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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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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12.01.01 http://www.yullin.org(안양 열린교회) |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1)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눅11:3)
I. 본문해설
앞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구하여야 할 우선적인 기도제목 세 가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성취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1부라고 한다면 네 번째 기도는 2부로 접어듭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필요한 것들이 어떤 것인지 간구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간구하도록 가르쳐 주신 것은 이하의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충족될 때 1부에서 가르쳐주신 신자의 존재의 대의라고 할 수 있는 세 가지 기도제목을 위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II. ‘양식’을 구하는 기도
2부의 첫 번째 기도제목은 양식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양식’은 그리스어로 ‘알토스’[?ρτο?]이며 본문에는 정관사가 붙어있습니다. 알토스는 유대인들의 주식인 빵입니다. 등가번역을 하면 우리에게는 주식인 밥입니다.
A.'양식‘이란 무엇인가?
양식이란 무엇일까요? 역사적으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1. 성찬의 떡
첫 번째는 성찬에 제공되는 떡입니다. 성찬의 떡은 교회 공동체의 회원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혀져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이 그 떡을 떼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항상 교회의 흠 없는 한 회원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성례의 은혜를 받게 해 주시옵소서’ 라는 기도가 됩니다.
2. 영적인 떡, 그리스도
첫 번째 의미보다는 초대 교회부터 중세 초기까지 광범위하게 환영을 받던 두 번째 해석이 있습니다. 떡을 물리적인 떡이 아니라 영적인 떡으로 해석해서 그리스도라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영적인 떡인 그리스도를 주셔서 우리가 주님을 먹고 주님은 우리 안에 계시게 해 주시옵소서’ 라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적인 일체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3. 음식의 떡
세 번째 견해는 역사적으로 소수였고, 여러분들 대부분이 취하고 있는 견해입니다. 음식으로의 떡이라고 해석을 한 것 입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하루 쓸 양식을 주시옵소서입니다. 이틀 치도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일용할 양식을 위해 매일 매일 간구해야 하고 저축이나 미래를 위해 무엇을 쌓아놓는 모든 것들은 복음의 교훈에서 이탈한 생활의 원리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4. 인간다운 삶의 조건들
네 번째 해석이 가장 어울립니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을 총체적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해설했습니다. ‘여기에 양식은 단지 식량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의 양식뿐만 아니라 영혼의 양식인 진리의 말씀, 인간다운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는 교육의 기회, 정신을 고양할 수 있는 학문과 문화의 누림, 이 모든 것을 총칭하여 양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단, 귀금속은 안 된다.’ 귀금속은 일용할 양식에 안 들어갑니다. 일용할 양식의 범위는 시대와 역사가 흐름에 따라서 조금씩 변천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복된 삶을 영위하는데 이바지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여기서 복된 삶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답게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B. '양식‘, 제유법적 표현
그래서 양식은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제유법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 원래 식물인 떡의 의미
예수님이 양식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 그 분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림은 출애굽기 16장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면서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식량의 문제를 해결해주셨는데 바로 만나입니다. 꼭 하루 먹을 것만 거둘 수 있었고 이틀 치를 거두면 썩거나 벌레가 났습니다. 만나를 먹이셔서 백성들의 육체를 보호해 주신 것으로 끝났다면 예수님이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빵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명기 8장에서 모세가 16장 사건을 해석합니다. 만나를 주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이라고 말합니다. 즉, 양식이 인간의 총체적인 존재에게 공급되는 필수불가결한 양식임을 확장해서 보여준 것입니다.
2. 영혼+육체로 이뤄진 인간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이 영혼과 육체로 창조하셨습니다. 영혼은 형상, 육체는 질료여서 형상이 질료를 찾아가고 질료는 형상을 구해서 영혼과 육체가 조화로운 결합을 이루고 있을 때 인간이며 완전한 실제이며 실체입니다. 그렇게 됐을 때 완전한 존재가 된다고 보는데 이것을 가리켜 영혼의 질료형상 이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고귀함 이런 것들은 영혼뿐만이 아니라 육체도 아울러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3. 양자 모두 하나님 형상발현 요함
하나님의 뜻은 육체와 영혼 모두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발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 굶주리며 심각하게 고통을 받고 있다면 그 굶주림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교도라 할지라도 양식을 제공하여 기본적인 존엄을 유지하면서 살게 하는 것이 우리의 심각한 의무입니다.
4. 둘 다 신적 돌봄 대상
결국은 육체와 영혼 모두 하나님의 돌봄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원이 필요합니다. 건강과 탁월한 지식, 하나님 사랑과 은혜가 필요합니다. 사회적인 요구도 있고 육체적인 요구, 영적인 요구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한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그저 하루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식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III.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기도를 공동체적으로 올리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의 표현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에게’입니다. 성경에는 아버지 되심이 크게 네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는 창조된 모든 인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왔다는 점에서 창조의 아버지, 둘째는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성부는 성자의 아버지 되시는 삼위일체 내적인 부격인 아버지 되심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신정 국가에서 아버지 되시는 것이며 넷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인 양자적 아버지 되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녀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양식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며 자신이 이바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A. ‘날마다’-‘오늘날’
1. 날마다(에피우시온)
그러면서 성경은 이러한 양식을 날마다 혹은 오늘 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양식을 꾸미는 수식어가 있습니다. 그것을 마태복음, 누가복음 모두에서 일용할 양식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희랍어로 ‘에피우시온’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번역이고 역사적으로 아주 치열한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에피우시온’이라는 단어를 ‘에피웃사’에서 온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에피웃사’는 ‘잇달아 일어나는, 연달아 발생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유대인 학자들은 이 단어를 ‘마할’이란 히브리어 즉, 내일이라는 말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날들에 꼭 있어야 하는 그 양식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십시오’ 라는 의미가 됩니다.
2. 출16장이 배경임
이 문제를 풀기위해 출애굽기 16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입니다. 만나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가 퍼지기 전에 갔어야 했습니다. 해가 퍼지면 이슬처럼 사라지면서 없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만나를 구하러 간 시간은 새벽 미명일 것입니다. 이 만나는 해가 퍼지면 사라질 테니까 해가 퍼지고 그 다음날 다시 만나가 내릴 때까지 쓸 수 있도록 미리 거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피우시온’을 ‘잇따라 오는 그 날에 필요한’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기가 막힌 일치를 이룹니다. 또한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기 때문에 전날에 이틀 치를 거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날의 양식이 아니라 명백하게 그 다음날의 양식이 됩니다. 그래서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예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질을 모으고 미래를 예비하는 것 자체를 불신앙으로 보는 것은 이 구절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맘몬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육체까지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에 이바지하는 모든 좋은 것은 그분께 받아서 우리가 빚지고 덕을 입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티끌 같은 존재이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 생활 속에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구하라 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모두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하늘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물질이 있고 없고 지식의 많고 적음이 근심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평안과 근심의 차이는 오늘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와의 인격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B.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
결국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인간은 결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없이 용감하고 씩씩하게 자신과 함께 스스로 동행하면서 사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가장 가슴 아파하는 교만한 삶이고 패망의 앞잡이의 길을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이 세상을 향하여 싸울 때에는 담대했으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 아이처럼 의존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IV. 결론
낮고 천한 우리지만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채우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한 해가 새롭게 펼쳐졌습니다. 자기 의존하며 원망과 불신앙 속에 한 해를 더럽히시렵니까? 아니면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주님과 함께 충만한 공급의 삶을 사시렵니까? 이제는 여러분들이 삶으로 하나님 앞에 대답해야 할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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