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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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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집필실에서 서울 본가까지는 차가 밀리지 않을 때 승용차로 보통 2시간 조금 넘게 걸린다. 전장이 180킬로미터쯤 된다. 지난 가을엔 태안반도 천리포수목원에 갈 일이 있었는데 차가 밀리지 않았으나 그곳까지 대략 2시간30분여가 소요되었다. 같은 충남이고 거리도 더 가까운데 서울보다 오히려 더 오래 걸렸다. 몇 년 전 완공된 당진-대전간 고속도로가 없었으면 아마 4시간 이상 걸렸을 것이다.
지역 안에서도 형편은 다르지 않다. 모든 도로는 한결같이 행정소재지를 향해 뚫려 있다. 대도시와 대도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가 최우선이다. 이는 내 집 앞-이웃 마을을 잇는 도로 포장사업부터 시행했다고 알려진 대만과 비교된다. 이웃마을에 가는 것보다 소재지에 가는 게 훨씬 더 빠른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게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풍경이다. ‘박정희식’ 빠른 성장을 성취한 개발 이데올로기의 본색이 그렇다. 비유컨대, 모든 문화-존재에게 무차별로 서열을 메겨 ‘중심’이라 부르는 것들에게 종(從)으로 줄 세우는 한편, 횡(橫)으로 연대를 이루어야 할 이웃 공동체는 낱낱이 나누고 갈라서 팽개침으로써 계속 ‘중심-중앙’에게 복종하도록 가르친 과정에서 생긴 부산물이 바로 우리의 ‘성장’이라는 것이다. 반인간적 반문화적 성장의 결과는 공동체의 완전한 해체-결절이며, 또 결과는 당연히 행복지수의 답보-추락이다. 90년대 초반보다 GDP가 세 배나 성장했는데 국민행복지수(GNH)는 거의 똑같은 수준이라는 통계가 그것을 증명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런 질문과 마주친다.
행복해질 수 없다면 왜 돈은 벌어야 하는가.
아무리 일해도 부자가 될뿐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일을 당장 그만두어야 옳다. 국가가 우리에게 열심히 일하라고 권면하는 건 단지 GDP를 올려 세계에서 몇 번째 ‘경제대국’이라는 허세와 권위를 위한 속임수일는지 모른다. 앞으로도 ‘경제대국’의 덕은 몇몇 권력자나 몇몇 재벌가에게 대부분 편입될 게 뻔하고,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 일할 뿐 앞으로도 행복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화를 향한 글로벌 경제의 최종지향이 그렇다. ‘복지’라는 말이 있지만 그 역시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돌보는 사람이 없는 독거노인에겐 평균적으로 3~4명의 장성한 자식이 있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늙은 부모를 팽개친 그 자식들에게 일찍이 부모보다 돈이 더 소중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결사적으로 가르친 것도 글로벌경제체제와 그 추종자들이다. 야수적인 노동력으로 기적의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그들 앞에서 20만 원을 준다는 둥, 10만 원을 준다는 둥 갈팡질팡, 생색을 내는 것 자체가 낯부끄럽다. 20만 원을 다 나누어 주어도 생활비로는 어림없다. 앞으로 노인문제는 더 악화될 것이고 국가는 그로인해 고통 받을 게 확실하다. 3~4명이나 되는 자식들의 반만이라도 부모를 돌보는 사람으로 길러냈다면 국가가 훨씬 평안했을 것이다. 돈-행복의 등식으로 유혹해 자식들을 부모로부터 떼어놓은 국가가 받아야할 당연한 앙갚음이다. 노인문제만 그렇겠는가. 앞으로 국가의 ‘참화’가 될지도 모르는 ‘복지’야말로 중심-지역, 부자-빈자, 보수-진보 등으로 한사코 나누면서 공동체를 깡그리 부수어온 글로벌경제체제-그 추종자들이 스스로 불러온 것이다. 그들은 오늘도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채 생산성의 무한추구밖에 관심이 없다. 생산성의 제고만이 그들에게 ‘떡고물’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른바 ‘관피아’ ‘철피아’ ‘해피아’라고 말해지는 것들의 실체이기도 하다.
두 번이나 낙마사태를 겪은 뒤 ‘세월호’ 책임을 지고 그만두기로 기정사실화된 총리를 유임시킨다는 발표를 접했을 때 국민의 한사람으로 나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세월호참사의 가장 참담한 절정이었다. 과장해 비유컨대, ‘너희들이 계속 시비를 걸면 다른 세월호도 실종시켜 버릴 거야!’라는 말이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여전히 11명이나 되는 사람이 바다 밑에 남아 있지만, 여전히 수많은 어버이들의 사랑이 폭풍우 속의 바다 밑에 내려가 있지만, 정부의 ‘책임’은 완전 실종되고 남은 것은 정적들 간의 전략적인 ‘밀당’뿐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깨닫는다.
모든 제자들은 청출어람하고 모든 자식들은 부모의 협소한 도량을 넘어서야 세상의 앞날이 환해진다. 우리의 국민행복지수는 글로벌경제체제의 그 전략에 여전히 저당 잡혀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일시적인 지도자의 눈물이 아니라 우리가 이마를 기대고 울어야 할 넓은 품이다. 굳센 신념에 따른 넓은 품이야말로 민주사회의 참된 지도력일 터이다. 모든 제자-자식들이 압축성장의 신화를 써온 아버지 세대의 전략을 극복하기는커녕 더 옹졸하게 그 가치 그 전략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그리하여 오로지 ‘적’들을 쓰러뜨리고나가 나 홀로 정상에서 있고자 한다면 우리는 계속 고단하게 살수밖에 없다.
GDP로 집약되는 가치에 온 국민이 열광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치집단들의 자의식이 부른 호가호위(狐假虎威)에 불과하다. 그 호가호위가 오늘도 우리를 긍정적인 삶의 자리에서 부정적이며 자학적인 삶의 자리로 내려가도록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다. 생명은 수평적 유대의 에너지를 먹고 자란다. 진도앞바다에서, 밀양에서, 제주에서, 평택에서, 또 어디어디에서 나는 오늘도 수평적 유대를 죽이는 국가적인 ‘폭력’을 매일 본다. 가슴이 찢어진다. 단지 폭력에 당하는 자들에게 대한 인간주의적 연민 때문만이 아니라, 나와 내 이웃들, 그리고 다음 세대를 이어갈 그 자식들에게도 그만큼 희망의 싹이 잘리는 것을 매일 보고 느끼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제체제의 명령에 순응적으로 살아오다가 우리 모두는 어느덧 돈 때문에 우리 자신을 착취하는 자학적인 삶의 방식에까지 이르렀다. 생산성으로 포장된, 우리에 의한 우리 자신에의 착취를 그만둬야한다고 가르치는 품 넓은 지도자-지도력이 진정 그립다.
<박범신 | 소설가>
행복해질 수 없다면 왜 돈은 벌어야 하는가.
아무리 일해도 부자가 될뿐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일을 당장 그만두어야 옳다. 국가가 우리에게 열심히 일하라고 권면하는 건 단지 GDP를 올려 세계에서 몇 번째 ‘경제대국’이라는 허세와 권위를 위한 속임수일는지 모른다. 앞으로도 ‘경제대국’의 덕은 몇몇 권력자나 몇몇 재벌가에게 대부분 편입될 게 뻔하고, 그렇다면 우리는 계속 일할 뿐 앞으로도 행복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화를 향한 글로벌 경제의 최종지향이 그렇다. ‘복지’라는 말이 있지만 그 역시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돌보는 사람이 없는 독거노인에겐 평균적으로 3~4명의 장성한 자식이 있다는 통계를 본 적이 있다. 늙은 부모를 팽개친 그 자식들에게 일찍이 부모보다 돈이 더 소중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결사적으로 가르친 것도 글로벌경제체제와 그 추종자들이다. 야수적인 노동력으로 기적의 경제성장을 이루어낸 그들 앞에서 20만 원을 준다는 둥, 10만 원을 준다는 둥 갈팡질팡, 생색을 내는 것 자체가 낯부끄럽다. 20만 원을 다 나누어 주어도 생활비로는 어림없다. 앞으로 노인문제는 더 악화될 것이고 국가는 그로인해 고통 받을 게 확실하다. 3~4명이나 되는 자식들의 반만이라도 부모를 돌보는 사람으로 길러냈다면 국가가 훨씬 평안했을 것이다. 돈-행복의 등식으로 유혹해 자식들을 부모로부터 떼어놓은 국가가 받아야할 당연한 앙갚음이다. 노인문제만 그렇겠는가. 앞으로 국가의 ‘참화’가 될지도 모르는 ‘복지’야말로 중심-지역, 부자-빈자, 보수-진보 등으로 한사코 나누면서 공동체를 깡그리 부수어온 글로벌경제체제-그 추종자들이 스스로 불러온 것이다. 그들은 오늘도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채 생산성의 무한추구밖에 관심이 없다. 생산성의 제고만이 그들에게 ‘떡고물’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른바 ‘관피아’ ‘철피아’ ‘해피아’라고 말해지는 것들의 실체이기도 하다.
두 번이나 낙마사태를 겪은 뒤 ‘세월호’ 책임을 지고 그만두기로 기정사실화된 총리를 유임시킨다는 발표를 접했을 때 국민의 한사람으로 나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이것이야말로 세월호참사의 가장 참담한 절정이었다. 과장해 비유컨대, ‘너희들이 계속 시비를 걸면 다른 세월호도 실종시켜 버릴 거야!’라는 말이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여전히 11명이나 되는 사람이 바다 밑에 남아 있지만, 여전히 수많은 어버이들의 사랑이 폭풍우 속의 바다 밑에 내려가 있지만, 정부의 ‘책임’은 완전 실종되고 남은 것은 정적들 간의 전략적인 ‘밀당’뿐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깨닫는다.
모든 제자들은 청출어람하고 모든 자식들은 부모의 협소한 도량을 넘어서야 세상의 앞날이 환해진다. 우리의 국민행복지수는 글로벌경제체제의 그 전략에 여전히 저당 잡혀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일시적인 지도자의 눈물이 아니라 우리가 이마를 기대고 울어야 할 넓은 품이다. 굳센 신념에 따른 넓은 품이야말로 민주사회의 참된 지도력일 터이다. 모든 제자-자식들이 압축성장의 신화를 써온 아버지 세대의 전략을 극복하기는커녕 더 옹졸하게 그 가치 그 전략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그리하여 오로지 ‘적’들을 쓰러뜨리고나가 나 홀로 정상에서 있고자 한다면 우리는 계속 고단하게 살수밖에 없다.
GDP로 집약되는 가치에 온 국민이 열광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치집단들의 자의식이 부른 호가호위(狐假虎威)에 불과하다. 그 호가호위가 오늘도 우리를 긍정적인 삶의 자리에서 부정적이며 자학적인 삶의 자리로 내려가도록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다. 생명은 수평적 유대의 에너지를 먹고 자란다. 진도앞바다에서, 밀양에서, 제주에서, 평택에서, 또 어디어디에서 나는 오늘도 수평적 유대를 죽이는 국가적인 ‘폭력’을 매일 본다. 가슴이 찢어진다. 단지 폭력에 당하는 자들에게 대한 인간주의적 연민 때문만이 아니라, 나와 내 이웃들, 그리고 다음 세대를 이어갈 그 자식들에게도 그만큼 희망의 싹이 잘리는 것을 매일 보고 느끼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제체제의 명령에 순응적으로 살아오다가 우리 모두는 어느덧 돈 때문에 우리 자신을 착취하는 자학적인 삶의 방식에까지 이르렀다. 생산성으로 포장된, 우리에 의한 우리 자신에의 착취를 그만둬야한다고 가르치는 품 넓은 지도자-지도력이 진정 그립다.
<박범신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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