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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상 28:15-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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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영식 목사 |
참고 : | 2003. 9. 14 비엔나 감리교회 http://www.viennachurch.org |
“하나님이 나를 떠나서” - 최영식 목사
우리는 성공한 사람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지만 실패한 사람들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서점엘 가보면 “이렇게 이렇게 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하는 실패수기도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올까요?
일일이 세어보진 않았지만 정말 많은 사람이 나옵니다.
그들 중에는 성공한 사람도 있지만 실패한 사람도 참 많습니다.
그 중에 오늘은 성공한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패한 사람을 통해서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 왕의 상황을 보면 그 상황이 아주 절망적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블레셋 족속이 다시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대대적인 준비를 합니다.
수넴이라는 곳에다가 진을 쳤는데 그 군대를 보니까 기세와 위용이 얼마나 엄청난지 사울 왕이 싸우기도 전에 겁을 잔뜩 집어먹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의 전력이란 게 보잘 것 없었습니다.
힘대 힘으로 싸우면 질 게 뻔합니다.
그래서 사울왕이 하나님께 묻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도 응답을 안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마지막 수단으로 신들린 여인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죽은 선지자 사무엘의 혼을 불러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내지요
이것은 얼핏보면 미신적인 요소가 보입니다.
이미 죽은 사무엘이 무당 여인이 부른다고 나타난 거며, 또 그 사무엘이 사울에게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서 예언을 한 것도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인데 그렇다면 사무엘 선지자도 다시 부활한 것이냐 이렇게 물을 수 있겠지요?
여기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악령이 사무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견해와 또 진짜 사무엘의 혼이 나타나났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성경이 사무엘이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과 이 사무엘이 말한 예언이 하나님으로터 온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 제목이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인데 그 말은 사울 왕이 사무엘에게 말을 시작하면서 꺼냈던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이게 지금 사울 왕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입니다.
사울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한 말이 뭡니까?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군급(窘急)하니이다. 블레셋 사람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려 올렸나이다” 그럽니다.
그런 사울에게 사무엘 선지자는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최후 통첩을 합니다.
요약하면 이미 하나님은 너를 떠났고, 이번 전쟁에서 너와 네 아들 요나단은 죽을 거다 그럽니다.
그 얘기를 들은 사울왕은 거의 실성합니다. 힘이 쭉 빠지면서 죽을 지경이 됩니다.
앞이 깜깜하고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겠는 겁니다.
비극적인 삶을 살다 죽은 사람들의 공통점을 주욱 살펴보면, 그 사람들이 처음부터 실패의 길을 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도 한 때는 누구보다 성실했고 겸손했고, 의롭게 살기도 했다는 겁니다.
이 사울왕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그의 아버지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오라고 했을 때, 온 유다지경을 다 돌아다녔을만큼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사무엘을 처음 만났을 때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시켰지만 그는 순종했습니다.
또 처음 그가 왕으로 지명됐을 때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겠나 하면서 숨었을 만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울의 모습을 보면 그런 좋은 모습들은 온 데 간데 없고 가장 비참한 모습 그대로입니다. 위로받을 사람이 없어서 신들린 여인의 위로나 받는 처지가 됐습니다.
어떻게 보면 두 눈을 뽑혀서 연자맷돌을 돌리고 있는 삼손의 모습보다도 더 비참하게 보입니다.
왜 사울이 이 꼴이 됐을까요?
그렇게 영광스런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전쟁을 앞두고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됐는데 그 이유가 뭘까요?
오늘 우리는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한 말을 곱씹어봐야 합니다.
18절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내게 행하셨고”
먼저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치 아니했다 그랬습니다.
이 사건을 알려면 사무엘상 13장으로 거슬러 올라가봐야 합니다.
그 때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고대사회엔 전쟁에 나가기 전 반드시 자기들이 믿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연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나가야 되겠지요.
그런데 제사를 집례할 사무엘 선지자가 기한이 찼는데도 오지 않는 거예요.
전쟁은 시각을 다투는 문제라, 빨리 제사를 드리고 나가 싸워야 승산이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거예요. 그러다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어서 자기가 직접 제사를 드립니다. 이것이 첫 번째 그의 실수이자 불순종이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꼭 제사장만이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만이 집례할 수 있는 그 제사를 사울 왕이 급한 김에 그냥 자기가 드려버린 거예요. 그 제사를 드리자마자 사무엘 선지자가 도착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될 일이었던 것 같은데 그걸 참지 못한 겁니다.
그 일에 대해서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왕을 심하게 추궁을 하지요.
거기에 보면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그럽니다.
망령되이 행하였다 하는 말은 망할 짓을 했다는 말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제사 한 번 대신 드렸다고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죄인가 생각할 수 도 있을 겁니다.
에덴 동산에서의 사건을 우리가 잘 알지요
선악과 하나를 따먹었다고 그게 무슨 큰 죄가 될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역과 사람과의 영역을 분명히 정해 놓으셨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보면 거의 하나님이 누리시는 것과 비슷할 만큼 완전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별 다를 게 없을 만큼 그 모든 조건이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은 분명히 다릅니다. 바로 그것을 경계지우는 게 선악과였습니다. 그게 하나님과 사람을 나누는 금이었던 겁니다.
그 금 이상은 넘어오지 말라는 거였지요. 그게 무너지면 전 인류의 질서가 무너지는 거지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이렇게 분명히 경계가 있고 고유한 영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것을 하나님 허락없이 맘대로 침범한 겁니다. 그래서 그게 큰 죄인 것입니다.
또 하나,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않았다는 얘기는 뭐냐?
아주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족속들이 여러 족속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악랄하고 비열한 족속이 바로 이 아말렉 족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해서 가나안 땅으로 갈 때, 그 광야 길이 얼마나 험했겠습니까? 약 250만이나 되는 인구에다가 가축까지 데리고 가는 그 광경을 생각해 보세요. 그러다보니 노약자나 부녀자들은 자연 뒤쳐질 수 밖에 없게 되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가장 연약한 사람들을 뒤에서 약탈하고 죽이고 괴롭혔던 족속이 이 아말렉 족속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도 가장 싫어하시는 게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비겁하잖아요. 악랄하잖아요.
신25:17, 18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희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그러면서 모세가 신신당부를 합니다.
아말렉 족속을 반드시 도말하라고 합니다. 도말이라는 말은 하나도 남겨두지 말고 다 죽이라는 겁니다. 죄의 싹을 완전히 없애버리라는 얘기였지요.
사무엘 선지자 역시 그 역사적인 배경을 다 알고 있고 하나님께도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왔습니다. 이 기회야말로 아말렉 족속을 완전히 진멸할 기회라고 여긴 겁니다.
그래서 사울 왕에게 명령을 하지요.
이번에 아말렉 족속을 만나면 남녀노소, 동물까지도 완전히 다 죽이고 살려두는 게 단 하나도 없도록 하라고 그렇게 명령합니다.
삼상 15:2, 3 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이것이 지금 사울왕에게 내려진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다 죽이고 그 아말렉 족속의 왕인 아각은 살려두었습니다. 왜 살려 둡니까?
그 속마음이 뭡니까? 자랑하려고 한 겁니다. 자기의 전과를 자랑하려고 그렇게 남겨둔거예요. 불순종이지요.
게다가 가축을 다 죽이긴 했는데 진짜 좋은 놈들은 다 남겨둔 거예요. 비리비리한 놈들만 죽이고 튼튼한 놈들은 다 살려 둔 겁니다.
뭡니까? 거기에 사심이 들어 간 겁니다.
나중에 사무엘 선지자가 여기에 대해서 왜 그랬냐고 추궁을 하니까 변명을 하지요.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남겨뒀다고.
그때 사무엘 선지자가 유명한 말씀을 하지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 사건으로 하나님은 사울을 폐위시키고 새 이스라엘 왕으로 다른 사람을 세우시기로 작정을 하시지요. 그게 누굽니까? 다윗이지요.
오늘의 이 상황을 보면, 지금 블레셋 하고 싸워야되는데, 이스라엘의 모습이 참으로 별 볼일이 없는 겁니다. 옛날의 그 승승장구하던 이스라엘의 모습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그 동안 사울왕은 엉뚱한 데다가 힘을 소진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잡아죽이는데 전 국력을 다 쏟았습니다. 적군도 아니고, 더군다나 반역자도 아니고, 한편으로는 남도 아닙니다. 자기 사위이자 자기의 가장 충실한 장수요, 부하입니다.
그런데 그 다윗을 죽일려고 전 병력을 다 동원해서 몇 해를 쫓아다녔습니다.
결국 죽이지도 못하고, 국력은 극도로 피폐해진 겁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그 동기도 너무나 우습습니다.
전쟁에 나가서 다윗이 계속 공을 세웁니다.
그런데 개선하면서 여인들이 노래하는 걸 들어보니까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그럽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사울은 다윗에 대한 질투가 생기고, 라이벌 의식이 생긴 겁니다.
그럴 수 있지요.
왕이야 전쟁터에 직접 나갑니까? 하지만 다윗은 전쟁터에서 살쟎아요.
왕보다 장군이 더 많이 죽이는게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사울 왕에 대한 칭찬이기도 합니다. 자기 부하 중에 그렇게 훌륭한 장수가 있다는 것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하쟎아요. 안 그렇습니까?
이 사울왕과 다윗의 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참 대단한 인물이 한 사람 생각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애굽의 바로왕입니다.
이 애굽왕은 요셉이 인물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보고 단번에 총리대신으로 발탁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 부분을 요셉에게 모조리 위임합니다.
정말 요셉도 대단한 인물이지만 모든 일을 완전히 위임할 줄 아는 애굽왕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여기에 사울왕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참으로 소인배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왜 사울에게는 그런 안목이 없었을까? 왜 그렇게 대범함이 없었을까?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사람인데, 참 아쉬운 장면입니다.
지금 전쟁이 일어났지만, 그 동안 다윗을 쫓는데 온 국력을 소모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 싸울 여력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블레셋 군사를 보고는 두려워할 수 밖에요.
오늘 읽은 28장의 맨 끝에 보면 사울이 전쟁에 어떻게 이겨보려고 무당을 찾고 사무엘의 혼을 불러내고 해 보지만 결국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그 밤에 가니라” 그렇게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밤에 어떤 마음으로 돌아갔을까요?
이제 전쟁이 일어나면, 이스라엘은 지고 자기와 자기 아들은 죽게 됩니다.
너무나 비참한 모습입니다.
그저께 유로스포츠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계 유도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 따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런데 그 경기 바로 뒤에 일본선수와 독일 선수가 맞붙었는데, 경기 끝나기 10초전까지 일본 선수가 이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10초를 견디지 못하고 일본 선수가 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지면서 돌아서는 그 표정을 보니까 너무나 처절한 거예요.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우리가 살다보면 그런 처량하고 절망에 빠진 모습을 많이 보지요.
회사에서 퇴직을 당하고 돌아서는 모습,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쓸쓸히 장지에서 돌아오는 모습, 또는 입학시험이나 디플롬에서 떨어져서 쓸쓸히 돌아서는 모습, 또 제 예를 들자면 폴란드에서 차를 잃어버리고 기차를 타고 올 때의 그 처량한 마음, 뭐 모두가 다 참 견디기 어려운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괜찮습니다. 그게 끝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직도 희망이 있어요. 아직도 미래가 있어요.
그리고 아직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날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사울 왕의 모습은 그게 아닙니다.
모든 게 끝났어요. 이제 전쟁 한 차례만 남았고 그나마도 지는 전쟁, 죽는 전쟁만 남았습니다.
오늘 사울은 “하나님이 나를 떠나서”라고 말하지요.
하나님이 자기를 떠났다는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이 자기를 떠난 겁니까? 그게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을 떠난 겁니다.
두 번의 결정적인 불순종, 성령을 훼방한 무서운 죄, 그것으로서 자기가 하나님을 떠난 줄은 모르고 하나님이 자기를 떠났다고 그렇게 강변합니다.
언제부턴가 자기 일생의 최고의 목표는 단 한 사람, 다윗을 죽이는 게 자기 인생의 절대절명의 목표가 됐습니다. 그러니 그 인생은 얼마나 소모적이고 불쌍한 인생입니까?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얻어야 할 세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순종보다 나은 제사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벌고, 그것으로 선교를 하고 구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앞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고 편히 쉬고, 형제와 교제하는 게 더 먼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말씀하신 대로 형제와 화해하고 오는 게 먼저라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시인하는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순종도 그 믿음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 믿음은 구원과는 상관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실 수만 있으면,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고 싶었을 겁니다.
십자가말고, 사람들에게 돌을 떡으로 만듦으로써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그것으로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랬을 지도 모릅니다.
또는 높은 데서 뛰어내리는 신기한 기적을 일으켜서 사람을 모으고 거기서 신비한 능력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또는 세상의 모든 왕들을 주관하고 세상의 좋은 것들을 한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하는 그런 능력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그것으로 구원을 하고 싶으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그게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겁니다
죽으라는 겁니다. 한 알의 밀알로 썪어지라는 겁니다. 가시면류관과 채찍을 그대로 받으라는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그게 너무나 무섭고 고통스러워서 하실 수만 있으면 이 길을 피해가게 하옵소서 기도하셨던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에게 십자가를 지실 것을 명령했고, 예수님은 거기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순종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믿음생활 하면서 순종은 그 모든 것의 최우선입니다.
순종없이 믿음 없습니다. 순종없이 제사 없습니다.
둘째로, 오늘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과거를 기억하며 감사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이 사울왕은, 자고 일어나니까 유명해 진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전까지 이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뭘 했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얼굴이 아주 잘 생기고 키가 컸다는 거,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그 사람보다 더 준수한 사람이 없었다는 거. 하지만 그 외모야 뭐 그리 중요한 겁니까?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 출신에다가 무슨 유력한 지파도 아닌, 정말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스라엘의 왕, 그것도 초대 왕으로 지명되었다면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지요.
그리고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왕노릇 하기가 얼마나 쉬웠는지 몰라요.
자기 옆엔 유력한 메니저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무엘 선지자지요. 그 사람 말만 들으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게다가 다윗같은 훌륭한 장수가 있었어요. 전쟁에 나가기만 하면 승승장구합니다. 정말 사람도 붙여주시고, 선생님도 붙여주시고, 영토도 붙여 주셨습니다.
왕의 일을 해 나가는데 전혀 어려울 게 없었습니다. 그러면 감사 또 감사해야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감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것을 잊기 시작한 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자꾸 불만이 생기고 자기 입에서 불평이 터져나오면 조심하셔야 됩니다. 신앙의 적신호입니다. 말을 감사의 입술로 바꾸셔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기억하라’라는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 지 모릅니다.
뭘 기억하라는 말씀입니까?
에벤에셀의 하나님! 여기까지 인도해 오신 하나님! 그 분을 기억하고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배고플 때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셨던 하나님, 마를 때 바위를 쳐서 샘물을 내셨던 하나님! 홍해가 가로막고 있을 때 그 바다를 갈라주셨던 하나님! 죄에 빠져서 헤메고 있을 때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라는 겁니다.
우리 찬송가 중에 그런 찬송이 있지요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세상근심걱정 너를 누르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나갈 때
주가 네게 주신 복을 세어라 두렴없이 항상 찬송하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세상 권세 너의 앞길 막을 때 주만 믿고 낙심하지 말아라
천사들이 너를 보호하리라 염려없이 앞만 보고 나가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오늘 이 찬송가의 가사를 요약해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받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 증거를 보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또 복을 주실 거라는 거예요.
그게 의심이 되면 지금까지 받은 복을 한 번 세어 보라는 거지요.
여러분! 과거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우리가 배워야 될 교훈은, 누구든지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마지막 교훈이자 결론이 되는 말씀입니다.
사울왕이 왕이 되는 증표인 기름부음을 받자마자 사무엘 선지자가 그런 말을 합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삼상10:6-7)
사울왕은 한 때 선지자 수준의 영력(靈力)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충만해서 예언도 하고 완전히 변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왜 지금 그렇게 초라한 사람으로 변했습니까?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완전히 극에서 극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그런 경우를 너무 많이 보고 듣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윤 창렬 이라는 사람때문에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혀 진 적이 있습니다. 굿모닝 게이트의 주인공이지요.
소액 투자자들 몇 천명의 돈을 꿀꺽하고 사라졌는데 그 돈이 무려 몇 천억에 달했다는 거예요.
그 돈이 어떤 돈입니까? 정말 먹을 거 못 먹고 입을 거 못 입고, 누릴 것 못 누리면서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살림을 늘려보겠다고 애썼던 사람들의 피묻은 돈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챙겨서는 온갖 유흥비로, 뇌물로 써버렸다는 겁니다.
파출소장 정도에게 1억원의 뇌물을 바쳤다고 하니까 국회의원이나 조금 높은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뇌물을 먹였을지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문제는 그가 교회의 집사였다는 겁니다.
그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다면, 그가 정말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그렇게 살 수 없었을 겁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입니다.
한 때 신앙생활을 잘 했으니까 집사 임직을 받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버렸을 때, 그 사람은 양심마저 져버릴 수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진 겁니다.
누구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없다하고 하나님을 떠나 보내면 사람은 짐승과도 같아집니다.
본능에 의해서 삽니다.
그런데 사람은 위기에 닥치면 결국 누군가를 부르게 됩니다.
오늘 사울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시지도 않고, 선지자로도 말씀하시지 않고, 꿈으로도 안 보여 주시니까 결국은 신들린 여인, 무당에게로 찾아 는 겁니다.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도 결국 사람은 누군가를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이방신이요, 권력이요, 명예요, 돈이요, 마약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길게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사람은 망합니다. 그것은 필연적인 길입니다.
여러분께서도 그 얘기를 들으셨을 겁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의 예수님의 모델과 가룟 유다의 모델은 같은 사람이라는 것 아시지요?
다빈치가 그 그림을 그릴 때 예수님을 그릴려고 그 동네 사람들에게 가장 인품이 훌륭하고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사람들이 추천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모델로 예수님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참 있다가 이번엔 가룟 유다를 그려야 되겠는데 가장 흉악한 사람을 모델로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델을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찾았습니다.
좀 접근하기 무서웠지만 그 사람에게 자기 그림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얘기를 하니까 “다빈치 선생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더랍니다.
그런데 다빈치는 그 사람을 아무리 뜯어봐도 모르겠더라는 겁니다.
그제서야 그 사람이 말합니다 “저는 얼마 전에 예수님 모델이 되었던 그 사람입니다.”
얘기를 하더라는 거지요.
아 얘기는 단순히 이야기 거리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사람은 무슨 생각을 품고 사느냐, 그리고 누구를 믿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의 내면 뿐 아니라 외모까지도 얼마든지 극에서 극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추측하기로는 그의 얼굴은 하나님을 믿을 때와 하나님을 떠났을 때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사림이 하나님을 떠나 보내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떠나가면 그 사람은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 같아집니다.
사울이 왕의 타이틀은 가지고 있는지 몰라도 그는 맥없는 허수아비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돈을 잃어버리는 것은 조금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면 조금 더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그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을 떠나보내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도록 내 자리를 내 드립시다.
그리고 순종합시다. 또한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그분께 감사드리십시다.
그 감사만 잃지 않는다면 우리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실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않으십니다”
이 비통한 사울의 외침을 절대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의 삶이 순종과, 감사와 에벤에셀의 생애가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에 참고한 자료>
* 두란노 성경 : 하용조
* 성서대백과 : 정인찬
우리는 성공한 사람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지만 실패한 사람들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서점엘 가보면 “이렇게 이렇게 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하는 실패수기도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올까요?
일일이 세어보진 않았지만 정말 많은 사람이 나옵니다.
그들 중에는 성공한 사람도 있지만 실패한 사람도 참 많습니다.
그 중에 오늘은 성공한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패한 사람을 통해서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울 왕의 상황을 보면 그 상황이 아주 절망적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블레셋 족속이 다시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 대대적인 준비를 합니다.
수넴이라는 곳에다가 진을 쳤는데 그 군대를 보니까 기세와 위용이 얼마나 엄청난지 사울 왕이 싸우기도 전에 겁을 잔뜩 집어먹었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의 전력이란 게 보잘 것 없었습니다.
힘대 힘으로 싸우면 질 게 뻔합니다.
그래서 사울왕이 하나님께 묻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모습으로도 응답을 안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마지막 수단으로 신들린 여인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죽은 선지자 사무엘의 혼을 불러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내지요
이것은 얼핏보면 미신적인 요소가 보입니다.
이미 죽은 사무엘이 무당 여인이 부른다고 나타난 거며, 또 그 사무엘이 사울에게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서 예언을 한 것도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인데 그렇다면 사무엘 선지자도 다시 부활한 것이냐 이렇게 물을 수 있겠지요?
여기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악령이 사무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보는 견해와 또 진짜 사무엘의 혼이 나타나났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성경이 사무엘이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과 이 사무엘이 말한 예언이 하나님으로터 온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오늘 제목이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인데 그 말은 사울 왕이 사무엘에게 말을 시작하면서 꺼냈던 말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이게 지금 사울 왕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입니다.
사울이 사무엘 선지자에게 한 말이 뭡니까?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군급(窘急)하니이다. 블레셋 사람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려 올렸나이다” 그럽니다.
그런 사울에게 사무엘 선지자는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최후 통첩을 합니다.
요약하면 이미 하나님은 너를 떠났고, 이번 전쟁에서 너와 네 아들 요나단은 죽을 거다 그럽니다.
그 얘기를 들은 사울왕은 거의 실성합니다. 힘이 쭉 빠지면서 죽을 지경이 됩니다.
앞이 깜깜하고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겠는 겁니다.
비극적인 삶을 살다 죽은 사람들의 공통점을 주욱 살펴보면, 그 사람들이 처음부터 실패의 길을 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도 한 때는 누구보다 성실했고 겸손했고, 의롭게 살기도 했다는 겁니다.
이 사울왕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그의 아버지가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오라고 했을 때, 온 유다지경을 다 돌아다녔을만큼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사무엘을 처음 만났을 때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을 시켰지만 그는 순종했습니다.
또 처음 그가 왕으로 지명됐을 때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겠나 하면서 숨었을 만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울의 모습을 보면 그런 좋은 모습들은 온 데 간데 없고 가장 비참한 모습 그대로입니다. 위로받을 사람이 없어서 신들린 여인의 위로나 받는 처지가 됐습니다.
어떻게 보면 두 눈을 뽑혀서 연자맷돌을 돌리고 있는 삼손의 모습보다도 더 비참하게 보입니다.
왜 사울이 이 꼴이 됐을까요?
그렇게 영광스런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전쟁을 앞두고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됐는데 그 이유가 뭘까요?
오늘 우리는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한 말을 곱씹어봐야 합니다.
18절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내게 행하셨고”
먼저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순종치 아니했다 그랬습니다.
이 사건을 알려면 사무엘상 13장으로 거슬러 올라가봐야 합니다.
그 때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 고대사회엔 전쟁에 나가기 전 반드시 자기들이 믿는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연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나가야 되겠지요.
그런데 제사를 집례할 사무엘 선지자가 기한이 찼는데도 오지 않는 거예요.
전쟁은 시각을 다투는 문제라, 빨리 제사를 드리고 나가 싸워야 승산이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거예요. 그러다가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어서 자기가 직접 제사를 드립니다. 이것이 첫 번째 그의 실수이자 불순종이었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꼭 제사장만이 지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만이 집례할 수 있는 그 제사를 사울 왕이 급한 김에 그냥 자기가 드려버린 거예요. 그 제사를 드리자마자 사무엘 선지자가 도착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될 일이었던 것 같은데 그걸 참지 못한 겁니다.
그 일에 대해서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왕을 심하게 추궁을 하지요.
거기에 보면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그럽니다.
망령되이 행하였다 하는 말은 망할 짓을 했다는 말입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제사 한 번 대신 드렸다고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죄인가 생각할 수 도 있을 겁니다.
에덴 동산에서의 사건을 우리가 잘 알지요
선악과 하나를 따먹었다고 그게 무슨 큰 죄가 될까요?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역과 사람과의 영역을 분명히 정해 놓으셨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누릴 수 있는 것을 보면 거의 하나님이 누리시는 것과 비슷할 만큼 완전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별 다를 게 없을 만큼 그 모든 조건이 완벽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은 분명히 다릅니다. 바로 그것을 경계지우는 게 선악과였습니다. 그게 하나님과 사람을 나누는 금이었던 겁니다.
그 금 이상은 넘어오지 말라는 거였지요. 그게 무너지면 전 인류의 질서가 무너지는 거지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는 이렇게 분명히 경계가 있고 고유한 영역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것을 하나님 허락없이 맘대로 침범한 겁니다. 그래서 그게 큰 죄인 것입니다.
또 하나,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않았다는 얘기는 뭐냐?
아주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족속들이 여러 족속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악랄하고 비열한 족속이 바로 이 아말렉 족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해서 가나안 땅으로 갈 때, 그 광야 길이 얼마나 험했겠습니까? 약 250만이나 되는 인구에다가 가축까지 데리고 가는 그 광경을 생각해 보세요. 그러다보니 노약자나 부녀자들은 자연 뒤쳐질 수 밖에 없게 되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가장 연약한 사람들을 뒤에서 약탈하고 죽이고 괴롭혔던 족속이 이 아말렉 족속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도 가장 싫어하시는 게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비겁하잖아요. 악랄하잖아요.
신25:17, 18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희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그러면서 모세가 신신당부를 합니다.
아말렉 족속을 반드시 도말하라고 합니다. 도말이라는 말은 하나도 남겨두지 말고 다 죽이라는 겁니다. 죄의 싹을 완전히 없애버리라는 얘기였지요.
사무엘 선지자 역시 그 역사적인 배경을 다 알고 있고 하나님께도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왔습니다. 이 기회야말로 아말렉 족속을 완전히 진멸할 기회라고 여긴 겁니다.
그래서 사울 왕에게 명령을 하지요.
이번에 아말렉 족속을 만나면 남녀노소, 동물까지도 완전히 다 죽이고 살려두는 게 단 하나도 없도록 하라고 그렇게 명령합니다.
삼상 15:2, 3 에 그 말씀이 나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이것이 지금 사울왕에게 내려진 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다 죽이고 그 아말렉 족속의 왕인 아각은 살려두었습니다. 왜 살려 둡니까?
그 속마음이 뭡니까? 자랑하려고 한 겁니다. 자기의 전과를 자랑하려고 그렇게 남겨둔거예요. 불순종이지요.
게다가 가축을 다 죽이긴 했는데 진짜 좋은 놈들은 다 남겨둔 거예요. 비리비리한 놈들만 죽이고 튼튼한 놈들은 다 살려 둔 겁니다.
뭡니까? 거기에 사심이 들어 간 겁니다.
나중에 사무엘 선지자가 여기에 대해서 왜 그랬냐고 추궁을 하니까 변명을 하지요.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남겨뒀다고.
그때 사무엘 선지자가 유명한 말씀을 하지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 사건으로 하나님은 사울을 폐위시키고 새 이스라엘 왕으로 다른 사람을 세우시기로 작정을 하시지요. 그게 누굽니까? 다윗이지요.
오늘의 이 상황을 보면, 지금 블레셋 하고 싸워야되는데, 이스라엘의 모습이 참으로 별 볼일이 없는 겁니다. 옛날의 그 승승장구하던 이스라엘의 모습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그 동안 사울왕은 엉뚱한 데다가 힘을 소진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잡아죽이는데 전 국력을 다 쏟았습니다. 적군도 아니고, 더군다나 반역자도 아니고, 한편으로는 남도 아닙니다. 자기 사위이자 자기의 가장 충실한 장수요, 부하입니다.
그런데 그 다윗을 죽일려고 전 병력을 다 동원해서 몇 해를 쫓아다녔습니다.
결국 죽이지도 못하고, 국력은 극도로 피폐해진 겁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그 동기도 너무나 우습습니다.
전쟁에 나가서 다윗이 계속 공을 세웁니다.
그런데 개선하면서 여인들이 노래하는 걸 들어보니까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그럽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사울은 다윗에 대한 질투가 생기고, 라이벌 의식이 생긴 겁니다.
그럴 수 있지요.
왕이야 전쟁터에 직접 나갑니까? 하지만 다윗은 전쟁터에서 살쟎아요.
왕보다 장군이 더 많이 죽이는게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또 사울 왕에 대한 칭찬이기도 합니다. 자기 부하 중에 그렇게 훌륭한 장수가 있다는 것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하쟎아요. 안 그렇습니까?
이 사울왕과 다윗의 관계를 생각할 때마다 참 대단한 인물이 한 사람 생각납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애굽의 바로왕입니다.
이 애굽왕은 요셉이 인물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보고 단번에 총리대신으로 발탁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 부분을 요셉에게 모조리 위임합니다.
정말 요셉도 대단한 인물이지만 모든 일을 완전히 위임할 줄 아는 애굽왕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여기에 사울왕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참으로 소인배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왜 사울에게는 그런 안목이 없었을까? 왜 그렇게 대범함이 없었을까?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사람인데, 참 아쉬운 장면입니다.
지금 전쟁이 일어났지만, 그 동안 다윗을 쫓는데 온 국력을 소모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 싸울 여력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블레셋 군사를 보고는 두려워할 수 밖에요.
오늘 읽은 28장의 맨 끝에 보면 사울이 전쟁에 어떻게 이겨보려고 무당을 찾고 사무엘의 혼을 불러내고 해 보지만 결국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그 밤에 가니라” 그렇게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밤에 어떤 마음으로 돌아갔을까요?
이제 전쟁이 일어나면, 이스라엘은 지고 자기와 자기 아들은 죽게 됩니다.
너무나 비참한 모습입니다.
그저께 유로스포츠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계 유도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 따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런데 그 경기 바로 뒤에 일본선수와 독일 선수가 맞붙었는데, 경기 끝나기 10초전까지 일본 선수가 이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10초를 견디지 못하고 일본 선수가 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지면서 돌아서는 그 표정을 보니까 너무나 처절한 거예요.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우리가 살다보면 그런 처량하고 절망에 빠진 모습을 많이 보지요.
회사에서 퇴직을 당하고 돌아서는 모습,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내고 쓸쓸히 장지에서 돌아오는 모습, 또는 입학시험이나 디플롬에서 떨어져서 쓸쓸히 돌아서는 모습, 또 제 예를 들자면 폴란드에서 차를 잃어버리고 기차를 타고 올 때의 그 처량한 마음, 뭐 모두가 다 참 견디기 어려운 모습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괜찮습니다. 그게 끝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직도 희망이 있어요. 아직도 미래가 있어요.
그리고 아직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날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사울 왕의 모습은 그게 아닙니다.
모든 게 끝났어요. 이제 전쟁 한 차례만 남았고 그나마도 지는 전쟁, 죽는 전쟁만 남았습니다.
오늘 사울은 “하나님이 나를 떠나서”라고 말하지요.
하나님이 자기를 떠났다는 거예요.
하지만 하나님이 자기를 떠난 겁니까? 그게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을 떠난 겁니다.
두 번의 결정적인 불순종, 성령을 훼방한 무서운 죄, 그것으로서 자기가 하나님을 떠난 줄은 모르고 하나님이 자기를 떠났다고 그렇게 강변합니다.
언제부턴가 자기 일생의 최고의 목표는 단 한 사람, 다윗을 죽이는 게 자기 인생의 절대절명의 목표가 됐습니다. 그러니 그 인생은 얼마나 소모적이고 불쌍한 인생입니까?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얻어야 할 세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순종보다 나은 제사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벌고, 그것으로 선교를 하고 구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앞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고 편히 쉬고, 형제와 교제하는 게 더 먼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말씀하신 대로 형제와 화해하고 오는 게 먼저라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시인하는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러나 순종도 그 믿음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그 믿음은 구원과는 상관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실 수만 있으면,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고 싶었을 겁니다.
십자가말고, 사람들에게 돌을 떡으로 만듦으로써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그것으로 구원할 수 있기를 바랬을 지도 모릅니다.
또는 높은 데서 뛰어내리는 신기한 기적을 일으켜서 사람을 모으고 거기서 신비한 능력으로 세상을 구원하시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또는 세상의 모든 왕들을 주관하고 세상의 좋은 것들을 한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하는 그런 능력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그것으로 구원을 하고 싶으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그게 아니었습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겁니다
죽으라는 겁니다. 한 알의 밀알로 썪어지라는 겁니다. 가시면류관과 채찍을 그대로 받으라는 겁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죽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그게 너무나 무섭고 고통스러워서 하실 수만 있으면 이 길을 피해가게 하옵소서 기도하셨던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에게 십자가를 지실 것을 명령했고, 예수님은 거기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그 순종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믿음생활 하면서 순종은 그 모든 것의 최우선입니다.
순종없이 믿음 없습니다. 순종없이 제사 없습니다.
둘째로, 오늘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과거를 기억하며 감사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이 사울왕은, 자고 일어나니까 유명해 진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전까지 이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뭘 했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얼굴이 아주 잘 생기고 키가 컸다는 거, 그래서 이스라엘에서 그 사람보다 더 준수한 사람이 없었다는 거. 하지만 그 외모야 뭐 그리 중요한 겁니까?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 출신에다가 무슨 유력한 지파도 아닌, 정말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스라엘의 왕, 그것도 초대 왕으로 지명되었다면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지요.
그리고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보면 왕노릇 하기가 얼마나 쉬웠는지 몰라요.
자기 옆엔 유력한 메니저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무엘 선지자지요. 그 사람 말만 들으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게다가 다윗같은 훌륭한 장수가 있었어요. 전쟁에 나가기만 하면 승승장구합니다. 정말 사람도 붙여주시고, 선생님도 붙여주시고, 영토도 붙여 주셨습니다.
왕의 일을 해 나가는데 전혀 어려울 게 없었습니다. 그러면 감사 또 감사해야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감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것을 잊기 시작한 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자꾸 불만이 생기고 자기 입에서 불평이 터져나오면 조심하셔야 됩니다. 신앙의 적신호입니다. 말을 감사의 입술로 바꾸셔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기억하라’라는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 지 모릅니다.
뭘 기억하라는 말씀입니까?
에벤에셀의 하나님! 여기까지 인도해 오신 하나님! 그 분을 기억하고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배고플 때 메추라기와 만나를 주셨던 하나님, 마를 때 바위를 쳐서 샘물을 내셨던 하나님! 홍해가 가로막고 있을 때 그 바다를 갈라주셨던 하나님! 죄에 빠져서 헤메고 있을 때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라는 겁니다.
우리 찬송가 중에 그런 찬송이 있지요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세상근심걱정 너를 누르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나갈 때
주가 네게 주신 복을 세어라 두렴없이 항상 찬송하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세상 권세 너의 앞길 막을 때 주만 믿고 낙심하지 말아라
천사들이 너를 보호하리라 염려없이 앞만 보고 나가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오늘 이 찬송가의 가사를 요약해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받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 증거를 보면 앞으로도 계속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또 복을 주실 거라는 거예요.
그게 의심이 되면 지금까지 받은 복을 한 번 세어 보라는 거지요.
여러분! 과거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우리가 배워야 될 교훈은, 누구든지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마지막 교훈이자 결론이 되는 말씀입니다.
사울왕이 왕이 되는 증표인 기름부음을 받자마자 사무엘 선지자가 그런 말을 합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 (삼상10:6-7)
사울왕은 한 때 선지자 수준의 영력(靈力)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충만해서 예언도 하고 완전히 변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왜 지금 그렇게 초라한 사람으로 변했습니까?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완전히 극에서 극으로 변합니다.
우리는 그런 경우를 너무 많이 보고 듣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윤 창렬 이라는 사람때문에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혀 진 적이 있습니다. 굿모닝 게이트의 주인공이지요.
소액 투자자들 몇 천명의 돈을 꿀꺽하고 사라졌는데 그 돈이 무려 몇 천억에 달했다는 거예요.
그 돈이 어떤 돈입니까? 정말 먹을 거 못 먹고 입을 거 못 입고, 누릴 것 못 누리면서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살림을 늘려보겠다고 애썼던 사람들의 피묻은 돈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챙겨서는 온갖 유흥비로, 뇌물로 써버렸다는 겁니다.
파출소장 정도에게 1억원의 뇌물을 바쳤다고 하니까 국회의원이나 조금 높은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뇌물을 먹였을지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문제는 그가 교회의 집사였다는 겁니다.
그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다면, 그가 정말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그렇게 살 수 없었을 겁니다.
그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입니다.
한 때 신앙생활을 잘 했으니까 집사 임직을 받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버렸을 때, 그 사람은 양심마저 져버릴 수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어진 겁니다.
누구든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없다하고 하나님을 떠나 보내면 사람은 짐승과도 같아집니다.
본능에 의해서 삽니다.
그런데 사람은 위기에 닥치면 결국 누군가를 부르게 됩니다.
오늘 사울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시지도 않고, 선지자로도 말씀하시지 않고, 꿈으로도 안 보여 주시니까 결국은 신들린 여인, 무당에게로 찾아 는 겁니다.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도 결국 사람은 누군가를 부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이방신이요, 권력이요, 명예요, 돈이요, 마약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길게 말씀드릴 게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사람은 망합니다. 그것은 필연적인 길입니다.
여러분께서도 그 얘기를 들으셨을 겁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의 예수님의 모델과 가룟 유다의 모델은 같은 사람이라는 것 아시지요?
다빈치가 그 그림을 그릴 때 예수님을 그릴려고 그 동네 사람들에게 가장 인품이 훌륭하고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사람들이 추천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모델로 예수님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참 있다가 이번엔 가룟 유다를 그려야 되겠는데 가장 흉악한 사람을 모델로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델을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찾았습니다.
좀 접근하기 무서웠지만 그 사람에게 자기 그림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얘기를 하니까 “다빈치 선생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더랍니다.
그런데 다빈치는 그 사람을 아무리 뜯어봐도 모르겠더라는 겁니다.
그제서야 그 사람이 말합니다 “저는 얼마 전에 예수님 모델이 되었던 그 사람입니다.”
얘기를 하더라는 거지요.
아 얘기는 단순히 이야기 거리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사람은 무슨 생각을 품고 사느냐, 그리고 누구를 믿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의 내면 뿐 아니라 외모까지도 얼마든지 극에서 극으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추측하기로는 그의 얼굴은 하나님을 믿을 때와 하나님을 떠났을 때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우리를 떠나시지 않습니다.
사림이 하나님을 떠나 보내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하나님이 떠나가면 그 사람은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 같아집니다.
사울이 왕의 타이틀은 가지고 있는지 몰라도 그는 맥없는 허수아비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돈을 잃어버리는 것은 조금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건강을 잃어버리면 조금 더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그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을 떠나보내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도록 내 자리를 내 드립시다.
그리고 순종합시다. 또한 지금까지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그분께 감사드리십시다.
그 감사만 잃지 않는다면 우리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실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않으십니다”
이 비통한 사울의 외침을 절대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의 삶이 순종과, 감사와 에벤에셀의 생애가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에 참고한 자료>
* 두란노 성경 : 하용조
* 성서대백과 : 정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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