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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에서 여전히 ‘일본 식민주의’가 프레임으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계기는 문창극 총리 지명자가 자진사퇴하기 전까지 공개된 ‘신의 뜻’ 같은 발언들과 그에 대한 정치권의 반응에서였다. 일본의 식민통치가 남긴 ‘흔적’은 흔적이 아니었다. 1953년 제3차 한일회담 당시 일본 측 수석대표 구보다 간이치로의 “일본의 조선통치는 조선인에게 은혜를 베푼 점이 있다”는 망언이나 1979년 사쿠라다 다케시 게이단렌 회장의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은 과거 일본 식민지 시대의 훌륭한 교육 덕분이다. 36년간의 일본 통치의 공적은 한국에 근대적인 교육제도, 행정조직, 군사제도를 심어준 데 있다”는 발언과 맥락을 같이하는 건 아닌가. 현기증이 났다.
그 ‘36년’의 일본 통치 과정에서 한국인의 의식 프레임에 ‘황국신민주의’가 영향을 끼친 것 아닐까. 일본 식민통치 당시에 유효했던 통치방식을 이후의 정치가 답습했기 때문이다. 지도자 천황에 대한 절대복종을 국민들이 내면화하도록 교육한 일본의 군인칙유(1882년)와 교육칙어(1890년)는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에 국민교육헌장(1968년)에 영향을 미쳤다. 만주국에서 일본이 실험한 중공업 중심의 전투적인 계획경제도 박정희 정권에서 재현됐다. 거대한 생명체인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각 개인의 소중한 삶이 한낱 부품으로 동원되는 국가 중심의 문화도 따지고 보면 일본 식민지배 당시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여성을 ‘성 자원’으로 파악하고 ‘수집, 관리’한 것도 국가주의적 사고였는데, 우리는 축구 경기 해설에서도 여전히 사람을 부품으로 여기는 것처럼 ‘투입’ ‘보강’ ‘교체’ 같은 표현을 쓴다. 정치제도는 민주화를 이뤘지만, 우리의 깊은 무의식에는 여전히 ‘그 무엇’이 남아 있다.
과거 남과 북이 지도자를 우상화하는 독재정권 체제를 쌍둥이처럼 유지했던 것도 어쩌면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의 정치 체제에서 그 프레임을 가져온 것은 아닐까. ‘최고존엄’을 비판하는 것은 순종적 국민들의 ‘미덕’이 아니라며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까지 닮았으니 말이다. 한국 사회가 “군대 갔다와야 사람 된다”는 헛된 만트라를 중얼거리는 것처럼 일본의 우익은 ‘사무라이 정신’을 통해서 일본이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오늘날 자위대에만이라도 참된 일본, 참된 일본인, 참된 무사의 정신이 남아 있기를 꿈꾸었다”며 할복한 일본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말처럼.
과거는 어떻게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하지만 비판적인 자기분석 없이는 한 사회는 과거의 프레임 안에 갇힐 수밖에 없다. 달력의 숫자가 매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순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새로운 ‘내일’을 사는 것은 나 개인, 그리고 한 사회의 의지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구시대의 식민지 유물을 내 안에서 떨쳐내지 못한다면, 결국 어떤 진정한 변화도 어려운 것은 아닐까. 거대한 숙제를 마주한 것만 같다.
<최민영 미디어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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