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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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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친상을 당한 시인 J에게 문상을 갔다가 평론가 K선생을 만났다. 상갓집에서 조문객들끼리 하는 대화가 으레 그러하듯 삶과 죽음에 대한 속절없는 사설을 몇 마디 주고받다가, 문득 K선생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전 강화도에 볼일이 있어 다녀오는 길에 교훈이 ‘염치’인 학교를 보았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작가들이 저마다 모교의 ‘고리타분한’ 교훈들을 주워섬기는 가운데 그 ‘참신한’ 교훈이 한층 흥미로워졌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정말 있었다! 김포시 대곶면에 자리한 ‘대곶중학교’의 교훈이 바로 친애, 정성, 그리고 ‘염치’였다.
대체 누가 지은 교훈일까? 곱씹을수록 감탄스러운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대곶중학교 홈페이지에 ‘염치’는 ‘결백하고 정직하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으로 설명되어 있다. 말하자면 염치란 남을 대하기에 떳떳한 도리를 차릴 줄 아는 체면과 동전의 양면이다. 흔하디흔한 ‘성실’, ‘근면’, 심지어 ‘순결’ 따위의 교훈은 기실 개인적인 양심이나 품성, 가치의 조항에 불과하다. 1차 집단인 가족이나 촌락의 가르침이 될 수 있을지언정 2차 집단인 학교에서 내세워 훈육할 만한 지침은 아닌 것이다. 사악한 자가 근면하고 성실하면 사회의 재앙이다. 여학교의 교훈으로 떡하니 계시된 순결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 대한 폭력이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의 관계 맺음을 가르치는 데 있어 ‘염치’만큼 중요한 덕목이 어디 있는가?
면면히 이어온 경험적 지혜가 함의된 속담에서 ‘염치’는 다양한 표현으로 드러난다. 염치없는 자는 낯짝과 뱃가죽이 소가죽보다 두껍다. 봉당을 빌려주면 안방까지 내달라고 우겨대고, 안뒷간에 똥 누고 안 아가씨더러 밑을 씻겨 달라고 덤벼든다. 고약한 노린내가 나는 놀래기 회라도 마다하지 않고 먹을 형국이다. 조상들은 이처럼 두려움도 모르고 고마움도 모르고 제 욕심만 차리려 덤비는 자를 꺼리어 멀리했다. 이 모두의 근원이 바로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몰염치다.
바야흐로 ‘염치’가 실종된 후안무치의 시대다. 어떤 악행과 실행보다도 번연히 제가 저지른 일 앞에서 뻔뻔스레 구는 철면피들이 더욱 놀랍다. 그렇다. 화가 나기에 앞서 놀랍다. 눈물이 흐르면 훔쳐 닦는 자연스러운 반응 대신 대놓고 드러내며 손발이 오그라드는 ‘발연기’를 하고, 그걸 놓칠세라 카메라는 ‘줌인’으로 재바르게 찍어댄다. 친자식들조차 내팽개치고 살아가던 사람이 지방교육행정의 최고 책임자가 되겠다고 나서는가 하면(단, 그 과정에서 의외로 발견된 ‘개인’은 놀라웠다. 달콤한 그녀는 오로지 제 근기로 혈연의 성벽을 훌쩍 뛰어넘었다!), 선거에서 패배했다고 저희가 주장했던 직선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비교육적이기 그지없는 교육단체도 있다. 끝내는 조선총독부 총독으로나 어울릴 인사를 민주공화국의 총리 후보랍시고 들이대기까지 한다. 아, 보는 사람이 쪽팔리다. 어찌하여 부끄러움은 항상 그들이 아닌 우리의 몫이어야 하는가?
염치없음, 그리하여 뻔뻔스러움은 결국 철저한 특권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아도취, 자기합리화, 안하무인의 행태는 철학자 아론 제임스가 지적한 대로 “모든 인간은 도덕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그들은 실로 특별하여 당당하다. 특혜는 당연하고 다른 사람들의 불만 따윈 아랑곳없다. 자아도취와 자기 합리화는 그들의 ‘DNA’에 새겨진 불굴의 면역성이다. 그런데 그 특권의식을 뒷받침하는 건 다름 아닌 “진상은 호구가 만든다”는 사실이다. 일단 강단에서 마이크만 잡으면 사탄이 떠드는지 천사가 외치는지 가려 듣지도 않고 무조건 “아멘!”을 외치는 맹신자들과, 거지 코스프레를 하는 약탈자들에게 ‘불쌍해서’ 표를 던지는 유권자들은 그들이 마음껏 진상을 떨도록 만들어주는 ‘호갱님’에 다름 아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하고 배짱을 튕기는 파렴치한에게 “네가 누군지 안다!”고 똑바로 말해 줄 수 없는 한 이 끔찍한 ‘참극’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 사는 곳에서는 쓰레기가 배출된다. 하지만 쓰레기가 생기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그 쓰레기를 아무 데나 방치하고 심지어 투척하는 일은 범죄에 속한다. 깡통은 깡통끼리, 휴지는 휴지끼리 차곡차곡 분리수거하고 악취가 나면 탈취제라도 뿌려야 한다. 더러우면 숨거나 숨기기라도 해야 한다. 그게 중학생이라도 능히 알 만한 최소한의 ‘염치’다.
<김별아 | 소설가 ywba69@hanmail.net>
면면히 이어온 경험적 지혜가 함의된 속담에서 ‘염치’는 다양한 표현으로 드러난다. 염치없는 자는 낯짝과 뱃가죽이 소가죽보다 두껍다. 봉당을 빌려주면 안방까지 내달라고 우겨대고, 안뒷간에 똥 누고 안 아가씨더러 밑을 씻겨 달라고 덤벼든다. 고약한 노린내가 나는 놀래기 회라도 마다하지 않고 먹을 형국이다. 조상들은 이처럼 두려움도 모르고 고마움도 모르고 제 욕심만 차리려 덤비는 자를 꺼리어 멀리했다. 이 모두의 근원이 바로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몰염치다.
바야흐로 ‘염치’가 실종된 후안무치의 시대다. 어떤 악행과 실행보다도 번연히 제가 저지른 일 앞에서 뻔뻔스레 구는 철면피들이 더욱 놀랍다. 그렇다. 화가 나기에 앞서 놀랍다. 눈물이 흐르면 훔쳐 닦는 자연스러운 반응 대신 대놓고 드러내며 손발이 오그라드는 ‘발연기’를 하고, 그걸 놓칠세라 카메라는 ‘줌인’으로 재바르게 찍어댄다. 친자식들조차 내팽개치고 살아가던 사람이 지방교육행정의 최고 책임자가 되겠다고 나서는가 하면(단, 그 과정에서 의외로 발견된 ‘개인’은 놀라웠다. 달콤한 그녀는 오로지 제 근기로 혈연의 성벽을 훌쩍 뛰어넘었다!), 선거에서 패배했다고 저희가 주장했던 직선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비교육적이기 그지없는 교육단체도 있다. 끝내는 조선총독부 총독으로나 어울릴 인사를 민주공화국의 총리 후보랍시고 들이대기까지 한다. 아, 보는 사람이 쪽팔리다. 어찌하여 부끄러움은 항상 그들이 아닌 우리의 몫이어야 하는가?
염치없음, 그리하여 뻔뻔스러움은 결국 철저한 특권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아도취, 자기합리화, 안하무인의 행태는 철학자 아론 제임스가 지적한 대로 “모든 인간은 도덕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그들은 실로 특별하여 당당하다. 특혜는 당연하고 다른 사람들의 불만 따윈 아랑곳없다. 자아도취와 자기 합리화는 그들의 ‘DNA’에 새겨진 불굴의 면역성이다. 그런데 그 특권의식을 뒷받침하는 건 다름 아닌 “진상은 호구가 만든다”는 사실이다. 일단 강단에서 마이크만 잡으면 사탄이 떠드는지 천사가 외치는지 가려 듣지도 않고 무조건 “아멘!”을 외치는 맹신자들과, 거지 코스프레를 하는 약탈자들에게 ‘불쌍해서’ 표를 던지는 유권자들은 그들이 마음껏 진상을 떨도록 만들어주는 ‘호갱님’에 다름 아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하고 배짱을 튕기는 파렴치한에게 “네가 누군지 안다!”고 똑바로 말해 줄 수 없는 한 이 끔찍한 ‘참극’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 사는 곳에서는 쓰레기가 배출된다. 하지만 쓰레기가 생기는 것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그 쓰레기를 아무 데나 방치하고 심지어 투척하는 일은 범죄에 속한다. 깡통은 깡통끼리, 휴지는 휴지끼리 차곡차곡 분리수거하고 악취가 나면 탈취제라도 뿌려야 한다. 더러우면 숨거나 숨기기라도 해야 한다. 그게 중학생이라도 능히 알 만한 최소한의 ‘염치’다.
<김별아 | 소설가 ywba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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