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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3:29-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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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4.7.16 주일예배 http://sungamch.net 춘천성암교회 |
예수님이 ‘그토록 화가 난’ 이유
마23:29-36
아침 공기가 여름이라지만 상쾌합니다. 이건 필시 기온의 문제만은 아니고 파괴된 관성이 주는 무의식의 신선한 감정 같은 것일 겁니다. 설교도 그런 분위기로, 그런 시간의 길이로 하려고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체포되기 직전 성전 안에서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다른 복음서에선 이만큼 예수님이 적나라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매우 열 받은 상태에서 하신 말씀 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토록 이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해서 열을 받으신 걸까요?
예수님이 이렇게 화가 난 까닭은 그들이 ‘어떤 사람을 색출 해다가 매질을 심하게 하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일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다. 34절을 보면 이들이 박해하는 사람들은 ‘예언자들, 현인들, 학자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35절에는 그가 바가랴의 아들 사가랴 라고 되어 있지요. 우리는 그가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박해를 받고 있는 이 사가랴라는 사람은 지도자급의 인물로서 당시의 종교권력과 제도를 비판하던 지식인 이라는 겁니다. 한 마디로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는 뜻인데, 이런 그를 바리새들과 율법학자들이 찾아내서 모진 고통 속에 죽였던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계속 시도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화가 나셔서 막말을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들과 율법학자들을 33절에 ‘뱀’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하면 ‘개자식’뭐 이런 어법인데요, 뱀은 흔히 우리가 ‘교활함’이라는 의미어로 쓰지만은 성서에서 은유되는 뱀은 ‘지식’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바리새와 율법학자들을 ‘뱀’이라고 할 때는 그들이 ‘관변지식인’즉 진리를 왜곡 시키는 인사들이라는 뜻입니다. 정치적으로 말하면 정권의 나팔수나 체제 유지의 홍보 원쯤이 됩니다. 한마디로 정직한 지식인이 아니라 어용지식인 노릇을 하면서 자신의 입신양명이나 도모하는 그런 존재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들이 왜 사가랴 같은 이들을 찾아내서 고통을 주고 죽이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바른 말을 하는 지식인들을 그들의 체제 안에서 솎아냄으로 껄끄러운 장애물들을 제거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작자들, 진리를 왜곡 시키는 나팔수들에 대해서 ‘뱀’ 또는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분노 하고 있는 겁니다. 진실을 진실로 말하지 않고 왜곡하여 세상에 퍼뜨리는 모든 부류가 여기에 해당한다 하겠습니다.
어용 지식인들은 항상 자신을 위장합니다. 29절에 보세요. 여기서 ‘지식인’이란 종교지도자를 말하는 것이고 이들이 ‘어용’이라는 말은 엉터리나 혹은 거짓으로 진리를 왜곡 확산 확증시키려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성경을 성경대로 똑바로 가르치지 않고 온갖 사술로 포장하는 목사들을 일컫는다 하겠습니다. 여하튼, 29절에 나오는 대로 그런 어용들은 지난날 그들의 역사에 등장했던 비판적인 예언자들의 동상은 근사하게 세웁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겉으로 위장을 하지만 그들 자신은 조상들의 행태를 답습하고 있는 겁니다. 찬란한 야훼주의의 비판적 전통, 예언자적 비판정신을 도살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예언자의 동상을 세워놓고 거기 왕래하면서 은근히 나도 그런 정직한 지식인이라고 선전을 하면서 속내는 전혀 다르게 산다는 겁니다. 이건 마치 웨슬리를 말하면서 웨슬리처럼 살지 않는 우리네 자신과 닮아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오늘 등장하는 ‘메시아’에 대한 것입니다. 당시의 대중들이 바라는 메시아는 그들의 결핍을 채워주는 분이셨습니다. 그들은 누가 메시아인가, 라는 물음에 대해서 그들의 일상생활에서 밀착된 기준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가랴 같은 예언자 지식인은 그런 메시아를 군중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관변지식인, 이미 종교권력과 제도에 진입하여 호위 호식하는 지식인들(바리새와 율법학자)은 메시아의 자격을 달리 말하고 있었습니다.
기득권층이 말하는 메시아는 율법에 박식해야 하고, 왕 같은 분이어야 하며, 누가 봐도 흠모할 만한 존재이며, 전통을 인정할 줄 알고, 선동을 일삼지 않고, 영웅다운 풍채를 지녀야 했습니다. 이게 가진 자들이 해석하는 메시아 상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면, 그래야 그들만의 메시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준이 복잡하기 때문에 어떤 인간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치 이상적인 존재였습니다. 즉 메시아는 우리와는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여야 했습니다. 그러면 이런 분이 메시아로 오면 힘없는 사람들의 한을 풀어 줄 수 있을까요? 물론 힘 있는 사람들의 힘을 보탤 수는 있을 겁니다.
이렇게 바리새와 율법학자들은 메시아를 대중과 분리하는 전략을 일삼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기준에 미흡한 예언자가 오면 그들은 영락없이 사기꾼, 선동자, 거짓 예언자로 조롱하며 돌을 던졌습니다. 율법사나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대중들에게 메시아를 해석했습니다. 예수님도 결국 이런 뱀이나 독사의 자식들이 널어놓은 거짓메시아 학습의 그물에 걸려든 군중들에 의해 십자가에 넘겨졌던 것입니다. 이렇게 의인을 비웃음의 대상으로 만드는 지식, 그것을 퍼뜨리는 저들을 비판하고 폭로하는 비판적 지식인들을 색출하여 잡아 죽이는 저들에 대하여 예수님이 화가 머리끝까지 난 것입니다.
당시의 군중들은 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요? 삶이 너무 팍팍하기 때문입니다. 수 천 년 동안 힘 있는 자들에게 정신과 몸과 물질을 수탈당하면서 오직 ‘여화와가 나의 목자가 되어 주시길’간절히 기다리는 삶의 처지였습니다. 가난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메시아는 그들의 경험세계 안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가진 자들, 특별히 권력과 제도의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종교 지식인들은 대중들의 메시아를 경험세계 밖으로 분리시킵니다. 메시아를 우리의 영원한 타인으로 돌려세우는 것입니다. 군중들의 소망을 추상화 시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천국’을 말할 때도 이 시대의 거개 신학적 이해는 ‘이 다음에 죽어서 가는 복락의 세계’로 돌려놓음으로 현재로부터 분리를 시킵니다. 지금 억울하고, 가난하고, 병들어 고통스럽고, 냉대를 받아 기분이 더러워도 참으라는 겁니다. 이다음에 하나님 나라에 가면 다 보상을 받는다는 겁니다. 이런 식입니다. 당시의 바리새나 율법학자들이 하는 메시아 담론이 그런 겁니다. 그러면서 그런 메시아인식을 비판하는 이들을 잡아다가 죽였다는 겁니다. 그 때, 그걸 보고, 그런 지식인들을 향해 불같은 화를 쏟아내고 계신 겁니다. ‘뱀 같은 놈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입니다. 오늘의 결핍을 이야기하고, 그래서 그 결핍의 해결로서 메시아를 소망하는 것과 꿈꾸는 것을 우수운 이야기로 바꾸어 버리는 신학과 설교자들에 분노하고 계신 겁니다.
오늘 말씀을 단순히 말하자면 ‘비판을 잃은 사회는 역사 속에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겁니다. 비판을 해체하는 관변 지식이나 신앙도 엄청난 파국을 불러 온다는 겁니다. 잘못 가르치면 그건 재앙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담론의 유포자들을 향해 독설을 퍼 붓고 계시는 겁니다. “이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이 이 세대에 내리고야 말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천국에 대한 담론을 어떻게 하셨을까요? ‘지금 여기’ 혹은 ‘이 다음 저기’중에 뭐였습니까? 예수님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있다고 하셨습니까? 눅17:20-21에 뭐라고 하셔습니까? 이게 대중의 천국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도에 편승된 지식인들은 이걸 분리시켜서 ‘다음 생애’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가르침에 대해서, 그걸 비판하는 지식인들을 잡아 죽이는 현실에 대해서, 그런 작자들에 대해서 화를 내고 계신 겁니다.
이 시대에도, 교회 안에, 가르치는 자들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위장해서 대중의 희망을 다음 세상으로 분리시키는 뱀과 독사의 자식들이 있으니 속지 말아야 할 것이고, 저항하고 분노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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