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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의 수하한화]양심의 정치, 이대로는 불가능하다
경향신문 2014.08.20 21:32
며칠 동안 프란치스코 교황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가톨릭교회의 최고 지도자라는 극히 존귀한 신분이면서도 교황은 한결같이 겸허한 자세를 취했고, 약하고 소외받고 버림받은 존재에 대한 끝없는 동정과 관심을 나타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단순·소박한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것인가, 사람다운 사람, 혹은 지도자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무언중에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떠났다. 이런 모습은 지도자다운 지도자의 부재로 늘 시련과 고통을 받고 있는 이 나라 민초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그러한 자세와 언행은 그가 세속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종교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온갖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히고설킨 정치현실 속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가 있다. 예를 들면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이 그렇다. 그는 대통령의 관저는 노숙인들에게 내어주고, 자신과 아내는 교외의 작은 오두막에서 지내고 있다. 매일 대통령 집무실로 오가는 소형 중고 자동차는 자신이 직접 운전을 한다. 또한 일흔 살이 넘은 이 노인은 늘 손수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며, 손님에게도 손수 차를 끓여 내놓는다. 그리고 봉급의 9할은 시민운동단체와 자선기관에 기부금으로 보낸다. 그는 귀빈용 레드카펫을 밟는 것도, 넥타이를 매는 것도 싫어한다. 심지어 작년 가을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할 때에도 그는 노타이 차림이었다.
동시에 주목할 것은 그의 정책결정이 흔히 매우 용기 있고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금년 초 마약 마피아들의 협박과 온갖 정치적 압력에 굴하지 않고, 마리화나의 생산, 판매, 소비를 합법화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의 논리는 명쾌하다. 즉, 마리화나는 담배보다 훨씬 독성이 약하다. 그럼에도 이것을 계속 불법화하고 있는 한, 출처불명의 비위생적인 마리화나를 사 피울 수밖에 없는 중독자들을 국가가 도와줄 길이 없다. 그러나 마리화나가 합법화되면 국가에 의한 관리가 가능해지고, 중독자는 국가가 공적으로 치료해줄 수 있다. 또한 마리화나로 인한 막대한 판매 수익은 더 이상 지하에서 돌아다니지 않고 국가의 정당한 수입이 되어 복지예산으로 쓸 수 있다 등등.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종교가든 정치가든, 결국은 지도자의 사람됨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떠난 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지도자들도 진정으로 민중의 마음을 읽고, 공감할 줄 아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 줄 것을 갈망하는 이런저런 기대와 바람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기대와 바람은 부질없는 짓이다. 오늘날 이 나라의 권력 엘리트들의 품성과 자질이 달라질 가능성은 제로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혹시 어느 날 문득 속물적 삶의 무의미함을 통절히 깨닫고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변모했던 가령 톨스토이의 경우처럼 내면적 회심을 경험한 사람이 있다면 모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실제로 가능성이 거의 전무한데도 우리들은 날이면 날마다 권력자들의 태도가 바뀌기를 기대하고 바라면서 끊임없이 간청하거나 항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나라에서 ‘국민’으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피곤한 노릇이지만, 생각해보면 이것보다 더 어리석은 ‘국민생활’도 없다. 왜 이 나라의 민중은 자기들에 의해 선출된 대표자(들)에 의해 이처럼 끊임없이 무시와 외면을 당하고, 업신여김을 받고 살아야 하는가. 이제 정말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민중과 권력 사이의 이 불편·불합리한 관계는 반드시 권력자들의 인간적 자질 탓만이 아니다. 물론 프란치스코 교황이나 호세 무히카 대통령 정도의 수준과는 비견할 수 없을지라도 비교적 양식 있는 정치가, 엘리트들은 우리 사회에도 드물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들 개개인의 자질과 관계없이 그들이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그룹으로서 행동할 때 거의 예외 없이 ‘괴물’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실제 오늘날 대의제민주주의는 공공선을 실현하고, 민중의 진실한 욕구를 반영하는 정치시스템이 아니라 특권층과 지배세력의 배타적인 이익추구를 돕는 음험한 장치로 변질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국 사회만 그런 게 아니지만, 지금은 근대적 정당정치, 대의제민주주의가 실패했다는 것, 이 정치시스템을 갖고는 희망이 있는 미래를 열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져 가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토마 피케티의 <21세기의 자본>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 현상은 지난 수백년간 일관되게 지속돼온 자본주의체제의 내재적 특성 때문이라는 것을 방대한 통계자료로 입증하고 있다. 피케티에 의하면, 1, 2차 세계대전 이후 20세기 중반까지가 비교적 불평등이 완화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매우 예외적인 시기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피케티의 관찰은, 다시 말하면, 그동안의 근대적 정당정치와 대의제민주주의가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위한 기본조건, 즉 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시키는 데 전혀 무력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소문과는 달리 왜 대의제민주주의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당제도가 이토록 무력하고 쓸모없는 것인가? 여러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은 선거라는 제도의 근본적 약점 혹은 속임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선거란 기본적으로, 돈과 권력기구와 미디어 등 온갖 메커니즘을 장악·통제하고 있는 기존 지배층이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민중의 진실한 의사와 욕구를 반영하지 못한다. 오늘날 극심한 투표율 저조 현상은 투표를 해봤자 권력 엘리트들 사이의 자리이동 외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익히 보아온 유권자들의 정당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저조한 투표율 위에서 단순 다수표로 선출되는 한, 현재의 정치가들에게는 사실상 정치적 ‘정당성’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지금 국회에서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어떻게 할지 그 방법을 놓고 끝없이 소모적인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이 상황은 결국 이제 정당도, 의회정치도 사실상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사회의 운명을 ‘정치가’라는 특권계급에 맡겨놓아서는 안되는 것 아닐까? 민중사회에 잠재된 지혜를 왜곡 없이 대변하는 공감의 정치, 양심의 정치가 실현될 수 있는 길을 새로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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