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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식의 결핍을 이야기한다. ‘도대체 기본적인 상식조차 통하지 않는 사회’라는 장탄식이 가장 그럴듯하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걸로 모자란다. 지배적 가치는 상식이란 말로 쉽게 둔갑한다. 누군가 네 편 내 편 가르는 분열이 아니라 ‘상식’이 ‘비상식’을 이기는 건전한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사실 그 말은 의미 없는 말이다. 비상식의 입장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상식은 없다. 지배적 담론이 있을 뿐. 상식은 편을 가르지 않으면 의미 없는 말이 된다. 개발이 누구에게는 국가 경제를 살리는 상식적인 원칙이지만 환경의 보존은 누구에게는 인류를 살리는 상식이다. 창의성이 누구에게는 인류의 결핍을 채우는 개인의 상상력에서 비롯된 무엇이지만 누구에게는 효율성과 이윤을 가져다주는 사회적 수단이자 방편이다. 그 어느 쪽 상식의 편을 들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일이다.
편을 가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편을 가르는 걸 금기시하려는 태도가 오히려 모순과 갈등을 지속시켜왔다. 그런 태도야말로 계급투쟁의 장을 형성하고 유발하면서도 집요하게 계급을 부정하려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들어 있다는 걸 감추는 일이다. 굳이 네 편 내 편을 가르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면 어느 편에서 편을 가르지 않는 사회를 꿈꾸는지를 먼저 말해야 한다. 어떤 편에 서서 그편의 지배적 가치를 실현하고 싶은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정치의 시작이다.
모든 편 가르기의 출발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것은 사회에서 상식과 보편으로 말해지는 가치를 개인의 가치와 분리시킴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즉각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단번에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이 사회가 분열되기를 바라는 거야? 맞다. 그 전에 분열은 지배적 가치를 고수하려는 집단이 소수의 가치를 배제하기 위해 늘 사용해온 용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이 사회에서 사는 게 괴로운 이유는 팍팍한 경제와 답답한 정치적 현실 때문이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지배적 가치를 수용할 수 없는 개인적 가치를 보존하고 정당하게 방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사회의 제도가 모든 개인을 포섭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모든 사회제도는 이미 철저하게 폭력적이다. 끝없이 소수자로 몰리며 폭력적인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는 사회 속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회로부터 분리된 섬으로 남는 것이다. 쓸쓸하고 외롭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섬들. 이 사회에는 스스로 분리되기 전에 고립되고 소외된 무수한 섬들이 이미 존재한다.
사회로부터 분리된 개인, 그건 강요된 선택이 아니라 필연적인 선택이어야 한다. 개인의 가치를 전면 내세우는 것이 사회와의 단절을 통한 내면으로의 회귀를 말하는, 개인적으로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회적으로 정치적 무관심, 사회적 이슈에 대한 외면으로 해석될 이유는 없다. 모든 위험한 추측과 의심스러운 회의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행동과 실천은 개인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쁜 체제에서 착한 체제로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진보의 희망적 전략이지만 그것이 시스템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좌절하는 것이 더 낫다. 절망하지 않은 곳에 희망은 없다. 그리고 미심쩍은 희망을 말하는 것보다 침묵이 더 낫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침묵하기의 방식을 선택한 개인에게 집단적 논리를 들이대며 ‘참여’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에 반대한다.
침묵은 새로운 상상을 낳을 것이다. 침묵의 상상은 개인의 가치를 사회 속에서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제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사회가 아닌 개인의 가치를 경험하는 일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김진송 | 목수·문화평론가>
모든 편 가르기의 출발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것은 사회에서 상식과 보편으로 말해지는 가치를 개인의 가치와 분리시킴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즉각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단번에 반발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이 사회가 분열되기를 바라는 거야? 맞다. 그 전에 분열은 지배적 가치를 고수하려는 집단이 소수의 가치를 배제하기 위해 늘 사용해온 용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이 사회에서 사는 게 괴로운 이유는 팍팍한 경제와 답답한 정치적 현실 때문이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지배적 가치를 수용할 수 없는 개인적 가치를 보존하고 정당하게 방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조차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를테면 사회의 제도가 모든 개인을 포섭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모든 사회제도는 이미 철저하게 폭력적이다. 끝없이 소수자로 몰리며 폭력적인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는 사회 속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회로부터 분리된 섬으로 남는 것이다. 쓸쓸하고 외롭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섬들. 이 사회에는 스스로 분리되기 전에 고립되고 소외된 무수한 섬들이 이미 존재한다.
사회로부터 분리된 개인, 그건 강요된 선택이 아니라 필연적인 선택이어야 한다. 개인의 가치를 전면 내세우는 것이 사회와의 단절을 통한 내면으로의 회귀를 말하는, 개인적으로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회적으로 정치적 무관심, 사회적 이슈에 대한 외면으로 해석될 이유는 없다. 모든 위험한 추측과 의심스러운 회의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행동과 실천은 개인으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쁜 체제에서 착한 체제로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진보의 희망적 전략이지만 그것이 시스템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를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좌절하는 것이 더 낫다. 절망하지 않은 곳에 희망은 없다. 그리고 미심쩍은 희망을 말하는 것보다 침묵이 더 낫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침묵하기의 방식을 선택한 개인에게 집단적 논리를 들이대며 ‘참여’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것에 반대한다.
침묵은 새로운 상상을 낳을 것이다. 침묵의 상상은 개인의 가치를 사회 속에서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제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사회가 아닌 개인의 가치를 경험하는 일을 시작해야 할 때이다.
<김진송 | 목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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