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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는 식민 지배보다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가 더 크다. 일제 부역보다 빨갱이가 ‘부숴야 할 원수’에 해당한다. 유산계급한테 위협적인 체제는 제국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가 이승만이나 윤치호를 언급한 이유가 꼭 그들이 기독교인이고 강연 장소가 교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극단적 반공주의자이면서 대단히 성공한 이 인물들은 보수우파의 역할모델들이다.
정권의 요직에 극우가 창궐하고 있다. 최소한의 품위라도 갖췄으면 좋겠지만 하나같이 뻔뻔하고 교양이 없다. 이들은 사실 일반적 의미의 ‘보수’도 아니며 ‘극우’라 부르기조차 민망하다. 제 민족과 국가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보수우파가 아니라 친미와 친일의 줄기를 이어가는 기회주의자들이다. 이들의 종교는 힘, 곧 권력이며 성장에 집착하는 한국의 개신교와 서로 통하는 지점이 있다.
인간 사회에서 종교는 많은 역할을 하지만 이 글에서는 두 가지 성격에 한정한다. 우선 기독교는 오랜 세월 서구 사회에서 통치를 위한 이데올로기였다. 공산주의가 기독교와 충돌을 일으키는 현상은 자연스럽다. 대체로 유물론자들은 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공산주의에서 현실의 밥을 해결하는 일이 최우선이라면 기독교는 사후에 가는 천국이 더 중요하다. 세상의 모든 고통에는 다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 저항보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근면’하게 살기를 종용한다. 둘째, 교회는 소외계층을 위한 사회경제적 구휼 기관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교회가 계속 힘을 얻으려면 유산계층의 선한 봉사와 기부로 굴러가는 사회여야 한다. 달리 말하면, 국가의 재분배적 개입이 최소화된 사회일수록 교회가 개입할 구석이 많아진다.
문창극의 언어에 ‘근면함’과 ‘게으름’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근면함을 칭송하고 게으름을 경멸한다. 그에게 근면함과 게으름을 정의하는 기준은 결과로 나타난 힘이다. 돈과 권력은 자신의 근면함을 증명할 수 있는 윤리적 지표다. 그렇기에 분배정의가 중요한 공산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하기 좋아하게 하기보다는 남의 노고에 얹혀서 살기를 조장한다(윤치호를 인용)”고 여길 수밖에 없다.
사회주의적 이상은 찾아보기 힘든 북한식의 독재가 사회주의를 팔듯이 예수의 정신은 찾아보기 힘든 대형 교회가 ‘하나님의 뜻’을 팔고 있다. 지금 한국 교회에는 세습, 탈세, 성폭력 등 이 사회의 문제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신도가 고객이 된 지 오래다. 예수는 혁명적이지만 교회는 세속적이다. 예수는 희생을 택했으나 교회는 권력을 추구한다. ‘개독교’와 ‘빤스목사’가 난립해도 공산당 타령이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에 가장 앞장서는 이들은 다름 아닌 선민의식으로 가득한 기독교인들이다. 기독교식으로 보자면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한’ 존재다. 지금 이 시대를, 이 땅을, 예수가 살아간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예수는 스스로 지배자가 되지 않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섬겼다. 그것이 하나님의 ‘터치’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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