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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호의 다독다독]아날로그 종이책이 디지털 감성을 입는다면
경향신문 원문 l 입력 2014.08.11 20:45 |
“푸른 바다와 이어진 새파란 하늘, 날개를 쫙 편 까마귀, 그 위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아이와 토끼”의 모습이 펼침면으로 전개된 그림은 <시리동동 거미동동>(제주도꼬리따기 노래, 권윤덕 그림, 창비)의 인상적인 클라이맥스입니다. 그림에서 까마귀는 바다로 물질 나간 엄마를 발견한 듯 아래를 바라보며 방향을 바꾸는데, 정작 아이는 엄마가 아니라 정면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서 있습니다.
저널리스트이자 그림책 평론가인 최현미는 “이 장면을 펼칠 때 저는 종종 딸에게 심호흡을 해보자고 합니다. 그냥 넘기기엔 참 깊고 긴 시간이 담겨 있는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들숨과 날숨의 그 순간, 딸이 높은 곳을 날고 있는 주인공이 되길 바랍니다. 그 옆에서 저도 깊은 호흡을 합니다”라는 감상을 적은 바가 있습니다.
벤자민 라콩브의 <나비 부인>(보림)은 가로 275㎜, 세로 390㎜인 대형 그림책입니다. 자코모 푸치니의 대표 작품 <나비 부인>과 피에르 로티의 <국화 부인>을 각색한 이 그림책은 일본인 게이샤 나비 부인이 “아름다운 것을 탐하는 서양 수집가의 변덕스러운 욕망”으로 자신을 선택한 미군 해군 장교와 결혼했다가 “곧 돌아오겠다”는 한마디 말만 남기고 본국으로 떠나가 버린 그를 기다리는 슬픈 사랑과 애틋한 마음을 그린 작품입니다. 모두 펼쳐 놓으면 10m 병풍이 되는 그림은 한 장면 한 장면 우리를 숨죽이게 만듭니다. 마치 한 권의 화집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비의 형상을 표지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등장시켜 마치 독자의 시선이 나비 떼의 동선을 따라 다음 장면으로 인도되는 듯한 강렬한 표현으로 이미지화하고 있”(그림책 작가 류재수)기에 이 책은 그림책이 맞습니다. 그림책과 화집의 경계를 해체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이런 그림책의 장면들을 영상화면으로 비춰주면 어떤 효과가 있을까요? 방금 본 것도 잊게 만드는 영상으로는 이런 감동을 도저히 느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그림책은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한층 정교해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게 만드는 팝업북의 수준도 일취월장하고 있습니다. 최근 저는 국내에는 출간되지 않은 프랑스의 그림책들을 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디지털 기술이 아날로그 그림책을 이렇게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북디자이너 정병규는 20세기 말에 “움직이는 것(영상)이 움직이지 않는 것(평면의 이미지)보다 우월하다는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 정적 이미지 이후에 발견된 동적 이미지인 영상은 그 나름의 특징을 가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정적 이미지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은 영상상업주의의 영향이다. 이러한 이미지와 영상의 특질을 상대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지금, 바로 시급한 책의 문화에 대한, 디지털 시대에 만연한 책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인식의 출발점”이라고 충고한 바가 있습니다.
경향신문
지금 출판 현장에서는 이미지의 적절한 편집과 디자인을 통해 움직임을 시각화시키는 실력이 날로 출중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한 책의 제작 기술도 놀랍게 발달하고 있습니다. 편집과 디자인과 제작을 결합한 ‘만들기’를 통해 아날로그 그림책은 영상이 도저히 구현할 수 없는 영역을 개척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림책을 전자책으로 만드는 순간 그림책의 ‘맛’은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출판계는 그림책만큼은 전자책으로 만들지 않기로 암묵적 합의를 했다고 합니다. 반면 우리 출판계는 아동서적을 전자책으로 만드는 시도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증강현실을 도입한 영상화가 시도된 적이 있으나 비용 대비 수익이 나지 않으니 벌써 접은 상태이지요.
하지만 아날로그 그림책도 디지털 감성을 입힐 필요는 있습니다. 창비를 비롯한 출판사 26곳이 함께 참여해 영아부터 초등 저학년 도서까지 364권의 책으로 시작한 ‘더책’ 서비스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더책’은 아날로그 종이책에다 세계 최초로 개발된 디지털 기술을 입힌 것입니다. ‘더책’은 책에 스마트폰을 대기만 하면 책에 부착된 NFC(교통카드, 휴대폰 결제 등에 널리 쓰이는 근거리 무선통신) 태그를 스마트폰으로 인식해 책의 내용을 오디오북으로 듣거나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는 획기적인 서비스입니다. 기존의 오디오북처럼 CD와 같은 저장매체와 별도의 재생장치가 필요하지 않고 번거로운 인증 절차 없이도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이용할 수 있습니다.
저는 졸저 <디지털과 종이책의 행복한 만남>(2000년 출간)에서 “디지털 사회는 그 어떤 누구(anyone), 언제(anytime), 어디서나(anywhere), 어떤 기기(any medium)를 통해서든지 모든 콘텐츠(any contents)를 쉽게 이용하려 드는 ‘유비쿼터스 인터넷’ 시대이다. 따라서 출판사는 모든 콘텐츠를 디지털 환경에 맞게 생산해야 한다. 콘텐츠를 독점적으로 소유하면서 종이책이라는 한 방식으로만 생산하려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any’의 파도를 주도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야흐로 그런 시대가 온 것입니다.
출판(publication)은 ‘공적인’(public) 성격이 강하게 적용되는 업종입니다. ‘더책’이 유아나 시각장애인, 다문화가정의 자녀 등 소외자들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것이기에 우리는 더욱 환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책’을 가까운 도서관에서부터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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