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잠언 › 사랑의 올바른 자녀교육

빛의 사자 | 2014.07.26 07:54:13 | 메뉴 건너뛰기 쓰기
성경본문
잠13:24
설교자
한태완 목사
참고

사랑의 올바른 자녀교육

본문: 잠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많은 사람들이 유대인의 교육에 관심을 갖습니다. 왜일까요. 유대인들이 부자이고 세계 권력을 쥐고 있고 대단한 학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교육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고 믿기에 유대인의 교육에 찬사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입장에서 볼 때는 완전히 실패한 교육입니다. 죄 용서함이나 구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위한 교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교육에는 그런 목표도 내용도 없습니다. 오직 출세와 성공을 위한 처세술 교육입니다.

그들의 교육은 화려한 육의 사람을 만드는 데는 대성공의 교육일지는 몰라도 성경이 말하는 영의 사람으로 만드는 일과는 전혀 무관한 교육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유대인식 교육을 한다면 단 한 사람도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를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더 무서운 사실은 유대인의 교육은 하나님이 보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을 만들어 낸 것이고, 유대인의 교육을 받은 원조 유대인들은 지금까지도 예수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교육은 세속적 성공자를 만드는 교육이 아닙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 영의 사람을 만드는 교육입니다. 인간의 부패와 하나님의 진노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심판, 그리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는 교육입니다. 십자가 때문에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전하게 하는 영의 사람, 깊은 영성의 사람으로 만드는 교육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

지금 미국이 안고 있는 심각한 사회문제의 근본적인 원인들은 무엇인가. 미국을 병들게 만든 원인 중의 하나는 1959년 미국의 공립학교에 행해지던 기도와 성경공부를 금지시켜서 인본주의적이고 뉴에이지적인 문화들이 미국의 청소년들에게 급속도로 번져가도록 방치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특히 1960년대에 아시아인들에 대한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힌두교의 무리들이 미국으로 몰려와 발생한 뉴에이지의 신비주의 문화가 청소년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치도록 만들었습니다.

청소년들이 문제를 통한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엡6:10)함에도 불구하고 신본주의에 입각한 교육이념을 버리고 인본주의적인 교육이념을 앞세워 청소년들을 세상문화에 대해 영적인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 못된 열매들이 계속해서 맺히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학교행사 때 감사기도를 했다는 이유로 인경구 교사가 징계를 받은 것은 미국의 경우처럼 점점 심각해지는 청소년 문제로 고민하면서도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대안마저 사라지게 만드는 교육계의 모순과 영적인 무지를 잘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은 모세의 손이 올라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기고 내려갈 때는 아마렉이 이기는 그 전쟁에서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땅의 모든 교사들이 모세처럼 두 손을 들고 청소년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교육계가 그들이 피곤하지 않도록 아론과 홀처럼 그 팔을 붙들어 올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홀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출17:12,13)

서양에서 실제로 있었다는 한 사형수와 그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사형을 언도 받고 이제 집행을 당하게 된 사형수가 마지막으로 그의 어머니를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를 들은 교도관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아무리 극악한 사형수라도 역시 마지막에는 어머니를 찾는 법인가 보다고 생각하며 측은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 사형수가 만나고 싶어한 것은 모든 사람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이유에서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형수가 마지막 작별키스를 나눌 때 어머니의 혀를 세게 물어뜯어 어머니의 입에서 피가 낭자하게 흘러 내릴 지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분노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사형수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오늘날 사형수가 된 것은 어쩌면 어머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려서 어머니와 함께 이웃집에 놀러 갔다가 그 집에서 예쁜 장난감을 하나 몰래 집어 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한 번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그 뒤 나는 그만 남의 것이지만 내 맘에 드는 것은 무엇이나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집어오게 되었고 나중에는 남을 헤치면서까지 내가 원하는 것을 빼앗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형수의 행동이 올바르다거나, 정당하다고 누구도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사형수의 비극적인 마지막 고백을 들으면서 성경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23:13-14)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29:15)

성경 속의 인물로 이 사형수의 어머니와 동일한 실수를 범한 유명한 제사장이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그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고, 회막에서 수중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는 등의 악행을 알고도 이를 꾸짖고 금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두 아들은 전쟁터에서 죽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 자신은 목이 부러져 죽었고, 또 이러한 소식을 들은 며느리는 해산하다가 죽었다고 분명하게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삼상4:11-21)

어느 집에 귀한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온 집안 식구가 그를 받들고 위해 주어 버릇없는 아이로 자랐습니다. 그는 점점 크면서 동네 아이들을 못살게 굴고 때려서 곧잘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아들의 버릇을 고치지 못해 고민하는데, 동네 청년 한 사람이 자기에게 맡기라고 나섰습니다. 어느 날 아이는 같이 놀던 친구를 별 이유 없이 심하게 때렸고, 이것을 본 청년은 그를 불러 사정없이 몇 대 때렸습니다. 그 아이는 비록 친구를 때렸지만, 이 청년에게는 특별히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얻어맞았으니 억울하고 분하고 아프기도 해서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억울하고 아픈 줄은 몰랐어요. 지금까지 남을 때리기만 했지 맞아보기는 처음이니 맞는 사람의 심정을 처음 느꼈어요”라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 다시는 친구들을 못살게 굴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을 때릴 줄만 알면 어찌합니까? 맞어서 아픈 것도 알아야 합니다. 남의 이를 부러뜨리는 것이 곧 내 이가 부러지는 것으로 연결만 된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교육방법을 보면 자식이 어릴 때는 매를 사용하되, 장성하게 되면 매를 들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같은 아이지만 그가 어릴 때는 매로 키우고, 점점 자라면 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아이의 수준에 따라서 사랑하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는 부정적으로 이것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고 강하게 훈계하고, 일단 자라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자율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대상에 따라서 표현의 방법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말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의 부정적인 표현일 뿐 내용은 같다는 말입니다.

새끼를 낳아 생존을 위해 먹고사는 방법만을 가르치는 동물의 관계를 어미와 새끼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관계에서는 어미와 새끼라 하지 않고 부모와 자식이라고 하는 데에는 먹고사는 방법만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고 영적 말씀을 배우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잠27:5)

고아의 아버지인 조지 뮬러 목사님이, 어느 날 어떤 청년의 집에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뮬러는 청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나는 당신을 잘 모르는데 나를 잘못 초청한 것이 아닙니까?” “선생님은 저를 잘 모르시지만 저는 선생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23년 전 아홉 살 때였습니다. 학교로 가는 길에 과일 가게에서 먹음직한 사과 하나를 훔쳤습니다. 그때 누군가 나의 따귀를 호되게 때렸습니다. 돌아보니 바로 뮬러 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너는 제 팔 계명을 모르느냐? 이 일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게 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후부터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착하게 살아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잘못을 깨우쳐주시고 교육시켜주신 것이 고마워서 오늘 이렇게 초대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의 부모들은 자식들이 예쁘고 착하다고 버려두는 부모가 되지 말고 조지 뮬러 처럼 채찍을 들어서라도 잘못을 깨우쳐주고 가르쳐주는 부모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교훈과 지혜로 자란 자식은 나중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자기의 몫을 감당할 줄 아는 훌륭한 인격자로 성장해갈 것이고, 부모들의 자랑스러운 자식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 가정이 믿음의 가정이 되도록 은혜를 베푸소서. 야곱과 같이 우리도 자녀에게 복을 빌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자녀를 위해 많은 기도를 저축하게 하옵소서. 자녀에게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게 하소서. 하나님 성전에 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의 은혜 받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늘과 땅의 축복 받아 자자손손 세세 무궁토록 우리 성도들 복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에게 맡겨주신 자녀들을 믿음 안에서 양육하길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댓글 쓰기

목록 삭제
Copyright © 최용우 010-7162-3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