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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입력 2014.08.22 20:57
바로 그제야. 올해 첫 벼 수확을 했다더군. 그게 무슨 잔칫날이라도 되는지 신문이나 TV에 떠들썩하더군.
4월에 모를 심었대. 미쳤어. 4월이면 늦서리도 오는데 그때 심었다니 도대체 그럼 언제 우리를 싹 틔우기(침종)한 거지? 올해는 추석이 빨라서 그때 팔아먹으려고 일찍 심었대. 아이고 내 신세야. 제철을 잊고 산 지가 몇 년이나 되었는지 모르겠네. 저 인간들 때문에.
그나저나 우린 이제 완전히 한국 땅에서 사라지는 거 아냐?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기에 여자 대통령이 되면 부엌살림을 아니까 쌀이 좀 대접받게 되나 했더니 말짱 도루묵이야. 내년부터는 쌀을 마구잡이로 수입해 들인대. 쌀 관세화를 한대요 글쎄.
값싸고 질 좋은 수입 쌀을 얼마든지 사먹을 수 있는 줄 아나 봐. 돈만 있으면 쌀은 얼마든지 사먹을 수 있다고? 그게 한순간인 걸 모르나 봐. 신기루라는 걸 왜 모를까? 우리가 논에서 살아가는 덕분에 대한민국에 춘천 소양강 다목적댐 스물여덟 개가 거저 생긴다는 걸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어. 자동차 팔고 통신장비 팔고 휴대폰 팔아서 쌀 사먹는 짓은 소양강 다목적댐을 하나씩 폭파시키는 거야 이 바보들아. 피 뽑아 팔아서 술 사먹는 짓이야 이 얼간이들아.
요즘은 우리에 대한 상시적인 학대, 가혹행위가 도를 넘었어. 고문이야 고문. 우린 알아. 할아버지대에는 못자리에서 최소한 45일에서 50일을 자랐어. 향긋한 흙냄새를 맡고 짧디짧은 한낮의 땡볕을 흠뻑 쬐었어. 얼음장 같은 새벽 찬 공기에 온몸을 떨면서도 우리 볍씨들은 야물게 뿌리를 내렸어. 1주일 침종기간 합치고 안방 구들장에 2~3일 촉 틔우기까지 합치면 두 달 만에 모내기를 했어.
요새는 어떤 줄 알아? 단 15일 만에 모내기를 해. 침종, 소독, 최아, 다 합쳐서 보름이야 보름. 끔찍해. 고문이야. 옛날에는 3개월은 자라야 삼계탕을 해 먹던 닭도 지금은 딱 27일 만에 키워낸다니 우리가 그 꼴이야. 갓 부화한 병아리 40g짜리가 딱 27일 만에 몸집을 37배나 불려 1.5㎏ 삼계탕이 된다고 하니 도대체 그게 인간이 할 짓이냐고! 아니지. 인간이니까 그런 짓 하지 그런 몹쓸 짓 하는 존재가 또 있으면 말해 봐!
우리는 논에 물을 대서 키우는 작물이야. 그런데 9층, 10층 서랍장 같은 컨테이너에 얹혀서 허공에 뜬 채 안개비처럼 뿌려대는 비료물을 먹고 키우니 병에 안 걸리겠어? 문고병에 도열병에 백엽고병, 잎집무늬마름병. 비닐하우스 속에 가둬 놓고 햇볕 한 줄기 구경도 못하고 밤낮으로 비료물만 뿌려대니 온몸에 병을 키우지 병을 키워.
멸구나 노린재보다도 농약이 더 무서워. 홍명나방이나 이화명충보다 더. 비 오는 날이 얼마 전만 해도 한숨 돌리는 날이었어. 이제는 점착제를 섞어 뿌려서 비가 오는 날에도 농약이 안 씻겨내리고 우리 살 속으로 파고들어. 그러고는 영양제를 뿌려요. 쌀 영글라고. 낟알이 튼튼하고 수확량 많으라고. 완전 억지춘향이야.
다 자란 우릴 불태우는 건 또 뭐야. 쌀은 민족의 생명이니 뭐니 하면서 멀쩡한 나락 논을 갈아엎는 건 무슨 짓이냐고? 농민들이 오죽하면 자식 같은 나락 논을 갈아엎겠느냐고 둘러대지만 우리는 나락이 막 팰락 말락 하는 임신부야 임신부! 인간들은 지하철에도 임신부 자리를 따로 만들어 놨다며? 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아스팔트 경찰 방패막이 앞에서 쌀을 뿌려대고 짓밟느냐고! 쌀 개방은 인간들이 하면서.
4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농지이용률이 240%였어. 100평 땅을 가지고 1년에 240평 농사를 지었다고. 지금은 105%야. 왜 그런 줄 알아? 논에다가 돈 된다고 포도 심고 감 심고 사과 심고 오미자 심고, 그러니까 농지이용률이 곤두박질친 거야.
잘 기억해. 우리가 죽기 전에 너희들이 먼저 죽을지도 몰라.
<전희식 | 농부·‘똥꽃’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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