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라

마태복음 빛의 사자............... 조회 수 1936 추천 수 0 2014.06.19 08:34:17
.........
성경본문 : 마14:22-33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예수님만을 바라보라

본문: 마14: 22- 33

스펄전이라는 유명한 설교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스펄전이 자기의 생애에 깊은 회의에 빠진 일이 있었습니다. 인생의 길을 다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영혼이 되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에 시골길을 가다가 이름 없는 감리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사람이 대 여섯 명밖에 안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목사도 없어서 구두를 깁기도 하고, 수선하기도 하고, 만들기도 하는 구두 직공이 일어나서 설교를 하는데 설교도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그 소리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스펄전을 보고는 큰 소리로 설교단에서 "저 청년 방황하고 있습니까? 길을 모르십니까? 예수를 바라보십시오."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때에 스펄전은 '아, 나는 길을 잃은 사람이구나 !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생각하고 예수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영국의 거성 같은 위대한 설교자인 스펄전이 탄생한 것입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7:7)

인도의 바케이 목사님이 친구와 함께 험한 길을 따라 구릉지대를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참 걸어간 후에 그들은 계곡의 급류 위로 연결된 좁다란 밧줄 다리를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 다리를 많이 건너 본 친구가 밧줄 다리를 건너 먼저 건너편에 도착했을 때, 바케이 목사님은 쩔쩔매며 겨우 다리의 중간 지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바케이 목사님은 소용돌이치며 노호하는 급류를 내려다보며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그 다리가 마치 급류의 반대 방향으로 흔들리며 움직이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때 그 친구가 바케이 목사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내려다 보지마! 나를 똑바로 쳐다보라고!”

그 충고는 효력이 있었습니다. 바케이 목사님이 세차게 흐르는 물결에서 친구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때, 그는 담대히 다리를 건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 여정에서 간혹 위협적이고 어려운 상황에 부딪히게 됩니다.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문제 상황만을 응시하며 거기서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면 그것으로부터 빠져 나올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를 넘어 목표를 바라볼 때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믿음의 주님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볼 때, 결코 흔들리거나 두려움 없이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 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어느 성도가 삶의 큰 문제에 부딪혀 크게 마음에 번민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자다가도 깨어나서 태산 같은 문제가 가슴을 짓눌러 숨조차 쉴 수 없을 때 그는 마음속에 도움을 달라고 절규하였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은 그 앞에 태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 1- 2)

성도 여러분, 이 시편 기자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고 말한 이유는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에 산당을 짓고 아슬아슬 바알 상을 세워 놓고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기자는 말하기를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내가 산당을 향하여 눈을 들고 바알신과 아세라 신에게 향해서 도움을 청할 것인가. 아니다. 그것들은 신도 아니고 우상에 불과하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오는 것이므로 여호와만 바라보고 섬기고 믿으라고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고난과 시련을 안 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 시련과 고난 중에서 누구를 향해 바라보아야 도움이 오겠습니까? 우리가 우상과 사신을 바라보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다른 종교를 바라보겠습니까? 참 하나님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우리가 참 도움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63:2)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수많은 군중들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이고 군중을 다 흩어 보내시고 제자들을 독려해서 배를 타고 먼저 가버나움으로 가라고 하시고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다가 풍랑을 만나 아주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주님께서 물위로 걸어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 유령인줄 알고 모두 다 혼비백산하여 고함을 쳤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용감하게 “주 시어든 날 명하사 물위로 걸어오게 하소서.”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오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부는데 예수님 아닌 다음엔 물위로 걸어갔다가는 빠지면 다시 생명을 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용감하게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위로 걸어가니 저벅저벅 물위로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이 물위로 걸은 처음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진광풍이 불어오고 물보라가 베드로의 입을 치니까 그만 예수를 바라보던 눈을 돌이켜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았었습니다. 마음에 불안과 공포가 꽉 들어차자 물에 가라앉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가 놀래서 “주여 나를 도우소서.”하니 주님께서 오셔서 손을 붙잡아 일으키면서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꾸짖으셨습니다.

본문 28절- 29절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볼 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날도 눈을 들어 예수님을 바라볼 때 기적이 일어나지 예수님 이외에 다른 것을 바라보면 기적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 바람과 파도를 바라볼 때 베드로는 물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것이냐, 바람과 파도를 바라볼 것이냐. 이것이 운명을 결정하는 가름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본문 30절에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베드로는 바람을 보았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아야 되는데 왜 바람을 보았습니까? 똑같은 눈으로써 예수님을 볼 수도 있고 바람을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기적이 일어나지만 바람을 보면 불안과 공포가 들어와서 물에 빠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들어 바람과 파도를 바라보지 말고 항상 예수님을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물위란 어디입니까? 이곳은 결코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베드로는 배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금 서 있는 곳은 바람이 일고 파도가 치는 바다 한 복판입니다. 그때에 베드로에게 두 가지 삶의 태도가 교차됩니다. 신앙과 불신앙, 확신과 의심입니다. 베드로의 눈에 예수님이 안보이고 거센 풍랑과 파도만이 휩싸고 있습니다. 무서움과 의심이 생깁니다.

우리도 예수님만이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알고 신앙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 때문에 우리 신앙이 흔들립니다. 소수의 목회자들이나 장로의 옳지 않은 모습을 보고 교회가 싫어집니다. 그밖에 교회의 수많은 문제들이 나를 괴롭힙니다.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배는 되돌아 갈 수는 없습니다.

그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지르며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였습니다. 배에 있는 동료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9장 1- 10절에 보면 삭개오는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 나무위에 올라갔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데 장애물이 있다고 포기하지 말고 주님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우리의 삶 속에 항상 바라봐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도 이브자리에 앉아서 제일 먼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바라보아야 되고 낮에도 수없이 시간만 있으면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바라보고 묵상해야 되고 잠들기 전에 주님 앞에 기도할 때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는 가가 여러분 마음속에 큰 변화를 일으켜 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죄악의 파도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이 꽉 들어찼는데 죄악의 파도에 우리는 다 빠져서 죽어가고 있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를 멸하시고 죄악의 파도 위를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우리가 죄악의 파도에 빠지면서도 파도 위를 걸어오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손을 내밀면 예수님은 우리를 끌어내어 주시고 죄를 이기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님만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형벌을 받아서 몸을 찢고 피를 흘려 다 청산해 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 몸 찢고 피 흘려서 그 대가로써 죄악을 청산해 버렸기 때문에 죄가 아무리 우리에게 다가와도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는 죄를 이기고 죄 위를 걸어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밖에는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종교도 철학도 수양과 도덕도 죄악의 파도를 걸어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의 파도 위에 걸어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세속과 더러움의 파도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세속과 더러움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술주정뱅이도 알코올중독자도 음란한 자도 방탕한 자도 그곳에 인간의 힘으로 이길 수 없고 파도에 빠져 들어가지만 예수를 바라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세속과 마귀를 이기고 그를 짓밟고 승리하셨으므로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세속과 마귀를 짓밟고 파도 위를 걸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여서 바라봄의 법칙을 통하여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보면 예수님과 우리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라봄을 통해서 주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 발에 기적을 일으켜서 세속과 마귀를 이기고 그 파도 위를 걸어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마귀가 세속과 파도를 가져오지만 예수님은 이를 멸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세속과 마귀의 파도 위를 걸어가게 만들어 주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우리가 눈을 예수께 고정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의지하면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를 승리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질병의 파도 위를 예수님이 걸어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병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겉은 멀쩡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다 한 두 가지 병이 있습니다. 영적인 병이 없는 사람은 마음에 스트레스로 병이 있고, 마음에 병이 없는 사람은 육체에 병이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몸에 병을 앓고 있으면서 자기가 병든 자 인줄 알고 있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허다히 많은 것입니다. 우리가 의학이 발달되고 수많은 기적적인 약이 있지만 그러나 우리를 온전히 치료해 주지 못합니다. 오늘날 병의 파도 위를 걸어오시는 분은 예수님인 것입니다. 병은 축복이 아니라 형벌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병을 축복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고 우리에게 벌을 주시기 위해서 병을 보내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에는 병이 없었습니다. 죄 지은 결과로 병이 이 땅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대신 병을 짊어지므로 형벌을 대신 당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병을 짊어지고 채찍에 맞아서 온 몸에 상처를 입으므로 죄악의 대가뿐 아니라 질병의 대가도 다 지불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혼의 구원 뿐 아니라 치료의 복음인 것입니다.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하시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료하시는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병의 대가를 지불하고 병의 심판을 받아서 다 청산해 버렸기 때문에 어떠한 병의 파도 위로도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희망과 꿈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병을 바라보면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병을 바라보면 “너는 암이다. 너는 당뇨병이다. 너는 척추가리에스다. 저는 절름발이다. 너는 못살아난다.” 파도에 엄몰 되고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만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이 우리 귀에 쨍쨍 울리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입었느니라. 내가 실로 너희 연약함을 짊어지고 너희 병을 담당하였느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면 그리스도의 능력이 임하여서 우리도 병을 짓밟고 병의 파도 위를 걸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4절로 5절 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다 우리 때문에 당한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우리 병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고난당하여 심판을 당하시므로 청산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운명하시기 전에 내가 다 이루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완전히 청산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아무런 부채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청산 받은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가 담대하게 죄도 물리치고 병도 물리치고 마귀도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청산해 버리고 우리는 부채가 없습니다. 마귀가 억지로 죄의 부채를 어깨에 짊어지게 하고 세상과 부패를 가져오고 질병과 고통을 우리에게 짊어지우게 할 때 우리가 고분고분 짊어져서는 안됩니다.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대적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희 병은 물러갈지어다. 너희 죄악은 물러가라! 너희 세속은 물러가라! 유혹은 물러가라! 나는 너와 상관이 없다. 예수님이 너를 멸해 버리고 너를 이기셨다. 나는 예수를 바라보고 너를 이긴다. 그럴 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이기고 짓밟고 승리로 행진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 어떤 선교사가 콩고에서 선교 생활하다가 병이 들렸었습니다. 간암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미국 고향으로 돌아와서 간암치료를 받았으나 병이 점점 깊어져서 의사들이 이제 퇴원하고 죽을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퇴원해서 죽을 준비를 하고 있는 데 하루 따뜻한 봄날 양지 편에 그 부인보고 침대를 좀 내달라고 해서 양지에 침대에 누워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성경 베드로전서 2장 24절을 읽게 된 것입니다. 전에도 그 성경을 수백 번 읽었으나 마음에 큰 감동이 없었는데 요번에는 그 성경을 읽는데 전광석화와 같이 하나님의 계시가 임한 것입니다. 마음에 몽둥이로 얻어 맞은 것 가은 충격을 느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 말씀이 가슴에 울려 들어 왔었습니다. 그는 깜짝 놀래서 이 말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마음속에 말씀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병은 축복이 아니라 형벌이다. 내가 인간의 질병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그 무서운 형벌을 대신 감당하기 위해서 채찍에 맞았다. 그러니 너는 이 형벌을 받을 필요가 없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나니 이 사실을 너가 믿느냐?” 그 말씀이 영혼을 뒤 흔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그렇다면 나는 병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주님이 날 대신 형벌을 받아서 질병을 청산 했은즉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품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병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병자가 아닌데 왜 환자복을 입고 침대에 드러누워 있습니까?” 빨래를 해서 널고 있는 부인을 보고 “여보 여보! 이리 오세요. 이 성경 좀 보세요.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가 나음을 입었다고 했는데 이미 하나님은 고침을 주셨는데 내가 누리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안 믿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오늘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치료 받았습니다. 이제 옷을 갖다 주십시오.” 부인이 “아이고 그러지 말고 그냥 침대에 누워 있으라”고 했는데 억지로 옷을 가져 오라고 해서 옷을 입고 성경을 가지고 노방전도를 나갔습니다. 비틀비틀 하면서 노방에 서서 예수를 전도하고 건강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건강한 사람처럼 꿈꾸고 믿고 말하고 행동했는데 점점 나아져서 완전히 깨끗하게 나았다는 간증을 읽어 본적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질병의 파도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다고 했으므로 이 말씀대로 우리도 질병의 파도 위를 밟고 갈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이 말씀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마음속에 외우십시오. 말씀이 여러분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2천년 전에 이미 주신 것입니다. 새로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 놓은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으면 구원을 받고, 믿으면 병 고침을 받고, 믿으면 축복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를 보시고 “믿음이 적은 자요 왜 의심하였냐고 꾸짖은 것처럼 우리는 물에 빠져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죄악의 물에 빠져 들어갈 필요 없고 세속의 물에 빠져 들어갈 필요가 없고 질병의 물에 빠져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것은 이미 물위로 걸어갈 수 있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약속의 말씀을 입으로 조아리고 묵상하고 시인하십시오. 기적이 일어납니다. 여러분과 나는 기적을 가지고 살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기적을 가지고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기적으로 죄악을 이기고 찾아오며 세속과 마귀를 이기고 찾아오며 질병을 이기고 여러분을 찾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적에 동참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과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저주와 낭패의 파도 위를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저주가 얼마나 많고 낭패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을 해보니까 너무나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많아요? 나라가 와서도 도울 수 없는 고통이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떻게 그 사람들을 근본적으로 도울 수 있습니까? 예수를 바라보게 하는 길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야 저주와 가난의 파도를 짓밟고 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잡고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기는 삶은 예수님의 손을 잡고 갈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 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몇 해 전, 한 대학의 연구 결과 신앙 활동은 영혼을 살찌게 할 뿐만 아니라 삶을 부요하게 만들어 준다고 발표했습니다. 미국의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의 존너선 구르버 박사는 자신의 논문에서 신앙이 있는 사람은 노동시장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신앙이 없는 사람들보다 더 여유를 가질 수 있으므로 성공할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결과를 과학적 통계로 증명했습니다. 즉, 그는 연구를 통해 교회 출석률이 두 배가 되면 소득이 9.1% 늘어나고, 생활고로 인해 정부에 원조를 구하는 구제요청이 16% 감소하며, 이혼률도 4%로 줄어든다고 말했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저주와 낭패의 파도 위로 오시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 이 땅의 모든 고통과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하며 파도 위를 걸어서 갈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가난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예수 믿게 하는 것입니다. 낭패와 실망과 좌절과 절망의 파도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능력을 의지해서 자기도 파도위로 걸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도와줘도 도움의 손길이 끝나면 또다시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부가 도와줘도 스스로 설 수 있는 힘이 없으면 그 사람은 자립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바라보면 스스로 설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으로 저주와 가난의 파도위로 걸어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죽음의 파도 위를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다 죽어요. 인생이 무엇입니까? 어린아이로 태어난 그 시간부터 심장의 북소리를 들으면서 죽음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저도 70이 넘고 나서부터는 하루에도 여러 번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죽으면 저 건너편에 무엇이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해서 천국에 들어가면 얼마나 즐겁고 기쁠까?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즐거울까? 죽음에 대한 것을 생각할 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음의 파도에 음몰 되지 아니하고 파도 위를 걸어가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 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을 바라보면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살고, 다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살아도 죽었고 죽어도 죽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살고 살아도 살고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생명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고 바울은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망의 파도가 걸어 오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그 파도 위를 걸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안 오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 오더라도 죽음을 짓밟고 천국으로 들어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바사 왕 고레스는 훌륭한 덕장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유화정책을 펼쳐서 적들을 포용하려고 노력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이웃나라를 정복했을 때 적국의 왕을 앞에 두고 물었습니다.

"내가 만일 그대를 살려준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제가 가지고 있는 재산의 절반을 왕에게 바치겠습니다."

"그러면 그대의 자녀들을 다 풀어준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제가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왕에게 바치겠습니다."

"만일 내가 그대의 왕비를 살려준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제 목숨을 기꺼이 왕에게 바치겠습니다."

바사왕 고레스는 매우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을 모두 살려주었습니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 풀려난 왕은 왕비에게 말했습니다.

"과연 바사 왕 고레스는 훌륭한 덕장임이 틀림없더군. 그는 분명히 전 세계를 제패할 것이요. 그의 인물도 출중하더군. 당신의 생각은 어떻소?"

그러자 뜻밖에도 왕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의 얼굴을 전연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저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하는 한 믿음직한 남자의 얼굴을 황홀하게 쳐다보느라고 그 외의 다른 곳에는 전혀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높은 보좌를 내어놓고 낮은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역대하 20장 말씀에는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하여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호사밧은 주변 국가들의 연합군이 쳐들어 왔을 때 도저히 대적할 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역대하 20장 12절에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기만 했는데 하나님께서 복병을 두어 적군을 다 물리쳐 주셔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결코 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보장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세상의 환경이나 풍랑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며 전진을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를 주신 것은 그냥 장식품으로 목에 달거나 벽에 붙여 놓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자나 깨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께서 몸 찢고 피 흘려서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고 사망의 파도를 타고 끌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면 예수 안에서 능력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안보이고 귀에 안 들린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여 죄를 이기는 권능, 세상을 이기는 권능, 병을 이기는 권능, 저주를 이기는 권능, 죽음을 이기는 권능이 와서 우리가 죄의 파도 위를 밟고 세속을 밟고 질병의 파도를 밟고 저주의 파도를 밟고 죽음의 파도를 밟고 걸어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능력의 복음인 것입니다. 형식과 의식이 아닌 것입니다. 종교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이긴 예수님의 승리의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여서 우리로 하여금 변화된 삶을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생각이 희망으로 변화되고 꿈이 변화되고 믿음이 변화되고 말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고 기적이 일어나고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적인 것입니다. 권능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121: 1- 2)

얼마나 마음이 괴롭습니까? 큰 태산 같은 문제를 당하여 숨도 쉴 수 없는 불안과 공포가 목을 조여 오는 때 산을 향하여 눈을 들었었습니다. 산에 산당이 있고 바알신와 아세라 신의 목상이 있으니 그가 나를 도와줄까? 아니야 아니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시편 121편 3- 4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졸지 않으시고 지키셔서 실족 지 않게 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니 하나님을 재발견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발견하고 아버지의 품에 안기면 세상에 태산 같은 어려운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품에 품어 주시고 실족 지 않게 하시고 지키시고 졸지 아니하시고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입니다. 세상 부모도 우리를 24시간 지켜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졸지 않으시고 지켜 주시며 실족 지 않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 아버지를 발견한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소니 드 멜로가 쓴 「1분 지혜」라는 책 중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한 젊은 수도사가 수도원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수없이 수련을 하고 금식도 하고 철야도 하고 기도를 했는데 몇 년이 지나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장에게 가서 “원장님, 나는 수도사로 들어와서 몇 년째 금식도 하고 철야도 하고 부르짖어 기도를 해도 하나님을 못 만나 봤는데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그러니까 수도원장이 가만히 팔짱을 끼고 이렇게 안경너머로 보는데 “바로 네 옆에 계시네.” “없는데요?” 그러니까 수도원장이 가만히 있다가 “이 사람아, 술 취한 사람이 왜 집을 못 찾아 가느냐. 술 취한 사람이 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느냐. 술 취한 사람이 왜 비틀거리느냐? 술에 취했기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다. 이 세상에 취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안 보인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에 취해 있는 사람은 그 세상에 취해 가지고서 천국도 안보이고 하나님도 안보이고 자기도 못 본다. 네가 무엇에 취했는지를 깨닫고 그것을 회개하고 벗어 버리면 하나님이 보인다.”

성경에는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만리 장천 멀리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볼찌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와 항상 같이 있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취하고 돈에 취하고 쾌락에 취하고 방탕에 취하고 술에 취하면 하나님도 안보이고 자기도 안보이고 비틀거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같이 계시면서 졸지도 아니하시고 지켜 주셔서 실족 지 않게 돌보아 주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 것만 깨닫게 되면 우리 마음속에 굉장한 용기와 힘이 생깁니다.

시편 23편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있음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생애를 붙들어 주신 것을 생각할 때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시편 121장 5절- 6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키시고 낮에 일어난 사건과 밤에 일어난 사건을 주님께서 다 동시에 지켜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해를 받거나 파멸되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밤의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피난처요, 우리의 요새요, 우리를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믿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따라 말씀하세요. 주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십니다. 공기가 여러분과 같이 있는 것처럼 주님은 눈에 안보이지만 여러분과 함께 계셔서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를 위해서 오늘날도 기적을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이라는 것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련을 말하는데 환난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시련은 환난입니다. 고난은 다 당하지요. 고난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하지만 감당할 수 있습니다만 환난은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전쟁은 환난입니다. 지진은 환난입니다. 큰 홍수는 환난입니다. 유행병은 환난입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은 환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때로는 고통을 주십니다.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고통을 겪게 하지만 환난은 다가오면 우리는 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는 다 죽습니다. 지진이 일어나면 우리가 감당치 못합니다. 홍수를 누가 막을 수 있습니까? 유행병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런 고통을 면하게 해주겠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환난에서 우리를 면케 해주겠다고 말씀합니다.

시편 121편 7절- 8절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부모가 어린 자식을 지키지 않습니까? 타박타박 걸어가면서 자기는 부모 없이도 마음대로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부모는 뒤를 따라다니면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고난을 통해서 여러분이 변화 받기를 원하시지만 환난을 통해서 파멸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환난에서 우리를 지켜 주셔서 우리가 파멸 당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 국민일보에서 '할렐루야 캡틴'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비행사 신일덕 씨의 간증을 매우 감명 깊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1990년 11월 아주 맑은 날씨에 신일덕 씨는 승객 165명을 태우고 서울에서 사이판으로 가는 비행기를 조종했습니다. 사이판에 거의 도착하게 되어서 비행기가 고도를 낮출 때 이제 기아를 내려야 바퀴를 내리는데 기아를 내리려고 하니까 바퀴가 내려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기계를 조작하고 당겨도 기아가 내려오지 않습니다. 이제는 큰일 났습니다. 비행기가 바퀴가 없이는 불시착 할 수밖에 없었고 불시착하면 비행기가 몇 동강이 나고 불이 붙고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일득 씨는 열렬한 그리스도의 신자인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조종관을 부조종사에게 맡겨 놓고 기관사와 함께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비행기 안에서 하나님께 고함을 치고 부르짖어 기도했던지 온몸이 땀범벅이 되고 막 성령의 불을 받아서 방언을 말하고 굉장했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하는데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이 왔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하나님 말씀이 마음속에 들어와서 너무나 감동해서 그만 비행기 안에서 "할렐루야" 고함을 치고 기관사에게 우리 조종관을 다시 조정해 보자고 기아 내려오는 조종관을 잡아 당기니까 쭉 바퀴가 내려와요. 승객들에게는 이미 불시착 할 터이니 고개를 다리 사이로 깊이 숙여 놓고 양다리를 손으로 붙잡으라고 해서 온 승객들이 다 기절초풍을 하고 놀래 있었는데 갑자기 그 마이크에서 “할렐루야~ 하나님이 도와 주셨습니다.” 기장이 고함을 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비행기는 무사히 안착을 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여러분 환난인 것입니다. 그대로 불시착 했더라면 비행기가 박살이 나고 163명의 생명이 다 죽을 수밖에 위기에 주님께 부르짖으니 환난을 면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 대한 진정한 도움은 태산 같은 권력이나 돈이나 세상의 능력이 아니라 천지를 지으신 야훼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문제의 태산만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계십니다. 빚쟁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계신 것입니다. 병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계신 것입니다. 절망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계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택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고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예수 사람이요, 천국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살지 혼자 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여러분 물에 빠지지 마십시오. 죄악의 물에 빠지지 마십시오. 세속의 물에 빠지지 마십시오. 병의 물에 빠지지 마십시오. 저주의 물에 빠지지 마십시오. 사망의 물에 빠지지 마십시오. 물위로 걸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물위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잘 때도 바라보고 깨어날 때도 바라보고 앉아도 바라보고 일어나서도 바라보고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이루어 놓으신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마음속으로 묵상하며 감사하십시오. 주의 능력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주의 권세가 여러분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손을 내밀어서 건져주신 것처럼 오늘 주의 능력이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혼자 인생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인생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마이너스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하여 플러스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앉아도 플러스, 서도 플러스, 걸어가도 플러스, 언제나 플러스 인생을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혹이 우리를 엄습할 때, 근심과 걱정이 우리를 둘러쌀 때, 좌절하고 낙심되어 절망상태에 빠지려 할 때,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하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둠이 예수님께서 임재하시는 밝은 빛에 의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죄가 우리의 심령을 지배하려고 하고 양심을 무겁게 할 때, 우리 구주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의 은혜는 죄를 정복하기에 넉넉합니다. 불안으로 떨릴 때, 감사의 마음으로 예수님께 돌아가십시오. 우리 앞에 놓은 소망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주님의 가족으로 맞아들이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님의 능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줄 것입니다. 에수님은 우리를 한 걸음씩 인도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나의 손을 맡기십시오. 그리하여 예수님이 우리를 인도하게 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멀리 떠나 계신다고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언제나 가까이 계십니다.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은 항상 우리 주위에 계십니다. 우리가 찾기를 기다리고 계신,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3: 1- 2)

사람은 무엇을 쳐다보고 사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결정됩니다. 땅을 쳐다보고 사는 자는 땅의 것으로 살 것이요, 하늘을 쳐다보고 사는 자는 하늘의 것으로 살 것입니다. 미래를 쳐다보고 사는 자는 미래에 올 꿈과 소망으로 기쁨을 누릴 것이요 땅의 것만 바라보고 사는 인간은 저속해지고 비열해지나 하늘의 것을 보는 인간은 거룩해집니다.

우리 인생이 바라보아야 할 목표는 바로 하나님뿐입니다. 이 세상의 부나 명예, 혹은 안락함을 추구하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방황하는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우리는 먼저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해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시123: 1-2)

같은 상황이라도 눈을 아래로만 향하고 있으면 절망에 빠지고 말지만, 눈을 들어 위를 보면 소망을 얻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남은 삶도 주님을 위해 살게 하옵소서. 우리는 눈을 들어 세상에 태산 같은 문제를 바라보고 떨지 않습니다.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몸 찢고 피 흘려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저주를 멸하시고 질병을 도말 하시고 사망을 이기신 권세와 능력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우리는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환경을 의지하지 않고 용감하게 일어납니다. 우리는 다 기적을 체험하고 기적을 느끼며 생활하며 살고 있습니다. 종교인이 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는 우리가 되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의 믿음 없음을 용서하시고, 믿음 없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는 예수님만 더욱 바라보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굳건한 믿음을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한태완 목사

*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0902 로마서 예수 안에 잠긴 인생 롬6:1-11  강승호 목사  2014-06-21 1197
10901 요나 요나의 노래(김석준목사 작시) 욘1:1-3  김경형목사  2014-06-21 1292
10900 시편 만족한 생활 시105:40  한태완 목사  2014-06-20 1111
10899 마태복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9:16-17  강승호 목사  2014-06-20 1298
10898 로마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롬12:10-21  한태완 목사  2014-06-20 3462
10897 마태복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자 마5:13-16  한태완 목사  2014-06-19 2879
» 마태복음 예수님만을 바라보라 마14:22-33  한태완 목사  2014-06-19 1936
10895 누가복음 聖靈充滿(성령충만)이란 무엇인가? 눅1:1-2  이정수 목사  2014-06-18 1223
10894 사도행전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The house of prayer) 행2:42  이정수 목사  2014-06-18 1395
10893 사도행전 교회에 대한 묵상 행2:1-47  이정수 목사  2014-06-18 1130
10892 요한복음 성령강림주일 요4:24  이정수 목사  2014-06-18 1156
10891 요한복음 From Ribbon To Re-born 요3:1-15  이정수 목사  2014-06-18 928
10890 전도서 청년의 때,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전11:7-12:8  이정수 목사  2014-06-18 2671
10889 전도서 꼬라지(Appearance-외모) 있는 청년 전11:7-12:8  이정수 목사  2014-06-18 1013
10888 전도서 싸가지(Attitude-태도) 있는 청년 전11:7-12:8  이정수 목사  2014-06-18 970
10887 전도서 싹수(Ability-능력) 있는 청년 전11:7-12:8  이정수 목사  2014-06-18 1053
10886 전도서 청년주일: 청년아, 네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아라 전11:7-12:8  이정수 목사  2014-06-18 1173
10885 출애굽기 五旬節(오순절-Pentecost)-성령강림주일 출23:15-16  이정수 목사  2014-06-18 1174
10884 히브리서 죽을 날을 기억하라 히9:27  한태완 목사  2014-06-18 984
10883 고린도후 보이지 않는 것은 고후4:16-18  강승호 목사  2014-06-18 1065
10882 에스라 쓴맛 속에 깊은맛 스3:1-13  최장환 목사  2014-06-18 1563
10881 역대하 향기를 남기는 자 대하1:1-17  최장환 목사  2014-06-18 1191
10880 역대상 집념과 집중력의 결실 대상9:33  한태완 목사  2014-06-18 920
10879 창세기 노아의 생애와 교훈 창5:28- 29  한태완 목사  2014-06-17 1728
10878 시편 시간의 소중함과 가치 시90:12  한태완 목사  2014-06-16 1714
10877 디모데후 자기를 깨끗케 하여 귀히 쓰는 그릇이 되자 딤후2:20-21  한태완 목사  2014-06-16 1437
10876 창세기 서로 용서하는 신앙 창45:7-8  한태완 목사  2014-06-16 1145
10875 히브리서 사후(死後)대책이 중요하다 히9:27  한태완 목사  2014-06-16 848
10874 디모데후 하나님의 귀한 일꾼이 되자 딤후2:14-21  한태완 목사  2014-06-15 1524
10873 로마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하여! 롬12:1~2  강석공 목사  2014-06-15 1097
10872 로마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사람 롬14:13-18  이한규 목사  2014-06-15 1739
10871 베드로전 신앙 연단의 필요성 벧전1:6-7  강종수 목사  2014-06-15 1285
10870 요한계시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1) 계4:4-8  이한규 목사  2014-06-14 1141
10869 신명기 감사하는 삶을 훈련하십시오 신21:18-23  이한규 목사  2014-06-14 1774
10868 요한계시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삶 계4:1-4  이한규 목사  2014-06-14 1207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