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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1:14-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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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4.6.18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권력을 지향하는 사회는 폭력이 난무한다.
눅11:14-23
권력을 가지면 좋은 일이 많다는 것을 본능처럼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언어를 습득하면서부터 그것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권력의 최정상에 오르지는 못하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질주하며 어느 만큼은 그것을 얻습니다.
그런데 권력은 그 속성상 ‘폭력’을 필연적으로 내재하고 있습니다. 통치자들은 사회 대다수의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권력이 얼마나 자애로운지 또는 효용성이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지금 그 드라마가 끝났는지 모르겠지만, 태조 이성계 드라마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드라마를 이루고 있는 구성도 ‘권력’입니다. 그걸 보면서 이 시대의 정치도 과거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을 인식하게 되고요. 그런데 정몽주처럼 권력에 동의하지 않을 때가 있죠. 그러면 권력은 가차 없이 그에게 폭행을 가합니다. 그렇다고 권력의 폭력적인 속성이 권력에 저항하는 이에게만 대항을 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권력은 항상 폭력의 대상을 찾아 배고픈 하이에나 같은 것입니다. .
사회가 이렇게 권력을 지향하고 있으면 폭력은 일상이 됩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온갖 폭력이 다양하게 존재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권력지향적인 사회라는 방증입니다. 어떤 경우 폭력은 상냥한 얼굴로 포장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른바 달콤한 폭력입니다. 아마 교회에도 ‘은폐된 폭력’이거나 ‘달콤한 폭력’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달콤한 폭력이나 쓴 폭력이나’를 막론하고 폭력을 당하는 사람은 그게 차곡차곡 쌓이게 됩니다.
그렇게 폭력이 쌓이다가 발산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희생양’입니다. 달콤한 권력의 하수인인 동시에 자기도 권력의 주체가 되고 싶어 하기 때문에 호시탐탐 ‘내 권력을 받아 줄 만만한 존재’를 늘 물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만만한 대상이 포착되면 감춰뒀던, 그동안 당하고만 살던 자신의 폭력성을 끄집어내서 야수처럼 돌변하여 다른 대상을 공격해댑니다. 교회에서도 갈등이 발생하면 얌전하게 기도만 하던 사람들이 쌍권총을 찬 황야의 무법자가 되는 걸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그때 희생양의 대상이 반응하면 더욱 크게 눈을 부릅뜨고 공격을 합니다. 이렇게 온갖 층층의 권력이 가지고 있는 폭력의 내재성을 모두 다 받아 줘야 하는 사람들이 사회 안에 존재합니다. 폭력성의 노리갯감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대체적으로 극심하게 가난하거나, 신체적인 장애를 갖고 있는 정상적이지 않는 분들이 그런 계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세상에서 ‘배제된 사람들’입니다. 세상 밖으로 쫓겨난 이들에게 가해지는 사회적인 폭력은 누구도 눈치 채기 어렵습니다. 또 때로는 그걸 눈치 챈다고 해도 은밀하게 폭력을 당하는 그 사람의 아픔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세월호 참사에서 희생당한 학생들을 두고 어느 권력을 가진 목사가 말했다는 겁니다.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가지 배를 타고 가니 그런 일이 생기는 거 아니냐.” 이런 게 폭력입니다. 돈 조금 덜 가진 사람을 깔아뭉개고 멸시하는 감정과 언어의 폭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천연덕스럽게 지껄입니다. 그걸 듣고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릅니다. 폭력이라고 느끼지 않는 것도 일종에 무의식의 동조입니다. 간접적인 폭력인 것입니다.
이렇게 권력-희생양-폭력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권력 메커니즘에 관한 일들은 예수시대라고 예외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텍스트는 이러한 권력의 폭력 상황에 대해서 예수가 어떻게 반응했으며, 우리에게 어떻게 반응 할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실어증 걸리게 하는 마귀를 내쫓았습니다. 그러자 그 악령 들렸던 사람은 다시 말하게 되죠. 사람들이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충격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서가 지시하는 게 그게 전부인가요? 그걸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문맥을 보세요. 사람들에게 시기심이 작동했다는 겁니다. “저이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내 쫓는다”고 비아냥거리는 겁니다. ‘바알세불’이란 ‘바알’과 ‘세불’의 합성어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그 풍요의 신 ‘바알’이 그 ‘바알’입니다. ‘소유자, 주인’이라는 뜻이죠. ‘세불’은 ‘집’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바알세불’은 ‘집을 가진 자의 주인’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말하길, 실어증이 걸린 자를 ‘바알세불’의 힘으로 쫓아낸다고 하는 것이니 악령은 ‘집을 소유한 자’와 연관이 있는 겁니다. ‘집을 소유한 자’는 누구입니까? 과거에는 왕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자산가이며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들의 신이 바로 ‘바알세불’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 속에 함축된 계층적 갈등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알 신앙에 대항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에, 바알세불을 악령과 동일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는 모습은 정반대로 하나님을 마치 바알세불인양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알세불을 운운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저주의 욕지거리임에도, 실상 그들의 삶은 바알세불의 가치관에 매여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런 가치에 매여 있으면서도 바알세불의 가치에 저항하는 사람을 향해 ‘바알세불 같은 놈’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교회서 배울 때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늘나라의 모형이라 쓸모가 없다’고 배우면서 정작 살기로는 그 ‘쓸모없는 것을 위해 죽자 사자 하는’그런 것이라고나 할까요. 또 그렇게 살면서 그렇게 사는 사람을 보면 비난해대는 그런 형국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 ‘바알세불’의 가치란 바로 물질적인, 맘몬의 세계관 즉, ‘집을 가진 자의’세계관에 기초한 것입니다.
이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마가복음에는 ‘예루살렘에서 온 상류층 율법학자’라고 하고, 마태복음에는 ‘바리사이들’즉 종교엘리트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군중’들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평소에 적대시했던 무리들이 아닙니다. 일반 대중들이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예수를 비난했다는 겁니다. 왕궁이나 대저택의 소유자, 노예를 거느린 권력의 사람들뿐만이 아니라, ‘작은 집’을 가진 보통의 사람들도 예수의 행동에 비난을 퍼붓고 있는 겁니다. 통념의 노예가 되어서 말이죠.
그렇다면 누가복음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걸까요? ‘실어증 걸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그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그를 그렇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바알세불’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삶이 소유’라는 가치의 기성의 세계관, 기성의 통념으로부터 배제된 사람입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중앙의 율법사)로부터 온갖 폭행을 당하고, 그 밑에 권력을 가진(바리사이)이들에게서는 증오, 한풀이의 대상이었던, 그야말로 개똥밭에 구르는 썩은 참외 같은 인생들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것은 단지 그가 말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장애자들을 향해 당시의 세상은 “네 죄를 알렸다!”고 다그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회의 온갖 멸시와 냉대, 심지어는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는 항변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온갖 폭력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폭력을 받아내며 실어증 걸린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겁니다. 가진 사람들의 분풀이 대상으로 그렇게 못난 사람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이 이야기는 폭력으로 가득합니다. 악령에 의해 구속되어 말 못하도록 강제된 사람이 있고, 악령을 내 쫓는 이도 있습니다. 또 그것에 극언을 서슴지 않으며 힐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습니까?
“악령끼리 싸운다는 게 말이 되냐. 나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그들을 내 쫓는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힘센 사람이 무장하고 자기 궁전을 지키는 동안 그의 소유는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사람이 덮쳐 와서 그를 무찌르면, 그가 의지했던 무기를 모조리 빼앗고 전리품을 나눠준다. 나와 함께 있지 않은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것이며,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흩어 버리는 것이다.”
벙어리는 폭력사회가 가하고 있는 온갖 고문을 한 몸으로 받고 살던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분위기, 폭력적 분위기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희생양이던 그를 고쳐준 것입니다. 사회의 통념에 따라 저주의 대상이던 그를 해방시킨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겁니다. 권력 속에 감춰진 폭력을 행사할, 실행할, 연습할 대상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에게 비난을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악령의 논리로, 악령의 세계를 정의로운 사회로 바꾸려 한다는 너희의 말은 틀렸다. 그것은 바알세불의 논리다. 나는 그것으로 바알세불과 싸우지 않는다. 내가 싸우는 것은 바알세불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다. 모든 희생양들의 고통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게 “악령이 악령을 내 쫓는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도전과제를 주고 있습니다. 바알세불을 따를 것인지 하나님을 따를 것인지 둘 중에 하나를 정하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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