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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회의 또 한 가지 표지는 청(淸)인데,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이는 그저 ‘청소(淸掃)’를 가리킨다. 이로써 세계 최고의 청소황국(掃地皇國) 일본이나 정리정돈의 법국(法國) 독일이 내장한 파시스트적 불길함을 모른 체하려는 게 아니다. 적(寂)의 문화가 속을 비우는 삶의 양식에 기초한다면, 청(淸)의 문화는 바깥을 치우면서 빈터를 얻어가려는 노력을 말한다. 청소라는 게 비와 걸레 등을 활용하는 일체의 구체적이며 지속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것처럼, 빈터라는 것도 별 신통한 게 아니라 실제로 각자의 삶의 공간 속에서 몸으로 체감하는 여백과 공터를 가리킬 뿐이다. 공원(公園)이 아닌 공원(空園)이라거나 장식물들을 적극적으로 생략한 벽면이라거나 그저 깨끗할 뿐인 손톱 같은 것들, 말이다. 옛사람들이 청소를 일러 도(道)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철저하게 실천 속에서만 발아하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적(寂)이 한 사회가 채택할 수 있는 시간의 철학이라면, 청(淸)이란 장소의 철학이 된다.
내가 상상해온 좋은 사회의 표상 중 또 한 가지는 화(和), 즉 어울림의 협업 속에서 생겨난다. 시간과 장소를 종횡으로 누비며 인간들은 어울려, 혹은 버성기며 살아간다. 두말할 것도 없이 사회란 어울림의 지혜에 의해서 조금씩 나아진다. 적(寂)과 청(淸)은 태도나 양식의 일관됨을 말할 뿐(하지만 이 시대의 유일한 미덕이라면 일관성이 아니고 무엇이랴!)이지만, 화(和)란 임기응변의 역동적인 지혜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만드는 세속사회의 알속을 구성한다. 무릇 인문학 공부라는 게 바로 이 어울림의 지혜를 지향한다는 점은 너무나 당연할 수밖에 없다. 아니, 지혜라는 것 자체가 어울림의 산물이며, 어울림을 위한 것이고, 또 어울림에 의해 나날이 조율, 개선되는 것이다. 그 흔한 표어인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경우, 이는 관용과 평화의 기반이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삶의 지혜를 낳는 밑절미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산중이나 골방이 아니라 잡다한 어울림에 터한 지혜는 관용처럼 안이하지 않고 평화처럼 안돈스럽지 않다. 차라리 지혜는 오해받는 일이며, 박해받는 일이고, 내내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좋은 사회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마지막 꿈은 경(敬)이다. 경이란 앞서 말한 적, 청, 화에다가 무엇인가 낯설고 명백한 무엇을 더하는 게 아니다. 속을 비우고 겉을 치우면서, 내남없이 어울려 살아가는 지혜로써 삶의 길을 밝히면 자연스레 솟아나는 것, 피어오르는 것, 어느새 떠올라 있는 것, 그리고 아침이슬처럼 맺히는 것일 뿐이다. 어떤 삶의 역사가 있을 때에만 은근하게 드러나는 어떤 얼굴 같은 것이라고 해도 좋다. 예를 들어 밤 10시를 넘겨서야 겨우 해가 떨어지는 지중해 연안의 과일에서 은근히 드러나는 햇빛-표정처럼 경(敬)은 한 사회가 담고 있는 긴 세월의 표정인 것이다.
적청화경이라는 것은 당연히 사회철학에 이르지 못한다. 논의의 초점을 잃은 채 개인들의 수행과 성숙에 방점을 찍은 상상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상을 양보하지 않는 일은 사회와 공동체를 착각하고 공적 틀거리를 사적으로 희석하려는 짓이 아니다. 가능한 모든 것이 타락하였을 때에는 불가능한 것을 고집하는 게 삶의 변명이기 때문이다.
<김영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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