무엇인가를 하나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1. 노아는 의인이며,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를 가리켜서 의인이라고 한 것은 행위적인 의로움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로움을 말합니다. 당시 죄악이 관영하던 세상 속에서 노아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경건하게 살기를 원하였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비웃든지 간에 그것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믿음 안에 의인된 우리들도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움이 있도록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하는 말은 항상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면 영적 죽음이 됩니다. 노아는 항상 하나님과의 교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경건하고 기쁨이 가득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창6:9)

2. 노아는 믿음의 사람이요 신앙의 시범자입니다. 일시적으로 믿는 믿음의 고백은 누구나 가능합니다. 그러나 노아와 같이 온 세상이 타락할 때 자기 가족만 믿었다는 것은 놀라운 믿음입니다. 주변 사람이나 당시의 상황이나 여건이 노아의 신앙을 흔들 수 없는 하나님과의 친교의 신앙이었습니다. (벧후2:5)

노아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입니까? 노아가 어떻게 그처럼 의인이 되었고 당세에 완전한 자가 되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었겠는가. 그 비결은 오직 하나, 히브리 기자는 그것을 가리켜 '노아의 믿음'이라 했습니다. 믿음의 힘은 위대합니다. 믿음은 죄인을 의인으로 보게도 하고 허물 많은 자를 불러 완전한 자가 되게도 하며 하나님과 멀리 떠난 자를 불러 동행하는 자가 되게도 합니다. 믿음의 최후 완성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인데 노아의 증조부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께서 불러 승천케 하셨고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그 가족과 더불어 방주(方舟)에 들어가 생명을 구원했습니다. 그러면 노아의 믿음은 어떠한 믿음이었겠는가.

"노아는 믿음으로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히11:7)

이제 이 말씀에서 노아의 믿음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

노아의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습니다. "그가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警告)하심을 받아..." 이렇게 히브리의 기자는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경고]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경고하심을 [받아]라는 말은 그 말씀을 듣고 믿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 당시의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들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는 참 믿음도 없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 믿음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10:17)고 사도 바울은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가. 그렇다면 감사합시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신약의 사도 베드로는 큰 은혜를 입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눅5:4,5절에 보면,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했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특별한 믿음의 소유자였다는 것은 곧 말씀에 의지하여 움직인 사람이었음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같습니다.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5) 이 말씀은 흉용(洶湧)한 바다에서 바야흐로 파선지경에 이르렀을 때 두려워 떨고 있는 선원들에게 외친 그의 말입니다. 사도바울께서는 "너를 버리지 않고 환난 중에 건지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믿고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그는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믿음, 그것이 참 믿음이요 큰 믿음인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꼭 그대로 믿고 그대로 움직였습니다. 참으로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 질문: 노아의 믿음이 “의(義)로 여겨졌다면 우리의 믿음은 무엇에 기초한 믿음이 되어야 합니까?(롬10:17, 히11:7)

답) 말씀에 기초한 믿음

(2) 보이지 않는 것을 꼭 보는 것 같이 믿는 믿음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5:7)

히브리 기자는 노아를 가리켜 그가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방주를 예비했다고 했습니다. 노아는 보지 못한 일을 꼭 보는 것인양 믿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 중의 하나입니다. 고후5: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라"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을 때 세상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어리석은 자라고 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홍수의 징조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홍수가 나기까지 즉 창세기 6장에 이르기까지는 비(雨)라는 말도 또한 홍수란 말도 없었습니다. 매일 매일 해가 뜨고 해가 지는 평화로운 날들이 매일 계속됐을 것입니다. 홍수에 대한 위험을 느낄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홍수의 경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홍수의 경고를 꼭 그대로 믿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그것을,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한 그것을, 꼭 그대로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다 보이는 현실, 매일 경험하는 세상일은 믿어도 보이지 않는 내세(來世)의 일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사람은 믿어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못 믿습니다. 보이는 육신은 믿어도 보이지 않는 영혼은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참 믿음이란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임을 믿는 믿음입니다.(고후4:18) 노아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꼭 보는 것 같이 믿을 뿐 아니라 오히려 보이지 않는 그것을 위해서 보이는 것을 희생한 사람이었습니다.

(3) 노아의 믿음은 실행이 따른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했다"고 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매일 매일 방주를 짓는 순종으로 나타났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는데 참 택함을 받은 성도들의 믿음은 반드시 그 행위로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거기에 여러 신앙위인들의 믿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거기에 아벨은 믿음의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믿음은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나타났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행동으로 그 믿음이 표현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기생 라합의 믿음은 위험을 무릅쓰고 정탐꾼들을 숨겨주는 행동으로 나타났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처럼 노아의 믿음은 방주를 예비하는 일로 그 믿음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이제 고요히 머리 숙여 우리의 믿음이 지금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4) 인내와 희생(犧牲)이 있는 믿음

노아가 방주를 짓는 동안 그의 인내와 희생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해 봅시다. 그는 믿음으로 인내(히6:12, 약1:3, 계14:12)하였고, 물질의 희생, 시간의 희생, 노력의 희생만이 아니라 많은 수욕도 참았습니다. 이 얼마나 큰 희생이었겠는가. 참 믿음이란 언제나 희생이 따름을 볼 수 있습니다. 아벨에게는 순교의 피가 따랐고, 아브라함에게는 모든 친척과 본토(本土)와 재산을 버리는 희생이 따랐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역시 우리도 고요히 묵상해 보아야 할 일일 것입니다. 내 믿음은 얼마나 오래참고, 무엇을 희생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지요?

(5) 자기의 가정을 구원한 믿음

"그는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라고 히브리 기자는 말했습니다. 흔히 우리가 아는 것은 믿음이란 개별적이란 점입니다. 믿는 그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 부모가 믿는다고 자식도 따라서 구원 얻는 것은 아닙니다. 자식들도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에서 깊이 배워야 하는 진리의 하나는 곧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는 약속입니다. 옛날 아브라함이 잘 믿으니 그 후손들이 가나안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기생 라합이 잘 믿으니 그 가정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가버나움의 가나안 여자의 간절한 믿음은 그 딸의 병을 고쳤고 백부장의 믿음은 그 종을 고쳤습니다. 노아의 믿음은 그 가족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부모들에게 큰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부모가 잘 믿으면 불신앙의 자녀들도 돌아옵니다. 어머니의 기도 못잊어 돌아오는 탕자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우리의 가정을 구원하는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언제까지나 나 홀로 믿는 짝 믿음은 크게 반성해야 될 것입니다.(고전7:14)

(6)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한 믿음

히브리 11:7에 보면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했습니다. 여기서 "이로 말미암아" 하는 말은 그가 방주를 예비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는 방주를 예비함으로 세상을 정죄했습니다. 그가 방주를 지을 때 그것을 짓는 이유를 사람들에게 말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누구든지 이 방주에 들어오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으리라. 누구든지 다 들어올 수 있도록 이처럼 큰 방주를 짓노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는 죽으리라"고도 했을 것입니다. 말로만 아니라 실제 방주를 짓는 생활로써 증거했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믿음인가. 이로써 그는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3. 노아는 순종의 시범자였습니다.

1백20년을 하루같이 순종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습니다. 청명한 하늘을 보면서 방주를 준비하고 식량을 비축하는 일은 분명 주위의 비웃음과 조롱으로 인해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를 인내와 믿음으로 수행한 순종의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순종할 수 있겠는가 자신을 돌아보고 노아의 순종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7:5)

4. 노아가 술에 취해 수치를 드러낸 사건은 제아무리 훌륭한 인격자라도 자칫 방심하면 실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노아의 실수는 무엇입니까?

여름이 되면 더워서 힘들고 지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방학이 있고 휴가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에도 방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 동안 열심히 했으니까 이제 좀 쉬어도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방학을 선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8월까지는 가정교회도 좀 쉬고, 큐티와 새벽기도와 심야기도회도 쉬겠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영적으로 침체되고 넘어지게 됩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우리 안에는 여전히 죄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방학도 없고 휴가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신앙생활 열심히 했다고 해서 방심하면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즉시 틈을 타서 공격해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던 믿음의 사람 노아, 홍수심판을 이겨낸 노아가 방심하여 넘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긴장을 풀어서는 안됩니다. 여름은 신앙의 방학이나 휴가를 가지는 계절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열정적으로 기도하고 말씀과 성령 안에서 힘을 다해 봉사해야 하는 계절입니다. 여름을 시험에 빠지는 계절로 삼지 마시고 영적으로 더욱 무장하고 성장하고 충성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1) 방심한 노아

홍수 심판이 끝나고 처음 방주에서 나왔을 때 노아는 세상이 완전히 황폐된 것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파괴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또 홍수가 터져서 세상이 다시 멸망을 당하지 않을까 두렵고 불안해서 살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노아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세상을 물로 멸하시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증거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맹수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여 공격하지 못하게 하셨으며, 사람에게 육식을 허용해주셨습니다. 또 사람을 죽이는 동물이나 사람은 반드시 죽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노아와 그 가족들, 그리고 홍수심판에서 살아남은 동물들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 동안 노아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삶은 안정되었습니다. 비가 와도 하늘에 무지개가 나타나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농사도 잘되고 아들들도 자녀들을 낳으며 문제없이 잘 살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안정되고 평안해지자 노아는 점점 긴장이 풀리고 방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2) 노아의 실수

노아는 농업을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포도주를 만들었는데, 어느 날 노아는 포도주를 너무 마셔서 심하게 취하게 되었습니다. 술에 취한 노아는 옷을 다 벗어버렸습니다. 술에 취하면 이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이 많아지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대로 골아 떨어집니다. 술에 취하기만 하면 행패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술에 취하면 노아처럼 옷을 벗는 사람들도 있습니까? 노아의 경우는 술에 취해서 나타난 단순한 술버릇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노아가 왜 옷을 다 벗어버렸을까요?

술에 취한 노아는 추하고 죄악된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물론 노아가 처음부터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포도주를 한 번 맛보기만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방심한 노아는 포도주를 맛보는 순간 절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술에 취해 부끄럽고 죄악된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요, 심판을 이긴 자요, 두 번째 인류의 시조였던 경건한 의인 노아는 이렇게 해서 초라하고 수치스러운 죄인의 자리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수치스런 모습을 보고 조롱하며 정죄했으며, 하나님의 종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노아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방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방심하면 넘어지게 됩니다. 그래도 이번 여름에 신앙생활의 방학을 가져야겠다고 고집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방심하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한순간이라도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도 노아처럼 실패하게 됩니다. 신앙의 긴장을 풀지 말고 항상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함의 행동

노아가 술에 취해서 벌거벗고 있는 부끄러운 모습을 가장 먼저 본 사람은 둘째 아들 함이었습니다.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 두 형제에게 고하니"(22절) 함이 아비의 하체를 보았다는 것은 그냥 우연히 보게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떤 생각이나 의도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상상하면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5:28). 여기서 본다는 것은 어떤 성적인 연상을 하면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은 이런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장려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짧은 치마를 입고, 속이 비치거나 드러나는 옷을 입고 다닙니다. 성적인 매력을 강조하고 과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섹시하다고 하면서 선망하고 추구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줍니까? 현대인들은 여자나 남자를 보고 속으로 음욕을 품고 즐기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거나 나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것들을 정죄하셨습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함이 벌거벗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그는 우연히 아버지가 벌거벗은 것을 보고 민망해서 얼른 아버지를 이불이나 옷으로 덮어드리고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벌거벗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정욕적이고 부끄러운 것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와서 형제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면서 아버지를 정죄하고 비난했습니다. 함은 자신의 내면에서 부끄러운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숨기고 오히려 아버지를 비난하고 정죄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항상 거룩하고 경건한 생각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때로 부끄러운 생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당신은 그럴 때 어떻게 하십니까?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놓고 회개하면서 거룩하고 정결한 마음을 주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속으로 이런 죄악된 것들을 즐기면서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얼마나 가증한 모습입니까? 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4) 셈과 야벳의 행동

함으로부터 아버지가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있다는 말은 들은 셈과 야벳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아버지가 실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여전히 존경하고 아버지의 실수를 덮어드리고자 했습니다.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창9:23) 이들은 이러한 아버지의 모습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으려고 일부러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버지의 추한 모습은 잊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여전히 경건하고 의로운 분으로, 하나님의 종이요 선지자로 기억하기 원했습니다. 셈과 야벳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들은 아버지의 실수로 인하여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함의 태도와는 얼마나 다릅니까?

함은 아버지의 실수를 보고 마음속으로 범죄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부끄럽고 악한 생각 품은 것을 회개하지 않고 그것을 감추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아버지를 정죄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수치스러운 실수를 핑계로 하나님을 떠나버렸습니다. 우리는 함의 후손인 가나안 족속들을 통하여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며 극도로 타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17:9)

(5) 믿음 지키지 못한 사람들의 핑계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받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중단한 사람들을 간혹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교회를 떠난 이유는 대개 비슷합니다. 목사에게 실망을 했다든지, 장로나 집사 때문에 시험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교회 나가지 않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안타깝고 그렇게 만든 그리스도인들이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교회나 다른 사람들에게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만일 형제 중에 하나가 자기에게 상처를 입혔다고 합시다. 그런 경우에는 그 형제를 낳은 부모님과 관계를 끊어야 할까요? 우리는 교회나 다른 성도들의 실수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이 얼마나 모순된 핑계에 불과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사실 교회가 온전치 못하다거나 믿는 사람들이 잘못한 것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이유가 될 수가 있습니까?

진짜 이유는 거기에 있지 않고 그 사람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떠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핑계거리를 찾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실수를 비난하면서 그것을 핑계로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 이 문제를 정확히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핑계는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통할 수 없습니다.

오늘 형제의 실수를 볼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 정도의 죄와 잘못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그것이 밖으로 나타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형제가 실수를 했을 때 자기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닌 것처럼 그를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은 정말 악하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악하고 추한 생각을 내놓고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형제의 실수를 덮어주어야 합니다. 형제가 실수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여전히 사랑하기로 다짐해야 합니다. 가장이나 목사가 실수했다 하더라도 그를 위해서 더욱 기도하며 여전히 사랑하고 존경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성도는 남의 실수 때문에 시험에 들거나 범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형제가 실수했을 때 먼저 자신을 살피고 내 안에 있는 악한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형제의 실수를 덮어주며 여전히 형제를 사랑하는 성숙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5. 하나님의 예언과 언약 그리고 노아의 예언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예언하신 홍수는 120년 뒤에 실현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에게 무조건 죄에 대한 보응을 실행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도록 모든 여건과 기회를 주십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55: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엡 5:16)

* 질문: 노아에게 보여 주었던 무지개의 뜻은 무엇이며(창9:13), 노아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무지개는 언약의 증거이며 노아와 맺은 계약은

1)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창8:21)

2) 사계절이 계속될 것임(창8:22)

3) 채소와 동물을 식물로 주심(창9:3)- 식물을 먿을 때의 인간의 수명과 동물을 먿을 때의 인간의 수명이 어떻게 달라졌는가?

4)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을 것임(창9:11)- 물로 심판하지 않는 대신 불로 심판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지금 이 땅에는 얼마나 무서운 불이 준비되고 있는 지 알아보자.

본문은 이런 일이 있은 후 노아가 자녀들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노아가 술이 깨어 그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가로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9:24-27)

이 말씀은 마치 노아가 술에서 깨어난 후 둘째 아들 함이 한 행동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저주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괜히 자기가 실수해놓고 자식을 저주하는 아주 나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부당한 저주가 이루어지게 하실까요? 이 말씀은 노아가 술에 취해 실수한 것과는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다. 노아는 지금 선지자요 설교자로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에 그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오해를 하기 좋게 된 것입니다. 노아는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했습니다. 이것은 괘씸한 아들에게 복수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언이요 설교요 경고였습니다. 함의 아들 가나안은 성에 대해서 지나치게 호기심이 많고 문란한 성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함의 경우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나안을 보고 노아는 경고를 했던 것입니다. "네가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살면 너는 망하게 될 것이다."

가나안이 노아의 설교를 잘 받아들였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은 할아버지의 예언을 무시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나 맘껏 죄를 지으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노아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던 당시에 가나안 족속들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으며, 특히 성적으로 매우 문란하고 타락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노아는 셈과 야벳을 축복했습니다. "또 가로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창9:26-27) 노아는 셈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축복과 계획을 깨닫게 되자 먼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셈의 계통을 통하여 택한 족속을 보존하시고 메시아를 보내셨습니다. 셈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고 있습니다. "셈의 하나님!" 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축복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은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에 사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일컬음 받으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기뻐하시겠습니까? 막내 아들 야벳은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살게 될 것이며, 셈의 장막에 와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영적인 방심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배웠습니다. 아무리 덥고 휴가철이 온다해도 신앙생활의 방학을 계획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방심하게 되면 반드시 넘어지게 됩니다. 항상 깨어 기도하며 말씀에 굳게 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혹시 다른 사람이 넘어진 것을 보거든 자신을 돌아보고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형제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시기를 기뻐하실 만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6. 노아의 방주 사건

방주는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해 냈다. 방주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형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 노아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하시고 방주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을 지시해주셨습니다. 방주는 잣나무로 만들어 방수처리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방주 안에 칸막이를 했는데, 이것은 방주가 바람과 물결에 흔들릴 때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과 짐승들이 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 3층으로 만들어 문을 하나 내고, 위에서 일 규빗 되는 지점에 창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창은 밖을 내다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환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규모는 길이가 약 135m, 넓이가 약 22.5m, 높이가 약 13.5m쯤 되었습니다. 길이는 축구장의 약 1.4배, 넓이는 약 1/3 정도이며, 면적은 축구장의 절반 정도가 됩니다. 3층이니까 축구장의 1.5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층으로 된 이 방주에는 지구상의 모든 동물들이 한 쌍씩 들어앉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공간이 있었습니다. 1993년에 창조과학회에서 해군사관학교 기술연구소에 의뢰하여 실험해본 결과 노아 방주는 현대조선기술로 만들어진 어떤 선박보다 안전한 구조였다고 합니다. 노아 방주는 이렇게 거대하고 견고한 배였습니다.

그러나 노아 방주는 항해를 위한 배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노아 방주에는 동력이나 항해를 위한 장치가 전혀 없었습니다. 창이 3층 위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밖을 내다 볼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 방주를 운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엔진도 필요 없고 키도 필요 없으며, 밖을 내다볼 창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기 때문에 노아와 그 가족들은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면 되었습니다. 아기 모세를 태운 갈대상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갈대상자에 담겨 나일강에 버려진 모세의 운명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공주가 모세를 발견하여 자기의 아들로 삼아 왕실에서 기르게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책임을 져주십니다. 우리는 성난 파도와도 같은 세상에서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불안해하며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가 탄 배를 운전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살면 됩니다.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치 방주 안에 있는 노아와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우리를 가장 안전하고 선하게 인도하신 후 이 세상에서의 항해가 끝나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

질문1. 누가 방주의 문을 닫아 주었습니까? (창 7:16)

들어간 것은 모든 것의 암수라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

질문2. 노아는 어떤 자세로 방주를 지었습니까?

노아는 말로만 아니라 실제 방주를 짓는 생활로서 믿음을 증거하므로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다.

질문3: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창8: 20- 22)

여호와께 정결한 짐승과 새를 취하여 번제를 드렸습니다. (즉 예배를 먼저 드린 것이다.)

오늘날 구원의 방주는 누구일까요?(엡1: 13- 14)

노아의 방주 사건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모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로 다시 오실 것을 대비해 지상 명령인 복음 전파에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7. 하나님은 전 인류를 홍수로 징계하실 때에도 당신의 구속사 자체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노아와 그 가족을 남겨두어 인간 구원의 역사를 지속시키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남은 자 사상의 원형을 발견합니다.(스9:8)

* 질문: 홍수 심판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은 몇 명입니까? (창 7:13; 벧전 3:20, 벧후2:5)

노아와 그의 아들 셈, 함, 야벳과 노아의 처와 세 자부 도합 8명입니다.

* 노아의 가정은 성공적인 가정의 모델입니다.(현대의 가정 위기에 본받아야 할 가정)

1) 노아의 가정은 하나님 말씀위에 세워진 가정

2) 노아의 가정은 부모가 모범을 보여주는 가정

3) 노아의 가정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진 가정

4) 노아의 가정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가정

8.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믿음의 후사였습니다.

노아가 만약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았다면 우리 인류는 어찌되었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노아의 믿음은 지, 정, 의의 완전한 믿음이었습니다. 노아가 얻은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의 구원의 예표였습니다. 내게 노아의 믿음의 피가 흐르고 있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나는 과연 올바르고 흠이 없는 크리스천입니까? 나의 가족은 내가 노아라고 하면 협조할까? 나 자신을 돌아봅시다.

노아가 험난한 세대에서 견딜 수 있었던 힘은 무엇입니까?(창6:8) 노아는 어떻게 그처럼 의로운 자가 될 수 있었을까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핍박을 견딜 수 있는 힘은 무엇입니까?

그 대답은 오직 창세기6장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그가 그처럼 의롭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큰 믿음을 지킨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그가 구원을 얻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홀로 의롭게 산다는 것은 큰 고통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불의의 물결이 홍수같이 밀려드는 그런 때에 홀로 그것을 거스려 경건히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그것을 감당했습니다. 그것이 결코 노아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때문이었습니다. 노아가 마침내 심판을 이기고 구원을 얻은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아니었더라면 그렇게 큰 믿음을 지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 창세기의 저자인 모세는 노아의 그 승리의 생애를 기록하려 할 때에 먼저 기록한 말씀은 창세기6장8절에 "그러한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하신 그 말씀이었습니다.(엡2:5, 8 참고)

성경은 노아의 생애를 기록하기에 앞서 그가 어떻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던가를 먼저 기록한 것을 우리는 주의 깊이 읽어야 할 것입니다. 노아의 경건한 신앙과 생애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때문이었습니다. 혹 우리에게 좋은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할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5절과 8절에서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은혜도 준비되었을 때 받습니다. 전파가 어디든지 있어도 수신시설이 되어 있어야만 보고 들을 수 있고 농부가 게으르면 풍년이 들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도 좋은 수확을 거들 수 없습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116:12)

* 기도: 사랑의 하나님, 믿음과 순종의 사람 노아를 본받아 살기 원합니다. 지금 저와 저희 가족 그리고 교회와 국가에 일어나는 고난과 문제들을 영적인 눈으로 분별하게 하소서. 이 모든 일들이 주님의 선한 계획을 드러내는 축복의 통로로 사용되게 하소서. 오늘도 우리에게 새로운 힘을 주시옵소서. 이 땅에 우리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찾아가셔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와 안식을 주시옵소서. 크리스천들이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서 이 땅이 주님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장소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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