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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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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12.02.26 http://www.yullin.org(안양 열린교회) |
신령한 은사들의 한계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13:8)
I. 본문해설
고린도 교회는 은사들을 받은 사람들이 서로 우월하다고 생각하여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12장에서 신령한 은사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이지 은사를 받은 사람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13장에서 사랑의 속성을 이야기 한 후, 8절에서 사랑이 어떻게 모든 영적인 은사들보다 탁월한지 서술합니다.
본문을 해설하기 전에 은혜를 먼저 정리하려고 합니다. 은혜는 세 가지 용례로 사용이 됩니다. 첫째는 객관적인 의미로 사용을 하면 쓸모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호의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통해 제시된 구원의 길 자체를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릅니다. 셋째는 주관적인 의미로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하여야 할 바를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이에 비해서 은사는 은혜와는 달리 일을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의 결과는 사랑이고, 은사의 결과는 효용성입니다.
II. 신령한 은사의 한계
A. 탁월한 은사들
8절에 나오는 은사는 사랑과 비교되고 대조 될 수 있는 탁월한 은사들입니다. 즉, 예언과 지식과 방언입니다. 사도는 이것들이 사랑에 비해 어떻게 열등한지 서술합니다. 희랍어 성경으로 보면,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만약 예언들이 있다고 해도 폐지될 것이며 방언들이 있다고 해도 그칠 것이며 지식이 있다 할지라도 폐지될 것이다.”
B. 하나님의 뜻을 알게함
이 세가지 은사는 얼핏 보기에 병고침의 은사나 능력 같은 것에 비해 열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교회 안에서 이것들은 매우 높임을 받는 은사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세 가지 은사는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은사였기 때문입니다.
1. 예언(propheteiai)
예언이라고 나오는 ‘프로페테아이’(προφητε?α)는 신약시대의 선지자들이 행하던 예언을 가리킵니다. 이들의 예언 활동은 두 가지로 이루어졌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가 신약의 선지자들에게 임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째가 대부분의 예언 사역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넓은 의미에서는 일반적인 말씀 선포도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일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 활동의 연속성 안에서 검토되어야 합니다. 두 가지 점에서 신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과 현저히 달랐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왕, 제사장과 삼직을 이루면서 신정국가 전체를 솥발처럼 떠받친 직분자들이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때로는 동등한 권위를 가지고 예언활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선지자들은 구약의 권위 아래,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아래, 사도들의 권위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정적인 범위에서 예언활동을 하였다는 점에서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과 현저한 차이가 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구속사역의 전개의 현실에 집중되어서 과도기적인 성격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성경이 완성되고 교회에 널리 받아들여지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잠정적인 선지자의 직분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 예언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에서 사도바울이 늘 붙박이처럼 담임 목사로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았다는 신탁의 예언은 매우 중요한 권위를 갖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2. 방언(glossai)
이뿐만 아니라 방언도 하나님의 뜻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방언에 대해 활발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먼저 살펴볼 것은 신약 성경 안에서 방언이 변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방언이 처음 등장한 것은 사도행전 2장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을 때에 사람들은 불에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고 임재의 경험 후 첫 번째 쏟아져 나온 것이 방언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창세기 11장의 빛 아래서 구속사적으로 연결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창세기 11장에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보다, 서로가 흩어지기를 두려워하여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이것을 하늘에까지 닿게 하고 자신들의 이름을 널리 드러내자고 도모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심각한 불순종을 징계하는 수단으로써 주신 것이 언어의 혼잡이었습니다. 결국 흩어지게 되었고 언어의 장벽 속에 갇혀서 단절된 가운데 살았습니다. 이러한 저주가 풀리는 구속사적 사건이 사도행전 2장의 방언 사건입니다. 두 본문을 비교해 보면 놀라운 일치점이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에서 흩어지게 된 것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알아 들을 수가 없어서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강림하시자마자 하나님께서 방언을 주시고, 각 나라에서 모인 사람들이 자신의 말로 방언을 하는 것처럼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통역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방언은 고린도전서 14장에 오면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어느 언어인지는 모르지만, 언어로 사람들이 말을 했기에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언어를 통역해 주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방언은 어떤 성격의 방언인가입니다.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오늘날의 방언은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 나오는 성령의 방언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통역을 하면 방언이 담고 있는 매우 신비로운 하나님의 지시사항들이 파악이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은 성령의 역사와 무관하며 심리적인 것이라고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방언은 이미 사라졌고 하나님의 신령한 것에 대 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둘 다 모두 한쪽으로 치우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방언은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요? 우선 우리의 방언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청취력의 방언과는 다르고,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과도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본질에 있어서 지금 우리가 받는 방언의 은사도 넓은 의미에서 성령의 은사로 주어진다고 하는 것에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4장의 방언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올바르게 통역이 되면 교회에 하나님에 관해서 알려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에 반해 오늘날의 방언은 그런 계시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며 그렇기 때문에 통역이 필요가 없는 방언입니다. 그리고 통역의 은사는 완벽하게 종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방언은 계시를 주는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영적 세계를 믿지 못하던 사람들이 방언을 경험하고 나면 영적인 세계가 있고 성령이 실제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방언은 비록 효용성은 끝났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성령의 은사로 남아서 믿음을 격려하고 우리를 성경으로 향하게 만들어 주는 유용한 기능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3. 지식(gnosis)
또 한 가지는 지식의 은사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12장 8절에서 언급했던 지식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노시스’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이 부분을 해설하면서 그노시스는 복음의 신비에 대한 특별한 통찰력을 가리키는 것이며 성령의 매우 탁월한 방식으로 주어지는 지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충분히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인데도 복음의 신비를 깨닫도록 놀라운 방식으로 통찰력을 주시면 구약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도들의 설교를 들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의 비밀을 가르칠 수 있는 탁월한 지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C. 은사의 한계
당대의 맥락에서 보면 이 은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주는 탁월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예언과 지식과 방언은 병 고침과 능력을 행하는 것보다 훨씬 탁월한 은사였습니다. 그러나 은사는 은사일 뿐입니다. 은사는 사람을 바꾸어 놓지 못하며 다만 그가 잘 섬길 수 있도록 도구로 받은 것입니다. 은사는 우리를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만, 은혜는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해줍니다.
바로 고린도교회에 은사는 있지만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은사의 한계입니다. 은사는 두 가지 면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은사의 일시성의 한계입니다. 본문 8절의 폐지될 것이라는 종결의 시점이 언제인지를 놓고 은사중지론과 은사계속론, 중간입장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철저한 중지론자들은 사도 시대가 끝나는 지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사도 시대가 종결의 시점인 것은 지나친 해석이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재림하시고 우리가 모두 부활하여 마지막에 완성될 영화의 그날이라는 데에 보편적으로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고린도서의 방언이나 지금의 예언이나 계속될 것이니까 모든 것이 똑같은 권위를 갖고 살아 있는 것이라는 주장인데, 그것 또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은사들은 완전히 종결됐고 어떤 은사들은 직접적인 전달과 탁월성의 방식으로는 중단되었지만 그와 상응하는 은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비록 폐지의 시점이 완성이 되는 그날이라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유한한 일시성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날들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를 가르쳐 주는 탁월한 은사라 할지라도 영원한 흐름에서 보면 그 시간은 짧은 박막의 시간이며 그 시간 안에 모든 은사들도 종결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둘째는 은사의 수단성입니다. 은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히 세우기 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많은 문제들은 은사를 받은 사람이 은혜가 떨어졌을 때 교회에 심각한 위협으로 등장하게 될 때 생깁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에게 방언이 주어지면 방언 못하는 사람을 하찮게 여길 것입니다. 예언하는 자신을 예언 듣는 사람보다 우월하게 여길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이런 최악의 상황이 현실화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은사는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모두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III. 결론
하나님은 다윗에게 영적인 은혜와 하늘의 궁창에까지 미치는 여호와의 진리를 보도록 탁월한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은사를 사용하는 것은 은혜에 달린 것입니다. 그는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그것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지만 은혜에서 멀어지자 육욕을 위해 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은사는 수단에 불과한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교회에서 존중하는 탁월한 은사일지라도 사랑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충만하게 받아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야말로 모든 은사와도 바꿀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나라에서 우리가 할 일은 은사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 성령을 영원토록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나라에서도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모든 신령한 은사들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갈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탁월한 신령한 은사들조차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사랑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않는 영원한 가치를 갖는 것일까요?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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