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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12:1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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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본문: 로마서 12:10- 21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15절)
두 딸을 뒀던 한 여성이 끔찍한 사건을 증언하려고 법정에 섰다.
그녀에게 딸들은 삶의 모든 것이었다.그녀가 적은 일기장에는 두 딸의 출생부터 죽기 전날까지의 따뜻한 일상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남편은 살아가면서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자신처럼 비참한 삶을 살게 하느니 차라리 아이들도 함께 이 세상을 끝내자고 동반 자살을 결심했다. 남편은 아내 몰래 여섯 살, 네 살 된 두 딸에게 독극물이 든 우유를 먹이고 자신도 먹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남편은 목숨을 건졌지만, 죄 없는 두 딸만 죽고 말았다.
...법정에 나온 그녀는 심장병과 척수염, 류머티즘으로 몸을 가누기도 어려운 상태. 지친 몸, 그리고 삶의 전부였던 딸들을 잃은 그녀는 아이들을 되살릴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흐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눈물을 거두고 증언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남편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지만 남편이 정당한 판결을 받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서 이 자리에 섰다고 밝힌 그녀는, 남편은 아이들을 미워한 게 아니라, 세상에서 받을 고통을 막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잘못은 남편의 '세상을 향한 두려움'에 있다고 법정에서 힘이 되는 증언을 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말했습니다.
"약한 마음을 가진 남편에게 형을 가볍게 내려 한 번이라도 사람답게 살 기회를 주길 바랍니다."
- 윤재윤 판사의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 중에서 -
인구가 딱 100명인 마을이 있었다. 이장이 마을 사람들의 생활실태를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 백인이 30명, 유색인종이 70명이다. 남자 48명, 여자 52명. 그중 50명은 영양실조로 고통당하고 있었다. 1명은 먹을 것이 없어 지금 굶어 죽어가는 중이다. 자가용을 소유한 사람은 7명, 학교에 다닌 적이 없는 사람이 17명,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14명이다. 40명은 물이 부족해 제대로 씻지도 못한다. 기독교인은 30명이었다.
힘 있는 자의 배려
이 마을은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종교 갈등으로 인한 인질극이 종종 벌어졌다. 마을 동쪽에 위치한 유전의 소유권을 놓고 지금도 싸우는 중이다. 주민들은 좀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마을 사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 주민 10명이 마을 전체 재산의 70%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나머지 30%의 재산을 놓고 90명이 싸우는 형국이다.
흉년이 닥칠 때마다 빈부 격차는 점점 심화되어 갔다. 부자들은 시장경제와 자유경쟁 이론을 내세워 부를 축적했다. ‘심은 만큼 거둔다’는 부자의 논리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부자들에게는 배려와 사랑의 마음이 없었다.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과격하게 ‘공정한 분배’를 요구했다. 결국 부자는 빈자를 깔보았고, 빈자는 부자를 증오했다. 이 마을에 평화가 깃든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이라는 작은 책이 있다. 68억 인구가 사는 세계를 100명이 사는 마을로 축소시켜 통계를 정리한 책이다. 그것을 토대로 오늘날 지구촌 문제를 픽션으로 각색해 보았다.
지금 글을 읽을 수 있고,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다면 당신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가족이 먹을 양식이 충분히 준비되어 있고, 목마를 때 시원한 생수를 안심하고 마실 수 있다면 당신은 특권층에 해당한다. 이런 좋은 환경에 살고 있으면서도 감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악이다. 100명의 마을에 평화가 정착되려면 힘 있는 자, 가진 자의 배려가 필요하다. 시장경제나 자유경쟁은 쌍방이 어느 정도 동등한 힘을 가질 때 의미가 있다. 힘의 균형이 무너진 상태에서의 자유경쟁은 공허한 이론이다.
인생은 함께 가는 여행
금융위기를 겪을 때마다 지구촌 사람들의 소득 불균형은 더욱 심화된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제도적 시스템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부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정부의 재정적 지원보다는 기업인의 아름다운 기부와 교회의 사랑실천이 훨씬 바람직하다. 최근 워런 버핏과 빌 게이츠 등 40여명의 억만장자들이 사회적 약자를 위해 약 1500억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참으로 아름다운 헌신이다. 국내에서는 왜 이런 감동적인 선언이 없는 것일까.
우리의 상황도 예외가 아니다. IMF와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됐다. 중산층 다수가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정부가 계속 친 서민 정책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일 것이다. 가진 자들의 겸손한 배려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된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교회가 많아져야 한다.
천국의 문은 매우 좁고 낮다고 한다. 무릎을 꿇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교만하고 거만한 사람은 낮고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다. 천국은 겸손한 사람,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을 위해 준비된 낙원이다. 인생은 독창이 아니라 합창이다. 모두 함께 노래하는 것이다. 인생은 단독 여행이 아니다. 함께 걷는 여행이다. 대열에서 낙오된 사람을 보듬어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 삶에 지친 사람의 짐을 함께 들어주며 동행하는 여행이다. 100명의 마을에서 ‘사랑과 화합의 하모니’가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6:17-18)
얼마 전 이웃나라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 방사능의 뉴스를 보았다. 성경최초의 지진피해를 입은 사람은 고라자손이었고(민16:31~32), 그 원인을 성경은 그들의 하나님을 향한 교만과 죄 때문이었다고 기록을 해놓고 있다(민16:3.14).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방법은 자연계시(자연현상을 통한 계시)와 특별계시(성경을 통한계시)가 있습니다. 전쟁. 기근. 지진....
이러한 현상들은 다 자연계시에 해당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자연계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방법을 우리는 우연의 일치로 치부해 버린다는 것이다.
구약당시 이스라엘의 주변국 나라들과의 전쟁을 성경은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연결시켜놓고 있다. 모압이 암몬이 블레셋이 앗수르가 바벨론이 침략을 해서 전쟁이 일어난 줄 알지만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였다.
그 당시 일본의 피해규모는 2차 대전 이후의 최대규모라고 한다. 경제대국이라는, 우상대국이라는 일본을 타켓으로 물질만능주의와 인본주의와 세속주의에 빠진 열방을 향해 주고 계시는 하나님의 경고 메시지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하나님께서 주고 계시는 계시(그것이 자연계시든 특별계시든)앞에 중요한 것은 자각하는 것이다.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낳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이런 속수무책인 자연재앙 앞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나 직장 안에서나 학교 안에서나 우리주변에는 항상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쁜 우리의 이웃이 있다. 이런 이웃을 향해 오늘 주시는 말씀은 그들을 축복하라는 것이다.(14절)
그런데 나쁜 이웃을 촉복하라는 이것이 우리의 본성과는 맞지 않는다는게 문제이다. 우리의 본성은 악을 당할 때 더 큰 악으로 복수 하는것. 되로받고 말로 주는 것 이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구약의 율법에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라는 말씀이 있다.(신19:21) 이 말씀의 의미는 당한만큼 갚아주라는 의미가 아니라 최고의 자비를 베풀라는 의미이다.
당시 정서는 이를 상하게 하면 상대방 이를 상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갈비뼈를 부숴야 하고, 눈을 잃어버리게 하면 상대방 눈만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목을 내리쳐야 하는 것이 당시 정서였다. 때문에 당한 것 이상으로 그렇게 하지 말고 당한 만큼만해서 악을 더 큰 악으로 갚지 말라는 구약시대의 하나님 사랑의 표현 방법이다 결국은 최고의 자비를 네 주변의 나쁜 이웃들에게 베풀라는 것이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의 대처 방법은 참는 것이다 그러나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용서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 좋은 방법이 있다. 축복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향해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들을 향한 용서와 축복을 통해 한편의 강도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돌 던지는 자들을 향한 스데반 집사님의 용서와 축복이 초대교회 사도바울을 탄생케 하지 않았는가? 자기를 판 형들이 애굽의 총리가된 요셉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을 때 요셉은 형들을 안심시키면서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일이라며 오히려 형들을 위로하지 않았는가?
지금 일본을 향해 우리가 가져야할 마음은 이 요셉의 마음이며, 스데반의 마음이며, 예수님의 마음인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에 일본내에서 한편의 구원받는 강도가 생길 것이다. 제2의 사도바울 같은 자가 탄생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에 요셉의 형제들을 통해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만들어지고 하나님나라가 세워져 갔던 것처럼 일본이라는 나라 안에 닫혔던 복음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그 땅안에 세워져 갈 것이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3:17)
예전에 교회에서 가난한 이웃들에게 쌀을 나누어 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봉사에 참여했던 한 분의 고백이 기억에 남아 있다. 무거운 쌀을 나누다 보니 부득이하게 집안까지 들어가게 되었는데 집안 사정은 보기보다 심했다. 습기가 차서 곰팡이가 피어 있고 식구는 많아서 제대로 누울 공간조차 보이질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가족은 봉투에 풀칠을 하면 받을 수 있는 일당 천 원 정도로 하루끼니를 해결했다. 꽤 오래전 일이었으니 지금의 천원 보다는 가치가 있을지 몰라도 여러 식구의 하루 끼니를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이 가정의 생활상을 보고나서 자신이 고급호텔에서 마셨던 커피 한 잔이 얼마나 의미 없는 한 잔이었는지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국민소득이 2 만 불을 넘어도 한편에서는 눈물로 하루를 보내는 이웃이 있다. 우리는 우는 자들과 함께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고통 없이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가장 힘든 이웃을 향해 내미는 손길이 언젠가 나에게 또 다른 위로의 손길로 다가올지 모른다. 추운 날씨에 옷깃을 여미는 나눔이 우리 삶에 일상이 되기를 기도한다.
우리 주변에는 사람의 관심 밖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 힘없고, 소외되고, 외로운 존재가 많다. 우리 교회 안에도, 청년회에도, 우리 청년회가 관여하고 있는 주변 할머니 할아버지들 가운데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 과연 우리는 그들이 우는 아픔 마음을 우리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아파하고 우는가는 심각하게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 주님을 생각해 보자. 우리 주님은 진정 우는 자들로 함께 우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가족과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다.(요11:33- 36) 그리고 우리의 영적 질병을 아시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친히 십자가에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에게 '너희들도 나의 아픔을 공유하고, 내가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에 대해 동일한 마음을 품으라. 그들과 함께 울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만약 이 이상의 다른 생각을 품는다면, 그것은 주님보다 높은 체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우는 자들로 함께 울지 않는 것이 스스로가 주님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며, 어리석은 존재임을 드러내는 태도이다. 진정으로 지혜 있는 사람이란, 주님이 품고 있는 마음을 동일하게 품는 사람이며, 주님이 찾아가서 위로하고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는 사람을 찾아가 동일한 위로와 긍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이다.
세월호 침몰 유가족의 아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하루에도 수천, 수만 건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 모든 일이 다 하늘의 뜻이라고 말한다. 얼핏 생각하면 일리가 있는 것 같지만 무슨 하나님의 뜻이 300명의 인명을 한꺼번에 죽게 한단 말인가. 무슨 하늘의 뜻이 생때같은 아들딸을 그렇게 데려가는가. 그것은 하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사악함과 탐욕과 욕심이 빚어낸 비극이요 참사다. 우리의 부주의와 거짓과 착각이 만든 참극이요 살상이다. 이러한 사건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천재가 아니라 인재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세상만사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있는가. 하늘의 뜻,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 일어난 사고나 사건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되고 이해가 되는가. 비극의 당사자들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는가. 거의가 그렇지 않다. 단지 그 말을 한 사람이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람이기에 위로를 받는 것이지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거나 정말로 그 뜻을 이해해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했다. 말이 필요 없다. 장황한 설명이나 미사여구가 없어도 좋다. 문제의 해답을 내지 못해도 괜찮다. 높은 지위나 권세를 갖지 못하고 많은 물질을 제공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그냥 슬픔을 당해 괴로워하며 심한 고통 속에 있는 그를 부둥켜안고 울어 주라는 것이다. 망연자실 주저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껴안고 어깨를 도닥이며, 뜨거운 눈물로 젖어 있는 내 얼굴을 그들의 얼굴과 손등에 부비며 소리 없이 있어 주면 그만이다. 그들의 손등에 떨어지는 찝찔한 액체, 끈적이며 얼굴에 와 닿는 그 뜨거운 한줄기의 눈물이 어떤 천군만마보다 힘이 되고 위로를 줄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딸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사람들, 그것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는데도 살려내지 못해 가슴에 피멍이 들고 억장이 무너진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말해서 위로가 되겠는가. 차라리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며 그 고귀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할 정도로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탐욕과 욕심으로 인해 죽은 희생자 때문에 얼마나 슬퍼하며 통곡하실까 생각하며 함께 울어주는 것이 진정한 위로가 아닐까.
성경에 야곱의 네 아내 중 가장 사랑받는 아내였지만 다른 세 아내가 열 명의 아들을 낳을 때까지 자식을 낳지 못해 슬퍼하고 통곡하며 그 누구의 어떤 위로도 받기를 거절했다는 라헬의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절망과 좌절의 사람들을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은 그들의 슬픔 속에 들어와 함께 울어준 저들의 눈물을 희망의 끈으로 붙들고 지팡이 삼게 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하셨으리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신다(욥5: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오늘, 그리고 앞으로, 당신 주변에서 울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자. 누가 소외와 고통과 외로움과 어려움으로 울고 있는가? 그들과 함께 우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태도)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이 우리의 발걸음을 움직여 찾아가게 하시는 "대상"은 누구인가? 그들과 더불어 마음을 낮춰 당신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야 할 "대상"은 어떤 사람인가?
그 사람(들)을 발견했다면, 이제 그들과 함께 하여 마음을 같이 나누고 우는 일만 남았다. 이 메시지를 통해 주님이 주시는 도전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들과 함께 울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희생이 뒤따를 수 있다. 당신 자신을 위해 친히 울어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그 희생을 감당할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는가?
나눔과 구제 그리고 봉사와 위로는 사랑의 한 표현이다. 성경은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 3:17, 18)고 말씀하셨다. 말로는 누구나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에는 희생적인 실천이 따른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의 선행을 기뻐하신다. 나는 오늘 어떤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고, 즐거워하는 자와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었는가? 돌아보자.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같으니이다’.(시39:13)
* 기도: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시고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 약한 자를 도우며, 위로하는 심령이 되게 하여 주시고, 나의 가장 아끼는 것까지도 주님께 드리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옵소서. 이웃과 함께 웃고 즐거워하며 함께 울며 더불어 사는 훈련을 하게 하소서. 이웃과 함께 나누며 서로 돕고 살게 하옵소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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