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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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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http://freeview.mireene.co.kr/bbs/tb.php/e001/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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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 : 김홍도 목사와 이현주 목사는 같은 기독교인에다가 감리교인데도
결국은 숲(전체)을 보면서 나무(부분)을 봐야지 그 역은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일상속에선 이런 명제는 그저 사실명제에 가까운 말이라고 여기겠지만,
하나의 사건은 전체 우주의 사건과 관계적으로 엮여 있다는 사실을 이미 이해하고 있다면
실제로 그 하나의 사건은 전체 우주의 밑그림이 관련성 속에서 이해될 때
비로소 환하게 알 수 있음을 알 것이다.
김홍도와 이현주 목사는 같은 기독교인에다가 감리교인인데도 왜 서로 그토록 다르며
이현주 목사와 법륜 스님은 종교가 아예 다른데도 왜 그토록 친화적일까?
왜 그럴까?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바로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친숙성> 때문이다.
세계를 이해하는 해석의 툴(tool)에서 서로 흡사한 것이다.
단지 표상되는 언어는 다를 지언정 말이다.
어떤 철학적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기독교의 예수는 다른 맥락의 존재로 인지된다.
어떤 철학적 세계관에서 보느냐에 따라
인간 혹은 그 어떤 사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왜 서로 그토록 이질적으로 다르게 느껴지며
반면에 이현주 목사와 법륜 스님은 종교가 아예 다른데도
왜 그토록 친화적일까? 왜 그럴까?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
.........................
철학과 신학은 그 선 자리의 물음의 지평이 이미 다른 자리다.
철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 베이스에 자리하는 학문이다.
그것은 나는 이 세계를 어떻게 보고(해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며
철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 베이스에 자리하는 학문이다.
그것은 나는 이 세계를 어떻게 보고(해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며
결국은 우주론과 존재론에 대한 형이상학적 물음의 차원으로 가게 된다.
다시 말해서, 내가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 혹은 이해하느냐에 따라
이 세계는 전혀 다른 식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에 대해서 나름대로 썰을 풀고 이바구를 하고 있는 한
철학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세계는 전혀 다른 식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에 대해서 나름대로 썰을 풀고 이바구를 하고 있는 한
철학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나 자기가 보는 나름대로의 세계 이해가 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에게 있어서의 철학이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에게 있어서의 철학이다.
우리는 흔히 <관점의 차이>라는 표현을 잘 쓴다.
바로 그때의 관점의 기준이 그 사람에게서의 철학이다.
따라서 그 관점이 서로 어긋나 버리면, 표상된 단어가 같다고 해도
정작 그 단어가 지시하는 개념(뜻)은 전부 어긋나 버림은 말할 나위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관점 혹은 기준점이 타당한 지에 대해선
제대로 잘 살펴보지도 않고서 그냥 일상적 대화로 넘어간다.
이 점을 의식하지 않고 일상적으로 대화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점을 생각해보자.
“저 꽃은 빨간 꽃이다”라는 일상적인 명제를 분석해보자.
그런데 정작 이 명제가 정확하게 쓰여지고 있는지 어떤지는
궁극적으로는 꽃 자체에 대한 관찰과 묘사에 한정되지 않음을 알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 명제가 정확하게 쓰여지고 있는지 어떤지는
궁극적으로는 꽃 자체에 대한 관찰과 묘사에 한정되지 않음을 알 것이다.
그 꽃은 단지 나의 눈에만 그럴 뿐이고 다른 사람에겐 달리 보일 수도 있는 것이며,
태양이나 혹은 다른 자연의 작용으로 인해 다른 색깔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혹시 개나 물고기의 눈에는 저 꽃이 빨간 꽃으로 나타날까?
태양이나 혹은 다른 자연의 작용으로 인해 다른 색깔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혹시 개나 물고기의 눈에는 저 꽃이 빨간 꽃으로 나타날까?
즉, 무슨 얘기냐면, 결국은 저 꽃이 정말로 빨간 꽃인지 아닌지는
우주 전체 밑그림을 가늠하면서 저 꽃이라는 어느 한 부분을 분석해야지
꽃이라는 그 부분 자체에 한정된 묘사와 기술만 가지고는
저 꽃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주 전체 밑그림을 가늠하면서 저 꽃이라는 어느 한 부분을 분석해야지
꽃이라는 그 부분 자체에 한정된 묘사와 기술만 가지고는
저 꽃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결국은 숲(전체)을 보면서 나무(부분)을 봐야지 그 역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부분들은 관계적으로 엮여있기에
전체 안에 속한 관찰자가 어떤 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서로 달리 보인다는 점을 우리는 간파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전체 안에 속한 관찰자가 어떤 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서로 달리 보인다는 점을 우리는 간파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무(無)속에 떠도는 자기 충족적 사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 논할 수도 없고 논할 필요도 없을 터)
(*만일 있다고 해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 논할 수도 없고 논할 필요도 없을 터)
어디 꽃만 그런가.
“나는 오늘 쇠고기를 먹는다”라는 명제가 있다고 하자.
흔히 일상속에선 이런 명제는 그저 사실명제에 가까운 말이라고 여기겠지만,
하나의 사건은 전체 우주의 사건과 관계적으로 엮여 있다는 사실을 이미 이해하고 있다면
실제로 그 하나의 사건은 전체 우주의 밑그림이 관련성 속에서 이해될 때
비로소 환하게 알 수 있음을 알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형이상학이란 <해석학적 존재론>이다..
(*참고로 더 아주 깊이 가면 이것은 점과 직선에 대한 해석까지 논의되는 '기하학'에까지 올라간다.)
이처럼 형이상학은 우주 전체를 보게 하는 가장 <광범위한 일반성>을 의미한다.
이처럼 형이상학은 우주 전체를 보게 하는 가장 <광범위한 일반성>을 의미한다.
모든 일상적 명제들이나 혹은 어떤 특수 과학의 영역을 구성하고 있는
사실들의 한 유(類)genus는 그 우주에 대한 어떤 공통의 형이상학적 전제를 필요로 한다.
사실들의 한 유(類)genus는 그 우주에 대한 어떤 공통의 형이상학적 전제를 필요로 한다.
즉, 그 사람이 꽃이나 쇠고기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거기에는 이미,
우주 전체는 이렇게 생겼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형이상학적 전제를 담고서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의식하든 무의식적으로 말하든 간에 말이다.
우주 전체는 이렇게 생겼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형이상학적 전제를 담고서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의식하든 무의식적으로 말하든 간에 말이다.
철학이 모든 학문의 베이스로 작용되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따라서 철학(형이상학)이라는 전체 그림을 보는 해석의 툴(tool)이 달라지면 모든 내용들이 달라진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지시하는 내용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철학(형이상학)이라는 전체 그림을 보는 해석의 툴(tool)이 달라지면 모든 내용들이 달라진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지시하는 내용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김홍도 목사와 이현주 목사가 서로 마냥 "하나님"을 말하더라도
그것이 지시하는 내용은 전혀 다른 하나님이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이현주 목사는 오히려 김홍도 보다 법륜 스님이 더 친화적이다.
그것이 지시하는 내용은 전혀 다른 하나님이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이현주 목사는 오히려 김홍도 보다 법륜 스님이 더 친화적이다.
김홍도와 이현주 목사는 같은 기독교인에다가 감리교인인데도 왜 서로 그토록 다르며
이현주 목사와 법륜 스님은 종교가 아예 다른데도 왜 그토록 친화적일까?
왜 그럴까?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할까?
바로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친숙성> 때문이다.
세계를 이해하는 해석의 툴(tool)에서 서로 흡사한 것이다.
단지 표상되는 언어는 다를 지언정 말이다.
어쨌든 우리는 그러한 세계 이해에 따라 (철학에 따라) 거기에는
신 존재를 불러들일 수도 있고
신이 필요치 않을 수도 있고 다른 식으로 신이 설명될 수도 있다.
신 존재를 불러들일 수도 있고
신이 필요치 않을 수도 있고 다른 식으로 신이 설명될 수도 있다.
관건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사태들 혹은
드러나고 있는 모든 데이터들을 총동원하여
이 세계가 결국에는 어떻게 되어 있고 어떤 식으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 궁극적인 하나의 거대한 일관된 체계를 세우고자 하는 점에 있다.
드러나고 있는 모든 데이터들을 총동원하여
이 세계가 결국에는 어떻게 되어 있고 어떤 식으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 궁극적인 하나의 거대한 일관된 체계를 세우고자 하는 점에 있다.
플라톤의 철학 체계를 흔히 말하길 <이원론>duali sm이라고 말한다.
그의 철학은 결국 현상세계가 아닌 이데아에 그 존재근원을 두고 있는 관념론 철학이다.
그의 철학은 결국 현상세계가 아닌 이데아에 그 존재근원을 두고 있는 관념론 철학이다.
그런데 기독교 신학이 이같은 플라톤적 관념론 철학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스운 얘기다.
초기 변증가들이나 중세 스콜라 교부신학자들이었던 어거스틴 혹은 아퀴나스 등등
대부분이 헬라철학에 바탕해서 신과 세계를 설명했던 기독교 신학자들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선 안된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의 신학은 철학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철학을 담고서 축조되었다는 사실이다.
단지 이것을 본격적으로 체계화 했던 작업들이 바로 조직신학적 작업이었을 뿐...
이미 그 안에 철학을 담고서 축조되었다는 사실이다.
단지 이것을 본격적으로 체계화 했던 작업들이 바로 조직신학적 작업이었을 뿐...
만일 희랍의 관념론적 세계관에 기반한 철학이 아니라
예를 들어 포이에르바하나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세계관이 있었다고 할 경우
기독교 신학은 이 유물론적 세계관과 잘 소통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포이에르바하나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세계관이 있었다고 할 경우
기독교 신학은 이 유물론적 세계관과 잘 소통할 수 있을까?
당연히 소통하기 힘들 것이리라. 거기에는 신 존재가 끼여들 자리가 없다.
참고로 본인의 졸저 <미래에서 온 기독교>의 가장 기초전제로서의 패러다임을 보면
그것이 철학에 대한 논의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p.80. 참조).
그것이 철학에 대한 논의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p.80. 참조).
그것은 신학을 제대로 시작하고 구축함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지점이다.
철학이 바뀌면 모든 게 뒤바뀌어진다..
따라서 궁극적인 패러다임인 내가 어떤 철학을 취하느냐에 따라
기독교 신학의 색깔도 180도 달라짐은 말할 나위 없다..
기독교 신학의 색깔도 180도 달라짐은 말할 나위 없다..
내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신(神)은 필요할 수도 있고 불필요해질 수도 있다.
신(神)은 필요할 수도 있고 불필요해질 수도 있다.
어떤 철학적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기독교의 예수는 다른 맥락의 존재로 인지된다.
어떤 철학적 세계관에서 보느냐에 따라
인간 혹은 그 어떤 사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
“철학은 지금까지 신학에 철학 자체의 오류로 인하여 기독교에 해를 끼쳐왔지만 근본적으로 이것이 곧 철학의 불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철학을 신학에 적용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올바른 철학으로서 어떤 철학을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철학은 지금까지 신학에 철학 자체의 오류로 인하여 기독교에 해를 끼쳐왔지만 근본적으로 이것이 곧 철학의 불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철학을 신학에 적용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올바른 철학으로서 어떤 철학을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 그리핀(David R. Griffin) & 존 캅(John B. Cobb)
인식과 실천은 동전의 양면이면서 같이 간다.
예컨대 플라톤적 관념론의 사고 습성에 젖은 자들과
유물론적 세계관에 철두철미한 자들이 세계 안의 소소한 사회적 사건들을 대하는 시각과
상황판단 및 영위하는 삶의 행태들은 첨예하게 다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이때 우리가 철학적 사고를 제대로 하지 않는 한,
세계관에 대한 세계 해석의 문제는 매우 은연중에 이미 전제된 것으로 잠복되어 있다고 하겠다.
철학이 그만큼 모든 학문과 사유의 베이스에 자리하는 기초 학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역사적으로 철학 진영에서 논의된 다음과 같은 언명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관념론은 역사적으로 알게 모르게 지배이데올로기와 매우 친화적이었다는 사실이다.
관념론은 철학사적으로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 세계를 이분화시켜
한 쪽이 다른 한 쪽에서 파생된 것으로 봄으로서
위계적으로 보는 플라톤의 관념적 이원론 사상에 뿌리박고 있다.
※ 기존의 주류 기독교 안에 깔려 있는 철학적 패러다임
- <플라톤적(관념적) 이원론>이 갖는 해석학적 인식구조(『미래에서 온 기독교』p.80. 참조)
(* 반면에 위와 다르게 현상세계의 목록쪽을 핵심으로 놓는 그 반대의 철학적 도식은 <유물론적 세계관>에 해당할 것이다. 주로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 등등 제3세계 신학들과 친화력을 가진다. 참고로 본인이 추구하는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의 철학 패러다임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이며, 그것은 양자를 <상호의존관계>로 보는 철학적 패러다임에 해당한다)
예를 들면, 관념적 이원론으로서의 시각은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것'을 유난히도 강조하는 습성이 있다.
특히 "당신은 기독교를 왜 믿는가?"에 대한 답변을 들어보면
애초에 기독교 신학의 형성은 일찍부터 헬라문명권의 영향 안에 놓여 있었기에
알게 모르게 <플라톤적 이원론>Platonic Duali sm이 기독교 안에 유입되었다.
이는 그리스도교 사상사를 꿰는 사람이라면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스콜라 시대의 기독교 신학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에 대한 아예 본격적인 신학적 작업이기도 했다.
이것은 현재에까지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우리네 기독교 안의 뿌리 깊은 해석학적 인식이다.
사실상 서구 유럽의 철학적 전통이 플라톤 철학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이뤄져 왔었다는 얘기는
오늘날 철학진영에서도 자주 통용하는 유명한 명제이기도 하다.
플라톤적 관념론의 영향은 그만큼이나 지대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관념적 이원론으로서의 시각은
신/인간, 교회/세상, 내세/현세, 영혼/육체, 정신/물질, 남자/여자 등등
세계를 이원화시켜 전자를 본질로 후자는 파생적인 것으로서 내다보도록
그러한 인식적 사고구조의 틀을 가지게 만들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즉, 이것은 위계적으로도 어느 한 쪽에 다른 한 쪽을 종속시켜 보는
그러한 구도로서의 인식 사고구조가 알게 모르게
여전히 기독교 사상 안에 뿌리 깊도록 팽배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이를 <위계적 이원론>hierarchical duali sm이라고도 부른다.
끔찍하게도 오늘날 기독교를 소개하는 수많은 출판서적들이
바로 이러한 해석학적 인식구조에 기반한 채로 기독교를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영적인 것'을 유난히도 강조하는 습성이 있다.
영적인 삶, 영적인 눈, 영적 양식, 영적 변화 등등 ‘영적인 어쩌구’라는 표현만 달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좋아할 정도로 늘상 뇌까린다.
이 관습적 효과의 병폐는 역으로 구체적이고도 물리적인 <육체적 삶>이라는 이 땅의 현실을
은연중에 배제해버리는 기능으로서 자리매김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특히 "당신은 기독교를 왜 믿는가?"에 대한 답변을 들어보면
대부분이 하는 대답은 “구원받기 위하여”, 즉 "죽은 뒤의 나의 영혼이 천당에 가기 위해서"라고
곧잘 말한다는 사실도 기존 기독교에 깃든 관념적 이원론의 행태에 속한다.
‘내세 천국’이라는 보상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사람들은 주변에 꽤 많다.
즉, 구원이란 것도 흔히 '영혼구원'으로서만 생각하고 사고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은 ‘천당’과 ‘천국’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혼용해서 곧잘 쓰는 형편이다.
그렇기에 그만큼 철학이 신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너무나 중요하다고 하겠다.
신학이 기독교라는 색조로 나타난 건물이라면
철학은 그 건물의 설계도에 해당한다.
그래서 철학은 보이질 않는다.
또한 철학의 논의는 지루한 개념 논쟁으로 치닫기 십상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바로 개념에 대한 이해부터가
서로 쉽사리 맞아떨어지기가 힘듦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철학은 서로의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위해서
서로 간에 맞춰봐야 하는 첫단추의 지점에 해당된다고도 얘기할 수 있다.
서로 세계를 이해하는 그 철학적 세계관이 각각 달라버리면
똑같은 단어를 쓰더라도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인지된다.
똑같은 "하나님/예수/인간"를 말하더라도
내가 김홍도의 "하나님/예수/인간" 이해를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맥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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