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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비유는 '수수께끼'입니다.

마태복음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192 추천 수 0 2014.07.08 15:4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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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25:14-3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2014.6.25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성서의 비유는 [수수께끼]입니다.  
마25:14-30





성서에 나오는 비유가 쉽다는 이들도 있고 어렵다는 이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설교자의 의도를 간파하셨다면 아마도 ‘어렵다’고 답을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어렵다기 보다는 [수수께끼]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이제 마태복음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이솝우화라는 게 있습니다. 거기에 ‘개미와 베짱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내용은 대략, 부지런한 개미와 게으른 베짱이를 말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대조법’이라고 합니다. 어떤 논지를 대 보는 겁니다. 이런 대조법으로 ‘개미와 베짱이’를 보면 그 결론이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라’가 됩니다.  

그런데 어떤 동화 작가가 이 이야기를 개작을 해서 ‘여치와 개미’라는 작품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작가는 여치를 예술가로, 개미를 돈만 아는 욕심쟁이로 묘사를 합니다. 개미는 여치를 늘 업신여깁니다. 무위도식하는 놈이라는 거죠. 한 겨울 추위에 굶주리던 여치는 개미에게 구걸하러 가는 대신에 ‘내 영혼을 돈에 팔 수 없다’고 하면서 굶어 죽습니다.

이솝의 이야기처럼 대조법을 빗겨서면 이야기는 한층 어렵게 됩니다. 이쯤 되면 ‘개미와 여치’이야기는 ‘게으름과 부지런함’의 비유가 아니라 [수수께끼]가 되는 겁니다. 성서의 비유가 바로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서에 등장하는 비유를 대조법으로 간단하게 ‘이쪽이냐 저쪽이냐’로 구분하여 누구에게나 적용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실로 얄팍하기 그지없는 태도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모든 이야기가 선명하게, 간단하게 전해지는 법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달되면서 점점 수수께끼처럼 변해 가는 것입니다. 확장되기도 하고, 뒤틀리기도 하고, 복잡해진 상태로 우리 앞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 ‘달란트의 비유’라고 제목을 붙인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서 네 개의 비유 묶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24:1-2/경계의 말(인자가 올 때까지 준비하라)
24:45-51/신실한 종과 신실하지 않은 종의 비유/주인
25:1-13/열 처녀의 비유/신랑
25:14-30/달란트 비유/주인
25:31-46/얀과 염소의 비유/인자
26:1-2/예고의 말(나 이제 죽으러 간다)

오늘 우리가 보았던 달란트 비유는 네 개가 비유가 일렬로 서 있는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비유들 앞에 나오는 24:44은 ‘경계의 말’이고, 비유 끝에 나오는 26:1-2절은 예고의 말입니다. ‘인자가 올 때까지 준비하라’는 것이 예고편이고, ‘인자는 이제 죽으러 간다’는 것이 마지막 말입니다. 이 모든 말들은 예수님이 직접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들입니다.

그러므로 ‘경계의 말’과 ‘예고의 말’로 이어진 전체를 볼 진데 이 비유는 ‘예수님이 재림 할 때까지 신앙을 굳기 지키라’는 권고인 것입니다. 이게 마태복음 25,25장에 나오는 네 개의 비유가 주고자 하는 실질적인 교훈입니다. 마태복음 안에서 말이죠.

이 비유들은 모두 대조되는 두 부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부류의 주재자는 일시적으로 그들을 떠났다가 훗날 귀환하게 된다는 상황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부재자의 부재중에 어떻게 대처했느냐(살았느냐)에 따라 축복과 저주가 엇갈리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네 개의 비유가 모두 그렇게 전개되고 끝납니다. 이것은 유사한 네 개의 비유들을 복음서를 쓰는 저자가(마태)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신앙을 지키는 신자들을 위한 격려와 권고의 뜻으로 묶어 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원래 예수님의 비유를 저자는 이런 목적으로 개작을 한 것입니다. 바로 이 개작 과정에서 이야기의 수수께끼화가 불가피하게 된 것입니다.

원래 이 비유들은 각기 다른 상황에서 발설되었던 것들입니다. 경계도 없고 예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에서 말하고자 하는 비유의 의도 말고 예수님이 맨 처음에 하셨던 비유의 의도는 뭘까요? 마태복음의 비유 내용 속에서 그걸 추론해 봅시다. 물론 개작을 한다고 하더라도 원형이 그 속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본래 비유를 통해서 누군가를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축복 보다는 저주 쪽에 무게를 둔 것하며, 저주의 어투가 단호하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이런 것을 마태는 그 대상을 제자와 신자들로 바꾼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상을 세 부류(달란트를 받는 세 종류의 사람)로 실제화 했습니다.  

그 종들이 받은 달란트, 즉 위임받은 사명의 크기를 다르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서로를 잘 알고 있는 공동체 내에서, 어떤 이는 한결 신실하고, 어떤 이는 그만그만하고, 다른 어떤 이는 불충한 상태에서(누구나 그렇게 알 수 있는)단순하게 대조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서 세 부류는 다시 두 부류로 줄어듭니다. 받은 재화를 남긴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말이죠. 그러니까 이 비유는 본래 두 종류의 인간을 대조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으나 삶의 다양성을 따라 세 부류로 나뉘었다가 전개 과정에서 다시 두 부류로 정리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한 주인과 세 명의 종들이 관계하고 있는데, 세 번째 종은 앞의 두 종과는 다른 대화와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비유의 강조점이 이 마지막 종에게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맡은 달란트를 남긴 앞의 두 부류는 물론 축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맡은 달란트를 남기지 못한, 땅 속에 묻어 두었던 종은 저주를 받습니다. 여기서 성서를 읽는 관점은 ‘달란트’가 과연 뭐냐 하는 것도 아니고, ‘남긴다’는 게 어떤 의미냐 하는 것도 압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저주받은 종이 실제로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원초적인 묘사는 ‘하늘나라’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걸 염두에 두고 재산에 대한 두 그룹, 남긴 자들과 남기지 못한 자를 보아야 합니다. 두 부류의 행위가 오로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가운데서 진행되는 행위라면 이것은 단지 상행위거나 이윤에 관한 문제는 아닙니다. 주인의 축복과 저주는 각자의 행위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활용태도, 사는 방식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활용’과 ‘묻어둠’이라는 위탁된 재물에 대한 종들의 태도가 주안점이 되는 것입니다.

자, 이제 하나님 나라의 재물을 활용한다는 게 뭔지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갇힌 사람들을 향해 설파된 구원의 메시지 내용입니다. 바로 이 메시지, 그리고 그러한 실천을 하는 것, 바로 이게 주어진 달란트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려 볼까요? 달란트의 비유가 주는 본래의 예수님 생각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가난하고, 병들고, 갇힌(사회의 하층민 또는 버림받은 대상들)사람들을 위해 돌보고, 나누고, 위로하며 함께 살라고 여러 기능을 주었지만 그렇게 살았던 사람과 그렇게 살지 않았던 사람의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축복과 저주의 갈림이 되는 것입니다. ‘남겼다’는 것은 그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살아서 하나님 나라가 되는데 일조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땅에 묻어 두었다는 ‘은폐’또는 ‘독점’을 의미합니다. 자기만 독점하여 누리겠다는 것입니다.  

중세교회의 권력자들은 주의 영광이 ‘속된’사람들의 입에 의해 훼손이 된다고 해서 성서의 번역을 금지했습니다. 그리고는 대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 예전을 행하고 설교했습니다. 여기 이 높은 단(예배당의 강대상)도 그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성직자 외에는 올라 올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세상은 단지 악한 존재와 선한 존재가 싸운다는 대조법으로만 이해하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힘없는 존재들은 무조건 악한 부류의 사람들이었고, 이들에게는 누구도 하나님나라의 사람이 되는 길을 안내하지 않았습니다. 힘 있는 자, 권력을 가진 자는 착한 사람이고, 힘없으면 모두 악한 존재들이며 이들은 구원의 여지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진리도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는 은폐된 것이었습니다. 금기의 영역에 있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모든 진리는 거룩한, 힘 있는, 권력자의 것이었습니다. 진리는 이런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는 것이고, 속된 사람들은 진리를 가질 권리조차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주고 죄를 사한다고 했을 때, 성전제사가 요한시대에 없어져서가 아닙니다. 당시의 성전 제사는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처럼 거대하고 거국적으로 치러지고 있던 시대입니다. 월드컵이 평화의 제전이라면 해마다 열리는 이들의 성전제사는 죄 사함의 제전이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대로라면, 세례요한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한, 약해서 악하다고 버려진 이들을 위해 일함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도록 한, 달란트를 많이 남긴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례요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권력자들만의 언어가 된 핼라어 통용사회에서 가난뱅이들만 사용하는 아람어를 쓰면서 독점된 종교권력에 대항을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 근대사도 ‘영어’를 쓸 줄 아는 사람에 의해 정치 경제가 독점되었던 것이 사실이고, 지금도 언어는 권력과 신분을 규정하는 잣대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권력은 모두 헬라어를 쓰고 있었고, 가난뱅이들과 힘없는 버려진 사람들은 모두 아람어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언어 까지도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에 활용하신 것입니다. 그게 그분의 아람어 사용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잘난 사람들이 격식을 갖추고 경건하게 처신하는 것을 대항하여 더러운 사람들-세리, 창녀, 병자들과 같이 어울리며 먹고 마셨던 것입니다. 이 또한 그에게 주어진 달란트의 활용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나라를 향한 목적을 향해서 말입니다.

비유에서 저주받은 종이 항변을 하죠. 이게 무슨 뜻인지 하십니까? 아무나 거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못난이들에게까지 하나님의 거룩함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병신들까지 하나님의 거룩을 차지했다고 하는 망동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사람만의 몫이라는 뜻입니다. 달란트를 받아서 뻔히 알면서도 그걸 땅에 숨겨두고 항변하는 이들의 속셈이 보이십니까? ‘나만 잘 살아 보겠다. 혹은 하나님은 내 차지’라는 독점 때문입니다. 그게 힘 있는 자들이 했던 처신입니다. 예수님은 그걸 깨부수신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그들을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축복받은 종들을 보세요. 그들은 그것을 수중에 장악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거룩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나도 거룩하니 너도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시장의 논리를 빗대어 거룩/진리를 장악하고도 모든 이들과의 접촉을 막는 사고, 신앙 정신, 그런 종교 권력의 주역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임받은 달란트를 남긴다는 말은, 온갖 좋은 것을 독자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누리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걸 위해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온갖 재산, 이성, 지식, 권력을 다른 사람들, 특히 못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도록 써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과 진리는 누구만의 독점이 될 수 없습니다. 모두에게 폭로되고 공유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는 각자 달란트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써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축복의 사람인 것입니다. 달란트를 남긴 사람입니다.

이것이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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