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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옳게 바르게 믿는다는 게 어떤 겁니까?

요나 궁극이............... 조회 수 989 추천 수 0 2014.07.11 10:4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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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욘1:1-10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2000년대 설교 

1장 1절-10절.

 

1절-10절: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여호와께서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 폭풍이 대작하여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된지라 사공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그들이 서로 이르되 자 우리가 제비를 뽑아 이 재앙이 누구로 인하여 우리에게 임하였나 알자 하고 곧 제비를 뽑으니 제비가 요나에게 당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고국이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기도: 저희들을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에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저희들이 지금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처럼 고아처럼 살고 있지만 마지막 그 날까지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세상 끝 날에는 하나님이 누리시고 다스리시고 하나님이 계시는 그곳을 우리에게 주시기로 기뻐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을 감사하옵나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좋아서 지금 이 시간에도 땅의 소원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서 희희낙락하며 살고 있지만 부족한 저희들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못난 저희들이지만 저희들은 하나님의 자녀인고로 예정된 시간 안에 저희들을 불러 모으셔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요 거룩한 말씀을 저희들에게 주시고 말씀 깨달음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은 죄인들이요 부족한 것도 많고 하나님 앞에 온전하지 못한 것, 추한 것도 많습니다. 이 시간에 능력 있고 생명 있는 그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하나님 당신처럼 온전케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사건 그대로 훑어 볼 때에 하나님을 믿는 이 요나 때문에 뱃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즉, 고생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요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만 배에 탄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를 않아요.

 

사람들은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기고, 산에 가면 돌부처를 섬기고, 큰 나무를 섬기고, 바다에 무슨 용왕이 있다고 해서 그런 신들을 믿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건 아니지요.

 

그런데 우주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바다와 육지와 하늘과 세상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바다에 바람을 일게 해가지고 배가 풍랑을 만나게 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오직 참 신은 하나님밖에 없는 것이고, 하나님 외에는 딴 것은 다 없는 신을 만들어 놓고 섬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믿는 신은 신이 아닌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서 전도를 좀 해라’ 하고 심부름을 시켰더니 하나님을 믿는 이 요나가 하나님을 피해가지고 그만 도망을 가버렸어요. 이래서 이제 딴 사람들까지 큰 고생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왜 패역성이 강한 요나를 불렀느냐? 그 때 당시 하나님의 심부름을 할 사람이 요나밖에 없었느냐? 요나보다 마음이 좋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하나님 말씀에 고분고분 순종을 잘하는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불러가지고 심부름을 시켰다면 이 배에 탄 사람들이 그 고생을 안 당할 터인데 왜 패역성이 강한 요나를 하나님이 불러서 뱃사람들은 고통을 당하게 하느냐?

 

하나님께서 이 요나를 왜 부른 것 같아요? 첫째는 니느웨 성 사람에게 전도하게 할 목적으로? 그러니까 전도를 하면 니느웨 성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벌을 안 받고 구원을 받을 테지요. 그러니까 ‘느니웨 성을 구원해 낼 목적으로 요나를 그곳에 보냈다’ 하는 그게 하나 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패역성이 강한 요나를 불러서 심부름을 시킨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도망을 가는, 제 고집대로 하는 패역성이 강한 것이 요나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전도하는 방편을 통해서 요나라고 하는 이 고집통이를 하나님 당신처럼 바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 어느 것이 정답이겠습니까? 문제는 비슷하지만 정답이 있어요.

 

‘예수님께서 무식하고 고집이 많고 세상만 바라보는 열두 제자들을 불러서 3년 동안이나 데리고 다니면서 일일이 가르치는 것은, 그리고 전도를 시키는 것은 예수님이 일거리는 많고 일손이 모자라기 때문에 열두 제자를 불러서 그 일을 시킨 것이다’ 라는 그게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열두 제자를 불러서 사도의 실력이 되게 하고, 주님 당신처럼 하나님 당신처럼 만들어가지고 하늘나라를 주기 위해서 그렇게 불렀다’ 하는 게 있어요. 첫째요, 둘째요? 아까 것과 비슷한 말입니다. 왜 대답을 안 해요? 두 번째지요.

 

말이 조금 다릅니다만 여러분들, 세상 법관 앞에서도 빤히 아는 걸 물어요. 쉬운 것을 묻고 빤히 아는 걸 묻는 건데, 그 때에 답을 하지 않으면 그게 죄로 인정되는 게 있어요. 그러니까 말할 때는 하고, 안 할 때는 안 하고 해야 합니다. 말도 안 되는 걸 물으면 그건 대답할 필요가 없지요.

 

하나님께서 고집통 패역성이 강한 이 요나를 부르는 것은 요나 속에 들어있는 패역성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요나 같은 우리를 깨닫게 해서 우리를 하나님 당신처럼 만들어 주기 위해서 부른 겁니다. 일의 순서가 그런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봉사 하는 게 그런 겁니다. 하나님 앞에 일꾼이 그런 겁니다. 사람 되지 못한 사람에게 일을 시켜놓으면 어떻게 되지요? 일이 잘 될까요, 그 속에 주관성이 강한 뿔이 돋아날까요? 뿔이 돋아나지요. 그게 다 이치입니다. 모든 교육의 이치입니다. 알겠어요?

 

그러면 일반적인 차원으로 많이 배운 사람은 전혀 안 배우고 무인도에나 섬에나 혼자서 먹고 마시고 살고 한 그런 사람보다도 생각하는 것이, 움직이는 것이 빠르지요? 그래요, 안 그래요? 사람의 말귀를 알아듣는 것이라든지 모든 마음의 움직임, 행동의 움직임 이게 빠르단 말이요. 신속하단 말이요.

 

그러면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것은 영적인 것인데, 우리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야 만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깨달아야 만이 영적인 면에 있어서 그 마음의 움직임이 신속하고 빠릅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의 뜻을 빨리 알아듣고,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서 빨리 갈 수가 있고, 하나님께서 어떤 분노의 눈을 가졌는지,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그걸 눈치 빠르게 알 수가 있고.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입은 사람이요,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인격이 민감해지고 예민해진다. 쉬운 말로 머리 돌아가는 게 빠르단 말이요. 생각하는 게 빠르단 말이요. ‘이게 하나님의 뜻이냐, 저걸 해야 하나님의 뜻이냐’ 하는 그 판단이 빠르단 말이요. 둔하질 않다 그 말이요.

 

제가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요? 둔한 것일수록 땅에서 살고, 더 둔한 것일수록 땅속에서 살고. 그렇지요? 영리한 것일수록 땅 밖에서 살고, 더 영리한 것일수록 머리는 위로 두고. 우리가 비교급으로 가만 보면 그렇다 그 말이요.

 

그래서 이 세상만물을 왜 지었느냐? 동물과 식물 돌은 왜 하나님이 만들었을까? 신앙의 깨달음으로 한 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건축자들에게 ‘돌을 왜 만들어 놓은 것이냐’고 물으면 왜 만들었다고 할까요? 건물 잘 지으라고 만든 것이라고 그럴 거란 말이요. 그러면 ‘좋은 나무를 왜 길러놨느냐’ 하고 목수에게 묻는다면 목수는 뭐라고 대답을 할까요? ‘가구 같은 거 잘 만들라고 난들어 놨다’ 그럴 거란 말이요. 그래서 그런 분야의 사람들은 돌을 보면 ‘이건 집지을 때 어디에 썼으면 좋겠다’ 하고, 목수들은 나무를 탁 보고 ‘이건 무엇에 썼으면 좋겠다. 무슨 장롱을 만들면 좋겠다’ 그러지요?

 

이처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직업에 맞춰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만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돌이나 나무나 만들었느냐’ 하고 묻는다면 신앙의 눈을 가지고 그걸 볼 때에 돌은 왜 만들었어요? 신앙적으로 대답을 해봐요. 돌은 왜 만들었어? ‘인간아, 너는 특수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제 1 목적물로 지음 받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자인 인간이니 네 머리통이 생각하는 게 이 돌멩이처럼 되지 말아라’ 그 말이요. 그래서 돌을 만들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깨달으라고. 그렇지요?

 

길거리에 있는 돌멩이나 산속에 묻혀있는 돌멩이를 인간이 다이너마이트를 집어 넣어가지고 쪼개서 그 돌이 생긴 대로 집을 지으면 되는 겁니까? 잣대를 가지고 척도를 재고, 반듯반듯하게 돌을 잘라야 만이 아주 좋은 집이 되어나간단 말이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척도야. 잣대대로 지어져.

 

우리 인간이 돌 같은 인간이 있어요, 없어요? 천날 만날 해도 깨닫지 못하는 그 머리통을 뭐라고 그래요? 석두. 그래, 참 이거 곰곰이 생각을 하면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얼마나 둔감하고 얼마나 못자라고 둔해 빠졌으면 석두라고 그럴까? 인간의 그 차원이 하나님처럼 올라가야 되는데 ‘머리가 돌덩어리다. 둔해 빠졌다’ 라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목적을 생각을 하고 볼 때에 그 인간 불쌍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불쌍한지! 개들도 보면 그런 인간들보다도 더 영리한 개가 있지요. 그렇지 않아요? 보고 깨달으라 그 말이요.

 

우리 인간이 사람을 못 알아보고, 하나님을 못 알아보고 미신을 섬기고, 돌을 저처럼 깎아서 세워놓고 거기다 절을 하는 이걸 생각을 해봐요. 이게 사람이 할 노릇이냐? 하나님께서 인간이 모든 우주만물을 이용하고 사용하고 활용하라고 만들어 놨는데 인간은 그 앞에 가서 복 달라고, 뭘 어떻게 해 달라고 빌고 있으니 하나님께서 분통이 안 터지겠느냐? 그래서 쓸어버리는 거요. 가치가 없다.

 

성경에 보면 그런 자를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고 했고,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런 자들에 대한 말씀인데 ‘새들아, 와서 고기를 뜯어 먹으라’ 그래요. 인격적인 측면에서 차원적으로 보면 인간은 참 고상한 인간인데 개나 돼지보다도 더 못한 그런 인간으로 살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또 우리가 세계적으로 가만 보면 노예로 사는 백성들도 있고, 정복당해서 사는 백성들도 있고 한데 그게 뭐요? 깨닫지를 못하고 실력이 없으니까 그런 일을 당한단 말이요. 그것도 우리에게 보여줘요.

 

인간이 정복을 당하면 참 비참해집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세상이라고 하는 세상에 정복을 당하면 즉, 무기로 정복을 당하든지, 행동적으로 힘으로 정복을 당하든지, 사상과 정신적으로 정복을 당하면 안 돼요. 정복을 당하면 개인적으로 비참해지는 거고, 가정적으로 비참해지는 거고, 국가적으로 비참해져요. 알겠어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승리자로 살아라. 정복자로 살아라. 능력자로 살아라’하는 겁니다. 그 원천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거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었으니 인간이 힘이 있고 없고 하는 걸 하나님께서 어련히 알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절대로 정복을 당하면 안 돼요.

 

우리가 한 세상에 살면서 언제부터 예수를 믿었던지 간, 그리고 태어나서부터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것이 없었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것을 받습니다. 그래서 현재적으로 살아오면서 자기는 몰랐지만 예수님을 믿고 보니,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받고 보니 내 속에 척도가 생겨. ‘아, 이건 나쁘구나, 이건 좋구나, 이건 선이구나, 이게 의이로구나’ 하는 척도가 생겨.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인 줄 알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일수록 더 신비롭고 더 고상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이거는 산 것이다. 이거는 죽은 것이다’ 하고 판단을 내릴 줄 아는 그런 지혜지식자가 되는 자기를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그저 다른 종교처럼 하나의 종교로 생각을 해요. 기독교를 일반적으로 차원으로 생각을 해 버려요. 이건 잘못 배운 거고, 잘못 깨달은 거고, 잘못 안 겁니다. 성경이라고 하는 건, 기독교라고 하는 건 그건 아니에요.

 

불교는 중국귀신이요? 그러면 한국귀신은 뭐요? 유교도 중국에서 나왔나? 중국귀신만 많네? 한국귀신은 뭐요? 도깨비냐? 자기 조상들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 거냐? ‘예수는 서양귀신이다’ 하며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런 게 아닙니다.

 

지구 한 복판에 예수님이 내려오신 것은 하나님의 도를 퍼뜨리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요.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저기 인도와 중국 사이의 산이 무슨 산이지? 에베레스트 산인가? 기독교가 그 산맥을 건너서 중국 대륙으로 들어와서, 북쪽으로 해서 한국으로 들어오지를 않았어요. 이탈리야로 해서 항구도시로 해가지고 대서양을 건너가서 일본을 건너와서 일본으로 해서 한국으로 기독교가 들어오게 된단 말이요. 도를 전하는 걸 보면 항구도시로 해서, 비행기로 해서 전부 다 문명도시로 퍼져나가지요. 그렇게 해서 한 바퀴 뱅 돌면 지구 끝이 될 테지요.

 

우리 신앙성도들은 자기가 언제 하나님 앞에 불림을 받았던지 간 영과 육이 결합이 되어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는 것입니다.

 

인간의 죽음이라고 하는 게 뭐냐? 인간 자기는 영과 육이 결합이 되어 있지요? 그런데 결합되어 있던 영과 육이 분리가 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그래요. 영과 육이 분리되는 게 죽음이고, 결합이 돼 있는 게 살아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영과 육이 결합이 되어있는 동안에 부지런히 하나님의 것으로 바꾸어 나가야 된다.

 

그러면 바꿔야 할 이유가 뭡니까?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원에 비하면 한 경점에 불과해요. 기독교 역사적으로 보면 지구의 나이가 6천 년이 되는 걸로 알고 있는데, 학교에서 배우는 지구의 나이는 몇 억억 만년이라고 그러지. 이게 뭐냐 하면 땅속에 파묻혀 있는 석탄을 기계적으로 재고 화학적으로 재서 거기서 1초 동안에 삭는 걸 100년으로 정해놓고 하는 그런 식으로 하는 거란 말이요. 성경대로 본다면 6천 년이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서 천년이 아니고 백년도 못 사는 거거든. 어쨌든 6천 년이라고 하는 지구의 나이도 영원에 비하면 한 경점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물질세계이지만 이 우주공간이 인간 편에서 볼 때 끝이 없어요. 끝이 없는 이 우주공간에 지구의 땅덩어리를 표시한다고 하면 공책에 점을 하나 딱 찍어놓는 것보다도 더 작은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무한을 말해주는 건데, 역시 인간은 백년도 못 사는데 이 백년을 영원에 비하면 숫제 눈에 안 보여. 그렇지요? 우리 인생은 고작 살아봐야 6, 70년인데 그 동안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서 부지런히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 것으로 바꾸어 나가야 된다.

 

6, 70년이 오래 사는 겁니까? 그렇지 않아요. 잠깐이요. 나이 많으신 분들, 아마 청소년 시절이 엊그제처럼 느껴질 거요. 생각을 하면 어제저녁에 꾼 꿈처럼 그렇게 느껴질 겁니다. 잠깐이요. 잠깐 동안에 이걸 빨리 바꿔야 된다. 바꾸는 그 자기가 영원 무궁세계에서 하나님과 같이 사는 것이다. 이게 실감 있게 느껴집니까? 어때요? 실감 있게 느껴져요?

 

여러분들, 안 믿는 사람들이야 6, 70년 안에 든 이해타산을 따지느라고 그냥 아옹다옹하고 싸우고, 속 썩고, 속 썩다가 안 되면 물에 빠져 죽고,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고 하지만 우리 기독자는 영원이 있어요. 그러니까 영원을 내다보는 그 눈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보면 잠깐이요. 금방 자나가요.

 

나이 많은 사람이 속 썩는 거 많이 있지요. 자기에게 오는 사건을 주관성에다 대놓고 생각을 하니까 속을 썩어. 저는 잔소리처럼 얘기합니다. 좋은 것을 봐도 그건 자나가는 거다. 나쁜 것을 봐도 그건 지나가는 거다. 세상만사는 다 지나가는 거다. 그러니까 지나가는 그거 붙잡고 속 썩일 필요가 없어. 깨달으면 돼. 거기서 깨닫고 가. 그러면 내 것이 되는 거요. 그게 고상한 인간이요. 내가 좋아하는 사건 환경이 지나가지 말라고 백날 붙들고 있어봐야 세월이 지나가니 그것도 지나가고, 나도 지나가고. 내 앞에서 지나가 버려.

 

세상은 교체되는 게 세상이다. 그러니까 세상 것 때문에 속 썩이지 말아요. 속 썩일 필요가 없다 그 말이요. 훨훨 털어버려. 지나간다. 그냥 털려니까 안 털리지? ‘아, 이것도 지나가는 거다’ 그렇게 생각해 버려요. 돈 많은 부자를 보더라도 ‘저것도 지나간다.’ 아무리 가난해도 ‘이것도 지나가는 거다.’ 결국 남은 것은 자기 속에 하나님의 성품과 마음으로 깨닫는 그것밖에 없어요.

 

그게 들어 있어야 안 얻어터지지. 그게 안 들어있으면 세상 물욕심이 잔뜩 들어있기 때문에 인간이 애당초 지음을 받기를 이치적으로 그렇게 되어졌어요. 세상 것을 자꾸 생각하면 그 사람 병들어요. 그러면 그 병 낫게 하려고 자꾸 약만 쓰지. 약을 쓰기 전에 마음부터 고쳐. 이게 이치입니다. 알겠어요?

 

약을 써서 육신은 고쳐졌다. 그러나 마음은 안 고쳐졌으니 그 병이 또 들어. 더 큰 병이 들 수도 있고. 사람 안 된 사람이 몸이 건강하니 죄는 더 지어. 그렇지 않아요? 차라리 아픈 대로 놔두는 게 낫지. 그래서 속에서 고통을 당하면서 깨달아져서 사람 되는 것이 더 귀하다 그 말이요. 하나님이 우리 사람을 만드는 게 그래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왜 풍파를 몰아 붙였어요? 풍파로 인해서 배가 막 까불려지기 시작하니 딴 사람까지 고통을 당하는데 하나님이 왜 그대로 내버려 둡니까?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바다를 잔잔케 만들어야지. 이치가 그렇지 않느냐 그 말이요.

 

오늘날 예수님을 사람들이 믿는 이치를 몰라요. 그러니 어찌하든지 하나님에게 기도해가지고 떼를 쓰는 거예요. 어린애들이 부모에게 떼를 쓰면 뭐를 해주듯이 자기 소원을 들어주길 바라면서 떼를 쓰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받는다고 한들 그건 사랑으로 해주는 게 아니지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이 하나님 앞에 잘만 보이면 될 거 아니냐 그 말이요.

 

그러면 뭐가 하나님 앞에 잘 보이는 거냐? 마음을 뜯어 고치는 거지.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인간 제 마음도 편할 거고 평화롭고, 하나님도 기뻐서 모든 걸 다 주려고 그럴 거고.

 

여러분들, 우리가 일반적인 면에서 한 번 깨달아 봅시다. 사람이 어디를 가든지 불평불만하고, 남의 흉이나 보고, 그저 우는 소리나 하면 그 사람이 이웃에라도 놀러 가면 사람들이 그 사람을 좋아합디까, 싫어합디까? 싫어합니다. 확실히 그렇습니까? 이치적으로 일반적으로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는 거 아니요?

 

반면에 가는 곳곳마다 좋은 말을 하고, 도와줄 사람이 있으면 형편대로 도와주고 한다면 일반적으로 볼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좋으냐 그 말이요. 그런 사람에게는 사람이 많이 따르고 다 좋아하지요? 또한 아닌 말로 그 사람이 어려울 때에 도와주는 사람도 있게 되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고 늘 거짓말이나 펑펑하고 울고 짜고 욕이나 발악 발악하고 그러면 있는 것도 안 줍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잘 보여야지요. 하나님의 마음을 쏙 빼닮는 이게 하나님 앞에 잘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타락된 기독교회가 ‘어찌하든지 예수님 덕으로 이 세상에서 잘 살아보자’ 하는 순 물욕적인 마음을 가지고 그냥. 하나님이 아마 가만 안 내버려둘 것 같아요.

 

사람 속에 최고의 고상한 것이 들어있어야 될 텐데 그저 물욕심만 들어있으니까 그 사람에게서 냄새가 얼마나 나겠어. 물욕심 많은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거의 보면 물욕심이 가득 들어있고, 특히 기독교가 더 해. 예수 믿는 사람이 더 해.

 

우리 믿는 사람은 둔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깨달아서 아주 민감해야 됩니다. 우리가 장차 하늘나라에 가서 그 하늘나라를 느끼지 못하면 소용이 없어요.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 느끼고 깨닫고 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어요. 하나라도 듣고 깨달아야지. 안 그렇습니까? 성경을 왜 줬어요? 깨달으라고 준 거고, 닮아지라고 준 거고. 그냥 손에 들고 다니라고 준 건 아니잖아요.

 

저도 그렇습니다. 이 성경이 하도 많이 봐서 낡아져서 뜯어져야 할 텐데 그게 아니라 성경이 뜯어진 게 믿는 사람이니 성경을 안 들고 다닐 수는 없고 해서 성경을  오랫동안 들고 다니다 보니 성경의 알맹이가 쏙 빠졌어. 그 다음에 요한계시록과 마태복음의 첫 장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네.

 

또 보면 성경을 함부로 해가지고 어린아이에게 줘가지고 성경이 다 찢어지고, 어떤 사람은 성경을 신처럼 해서 선반에 올려놓고는 읽지도 않고.

 

성경은 그런 게 아닙니다. 어찌하든지 하루 세 끼 밥을 먹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만이 자기에게 영력이 생기고 깨달음이 오고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 빨리 이해가 되고 그렇지요. 성경을 안 본 사람은 자기가 설교를 듣고서는 ‘하나님이 정말 계시느냐’ 하고 들어가면 그거는 말이 안 돼요. 대화를 할 수가 없어.

 

성경은 ‘하나님이 있다, 없다’ 그걸 말해주려고 하지를 않아요. 하나님이 계시는 걸 전제를 해놓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다’ 하는 것을 말해주는 거지요.

 

성도가 성경을 두고도 깨닫지를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사건을 줘. 그래서 먼저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으로 임했지.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말씀이 먼저 임했어. 오늘 이 시간에도 말씀이 임하는 것입니다. 요나와 같은 여러분들에게 말씀이 임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임했을 때 즉, 말로 해서 안 고치면 어떻게 되지요? 뭐가 날아오지요? 여러분들, 그거 일상생활에서 많이 경험하지요? 눈치 빠른 사람은 누가 무슨 행동을 하면 ‘무슨 뜻이지?’ 합니다. 그러면 상대는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해도 눈치 빠른 사람은 ‘뭐냐 뭐냐’ 하며 자꾸 꼬집어 물어서 알려고 그러지요.

 

그러나 둔한 사람은 ‘야, 이거 이렇게 좀 해 다오’ 그러면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멍청하게 있어. 그랬을 때에 나중에는 어떤 소리가 나가지? 처음에는 부드러운 소리가 나가다가 나중에는? ‘귀가 먹었느냐’ 하며 명령이 나가지.

 

그래, 명령을 해서 안 들을 때는 뭐가 날아가지? 예쁘다고 업어주고 쓰다듬어줘요, 몽둥이가 날아가요? 몽둥이가 날아가. 그렇지요?

 

하나님의 말씀에서 깨닫지를 못할 때에 사건을 주지요. 사건을 줘야 자극제가 돼. 말로 안 될 때 매를 대면 자극이 되지요. 자극이 되라고 하는 거지요. 사건이 와서 두들겨 패는 거지요. 그러면 이제 ‘아이고, 죽겠습니다’ 하며 발발 기어 나오지.

 

참 지금도 그런 인간이 굉장히 많아요. ‘분명히 저렇게 가다가는 얻어맞겠는데’ 하는 생각이 들게 행동을 합니다. 그런데 본인은 워낙 둔감해 놓으니까 그걸 몰라. 그렇게 해서 얻어맞으면 저만 아프지. 부모가 몽둥이를 가지고 자식을 때렸다면 고약한 자식 같으면 부모에게 덤벼들고 잡고 싸운다고 하겠지만 사건적으로 와서 그럴 때는 누굴 잡고 싸우겠어. 자기만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사건을 주고, 하나님의 종들을 주고, ‘그 가정이 어떤가 알아봐라’ 하고 집사들을 심부름을 시키고, 장로들을 심부름을 시키고, 목사님들을 보내고 하시는데, 집사 건, 평신도 건, 아니면 불신자 건, 아니면 목사 건 하나님이 보낸 종 같으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할 거라. 어쨌든 우리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야 된다. 하나님을 닮아야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에 제일 빨리 민감하게 돌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춤추고 술 먹고 늘 나무 밑에 가서 전축 같은 거 틀어놓고 니나노 하고 노는 사람일까? 하나님의 성품을 제일 많이 입은 사람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마음을 닮는 거,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이건 어떻게 해야 만이 되는 걸까? 어떻게 해야 빨리 입어질까? 기도를 많이 하면 됩니까?

 

믿는 사람들이 성령이 아닌 잡신을 어떻게나 많이 받는지? 그게 악신이야. 속은 새까만데 하나님보고 성령 달라고 그냥 금식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를 하고 산속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고 그러면 성령이 오겠어요, 악령이 오겠어요?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에 일치가 되는 것이 딱 들어가야 되는 건데 마음이 되어먹지 못해가지고 세상욕심만 속에 가득 들어 있어가지고 ‘예수님은 능력자니까 믿는 사람의 기도를 잘 들어준다’ 하면서 산속에 들어가서 기도를 많이 한단 말이요. 그러면 이 사람이 무슨 기도를 하겠어요? 기도의 내용이 뭐겠어요? 속에 세상이 가득한 사람이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보고 어떻게 해달라고 하겠어요? 그 기도의 내용이 뭘까?

 

공부 안 하는 학생이 대학시험 치면 붙게 해달라고 하는 그게 옳은 기도일까요, 공부 안 하는 자신의 마음부터 돌려달라는 그게 더 옳을까요? 그건 기도 많이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요. 금식기도 많이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회개를 자꾸 하면 되겠어요?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앞에 십일조 떼먹었습니다. 누구 미워했습니다. 나는 나쁜 사람입니다. 이제 용서해 주십시오’ 백날 그런 기도만 하면 자기 속이 하나님이 닮아집니까? 둠벙 안에 미꾸라지가 있는데 이 미꾸라지가 둠벙을 한 번 휙 하고 지나가면 구정물이 일어나지. 그럴 때 그 둠벙의 물만 자꾸 퍼내면 물이 깨끗해집니까? 미꾸라지를 잡아내야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게 이치지.

 

기도 많이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회개 많이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금식기도 많이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뭘 많이 해야 되겠어요? 뭘 해야 자기의 고약한 마음, 비뚤어진 마음, 더러운 생각 등 세상을 좋아하는 이런 모든 게 고쳐지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그 말씀에 순종을 하면 바로 되어 갑니다.

 

만들어지지 못하고서 뭘 달라고 그래놓으면 그건 성령이 오는 게 아니라 악령이 옵니다. 알겠어요? 안 믿는 사람들의 말을 빌린다면 그건 잡신 귀신이 들린단 말이요. 알겠어요? 예수 믿는 사람도 귀신이 들린다는 거 모르지? 여러분들은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성령 받은 걸로만 보이지? 여러분들은 귀신이 안 들어갈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악령을 받아가지고 자기는 성령의 능력이라고 할런지 모르지만, 일은 크게 많이 할런지 모르지만 뭘 못 입어요? 하나님의 성품은 입을 수가 없다. 입혀지지를 않아요. 알겠어요?

 

하늘나라에는 어떤 사람이 살겠어요? 이 세상에서 병자 많이 고친 사람이 능력이 있어요? 이 세상에서 병자를 못 고쳐도, 부자로 못 살았어도, 딴 일을 다 못했어도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정신을 많이 닮는 이 사람이 하늘나라에 가서 힘 있는 사람이야. 능력 있는 사람이야. 하늘나라에는 병자가 없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병자 고치는 그 능력을 가지고는 하늘나라에서 써먹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졌으면 그 말씀에 자원적 순종으로 나가는 이 사람이 잘 입혀진다.

 

성경 속에는 지시도 있고, 명령도 있고, 요구도 있고 다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무슨 지시를 하시든지, 무슨 요구를 하든지 이건 전부 다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 당신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까?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거지요? 못된 인간, 못난 인간, 어리석은 인간, 둔한 인간 우리, 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려고 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 하나님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에 순종을 하면 자기 구원이요, 자기 천국이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 아니라면 그거는 자기 절단 다 나버립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깨달음이 오면 순종이 돼야 되고, 안 오면 하지 말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의 주관성 패역성을 꺾어라 그 말이지요.

 

교회도 그래요. 바로 된 교회는요 목사가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가 없어요. 눈치 빠른 성도는 누가 말을 하기 전에 믿음을 가지고 자원적으로 하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그게 자기 구원이기 때문에. 그게 자기가 자라나는 방편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사랑받지요? 반면에 둔해빠진 사람에게는 무슨 사랑이 갑니까? 사랑 받을 짓은 자기가 하지 않더냐 그 말이요. 그러니까 자기가 순종을 하든지 말든지 그거는 누가 알아서 하는 거요? 자기가 알아서 하는 거요. 모를 때는 한 번 가르쳐 주는 거지만.

 

우리는 내 목숨이 정지되기 전에, 내 성한 몸이 병이 들기 전에, 내가 늙어서 꼬부라지기 전에 하나님의 성품을 입고 가야 된다. 이것이 예수 믿는 거다 그 말이요.

 

예수 믿는 게 뭐라고요? 가난한 사람도 할 수 있고, 부자도 할 수 있고, 어린아이도 할 수 있고, 나이 많은 사람도 할 수 있고, 못 배운 사람도 할 수 있고, 잘 배운 사람도 할 수 있는 이게 뭐지요?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것.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건 할 수 있고, 아무리 가난해도 그 일은 할 수 있고, 감옥 속에 들어가도 그 일은 할 수 있고, 아무리 부자라도 그 일은 할 수 있고. 그렇지 않아요? 이게 예수 잘 믿는 거다.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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