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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화제가 된 문창극 총리 지명자의 일련의 발언에는 우리나라 보수 지배세력의 경제사관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한국인의 ‘민족성’은 게으르고 의존적 타율적이며, 이씨조선 500년간의 지독한 정체 상태에서 알 수 있듯 그대로 두면 아무런 희망도 미래도 있을 수 없는 집단이다. 여기에 자비로운 ‘하나님’은 이 불쌍한 민족을 위하여 두 가지의 장치를 예비하셨다. 하나는 식민 통치, 분단, 전쟁으로 이어졌던 온갖 고난과 시련이며, 또 하나는 서양, 일본, 미국을 잇는 ‘개명된 선진’ 세력이다. 실로 놀랄 만큼 거칠고 단순한 사관이지만, 이것으로 지난 한 세기 혹은 반 세기간 한국의 경제 발전 과정을 하나의 스토리로 꿰어내는 역할을 한다. 쓰러져가는 이씨조선을 대체한 일본 제국주의는 ‘근대화’의 씨앗을 뿌렸고, 미국의 도움으로 반공과 자유민주주의를 확립할 수 있었고, 거기에 이승만 박정희로 시작되는 명철한 지도자들의 ‘영도’와 이에 호응한 강력한 기업가 정신의 소유자인 재벌 대기업의 분투로 모두가 잘살 수 있는 세상이 왔다는 것이다.
황당하다. 사회복지 지출, 노동생산성, 노동 시간, 산업재해율, 저축률, 범죄율 등 한 민족의 경제 생활의 에토스를 보여주는 여러 지표로 볼 때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인은 남의 도움없이 악착같이 일하고 악착같이 모아서 악착같이 자립을 추구하는 이들이었으며, 모름지기 ‘게으르고 의존적인’ 이들과는 정반대였다. 2차 대전의 폐허와 탈식민주의라는 1950년대의 출발선에 나란히 서 있었던 수많은 빈곤국들을 제치고 한국이 비약적 경제 성장을 할 수 있었던 데에 최소한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이것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한국인들의 ‘표면적인’ 온갖 장점과 미덕은 모두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외부로부터 강제되어 온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외부로부터의 도움과 영감’에서 단절되는 순간 한국인들은 다시 혼란과 빈곤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요컨대, 일본인들이 강점기에 남겨놓고 간 말대로, ‘한국인들은 본래부터 쥐어패는 것밖에 길이 없으며, 쉬지 않고 쥐어팬 덕에 오늘의 영광이 찾아왔으며, 따라서 내일도 모레도 영원히 쥐어패는 것이 우리의 나아갈 바’라는 스토리이다.
여기서 한국 보수세력의 흥미로운 성격 하나가 드러난다. 이러한 경제사관을 설파하고 있는 이들은 누구일까? 한국인인가 아닌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들은 물론 한국인이기도 하지만, 그런 천한 DNA를 나누지 않고 ‘개명된 선진’ 세력의 세례로 거듭난 개량종이라는 점에서 한국인이 아니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 민족의 유일한 살길은 이 반신반인과 같은 존재인 자신들을 온전히 권력의 자리에 모시고 그 지도를 따르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경제사관은 그래서 앞에서 말한 ‘쥐어패는’ 역할을 오롯이 이들 몫으로 돌린다.
그 반대가 진실에 가깝다. 식민 통치, 분단, 전쟁, 빈곤과 독재로 이어지는 지난 100년간의 ‘고난과 시련’은 ‘신의 섭리’는커녕, 오히려 남북한의 지배 엘리트 바로 그들의 무능과 타락과 망상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그리고 그 풍비박산이 난 사회를 치유하고 다시 삶의 새순을 틔웠던 것은 한없이 삭이고 꿋꿋이 살아내면서도 불의에 맞설 줄 알았던 어질고 지혜롭고 부지런한 백성들이었다. 한국 보수의 이 일그러진 경제사관의 문제는 단순히 그것이 우리 민족사에 대한 모욕이라는 점만이 아니다. 지구화와 탈산업사회라는 21세기의 도전 속에서 모든 나라가 혁신과 변화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 경제에서 가장 퇴행적인 질서를 무슨 ‘비전’인 양 들이밀고 있다는 것이 훨씬 더 심각하다. 지금 선진국들 사이에는 노동자 기업가 투자자 지식인 모두가 효율적으로 어우러지는 새로운 ‘거버넌스’의 질서가 필요하다는 담론이 널리 공유되고 있다. 그런데 ‘공구리 치던’ 60년대에나 통하던 경제 질서로 21세기를 열고자 하는 것이 이들의 ‘비전’인 셈이다. 이러한 경제사관을 가진 한국의 보수세력이야말로 가장 ‘게으르고 의존적인’ 집단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여기서 한국 보수세력의 흥미로운 성격 하나가 드러난다. 이러한 경제사관을 설파하고 있는 이들은 누구일까? 한국인인가 아닌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들은 물론 한국인이기도 하지만, 그런 천한 DNA를 나누지 않고 ‘개명된 선진’ 세력의 세례로 거듭난 개량종이라는 점에서 한국인이 아니기도 하다. 따라서 한국 민족의 유일한 살길은 이 반신반인과 같은 존재인 자신들을 온전히 권력의 자리에 모시고 그 지도를 따르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경제사관은 그래서 앞에서 말한 ‘쥐어패는’ 역할을 오롯이 이들 몫으로 돌린다.
그 반대가 진실에 가깝다. 식민 통치, 분단, 전쟁, 빈곤과 독재로 이어지는 지난 100년간의 ‘고난과 시련’은 ‘신의 섭리’는커녕, 오히려 남북한의 지배 엘리트 바로 그들의 무능과 타락과 망상이 빚어낸 참극이었다. 그리고 그 풍비박산이 난 사회를 치유하고 다시 삶의 새순을 틔웠던 것은 한없이 삭이고 꿋꿋이 살아내면서도 불의에 맞설 줄 알았던 어질고 지혜롭고 부지런한 백성들이었다. 한국 보수의 이 일그러진 경제사관의 문제는 단순히 그것이 우리 민족사에 대한 모욕이라는 점만이 아니다. 지구화와 탈산업사회라는 21세기의 도전 속에서 모든 나라가 혁신과 변화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 경제에서 가장 퇴행적인 질서를 무슨 ‘비전’인 양 들이밀고 있다는 것이 훨씬 더 심각하다. 지금 선진국들 사이에는 노동자 기업가 투자자 지식인 모두가 효율적으로 어우러지는 새로운 ‘거버넌스’의 질서가 필요하다는 담론이 널리 공유되고 있다. 그런데 ‘공구리 치던’ 60년대에나 통하던 경제 질서로 21세기를 열고자 하는 것이 이들의 ‘비전’인 셈이다. 이러한 경제사관을 가진 한국의 보수세력이야말로 가장 ‘게으르고 의존적인’ 집단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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