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우린 가장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정원식 기자
▲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스티븐 핑커 지음·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1408쪽 | 6만원
올해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1차 대전은 종전의 전쟁과는 달리 전선과 후방이 없는 총력전이었던 탓에 사망자만 1500만명이나 됐다. 불과 20여년 뒤에 터진 제2차 세계대전의 사망자는 그 몇 배에 달했다. 21세기에 접어들어서도 살육은 끊이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최근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를 상대로 벌인 50일간의 군사작전에서는 2143명이 살해당하고 1만1000여명이 부상했다. 인간의 역사는 그 규모와 강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전쟁의 역사이고 인간은 본래부터 구제불능으로 호전적인 생명체인 걸까.
심리학자이자 인지과학자인 스티븐 핑커 하버드대 교수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그 반대가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기나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폭력이 감소해 왔고, 어쩌면 현재 우리는 종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핑커는 과거가 현재보다 훨씬 폭력적이었다는 점을 입증하기에 앞서 몇 가지 고고학적 발견과 문헌을 끌어들여 과거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에 충격을 가하는 작업부터 시작한다. 1991년 발견된 2000년 전 남자의 시신에는 화살에 맞은 상처가 있었다. 영국 북부에서 발견된 또 다른 2000년 된 두개골은 신체에서 인위적으로 절단된 것이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선사시대 유해에서 폭행의 흔적이 없는 것은 없었다.
문자로 기록된 역사에서는 어떨까. 핑커는 트로이 전쟁을 소재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남긴 호메로스의 묘사가 정확하다면 고대 그리스의 전쟁은 “현대의 어떤 전쟁 못지않게 총력전이었다”고 본다. 고대 히브리인들의 역사를 기록한 구약성서도 끔찍하게 폭력적이었던 과거의 세상을 보여준다. “성경에 묘사된 세상은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혼비백산할 만큼 야만스럽다. 사람들은 친족을 노예로 부리고 겁탈하고 죽였다. 군사 지도자들은 아이를 포함해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죽였다. 여자들은 성노리개처럼 거래되거나 강탈되었다.”
책에는 다양한 통계가 등장한다. 이 수치들은 고고학적·인류학적 조사를 통해 획득한 자료와 분명한 기록이 남아 있는 시대의 자료들을 종합해 선행 연구자들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먼저 비국가 사회(국가 등장 이전의 수렵 채집 사회와 수렵 및 원예 농업사회)와 국가 사회를 비교해 보면 현대 서구 국가들의 전쟁 사망률은 전쟁으로 얼룩진 세기에도 비국가 사회들 평균의 4분의 1을 넘지 않는다. 1200년부터 2000년 사이에 서유럽 다섯 지역(이탈리아·네덜란드·영국·독일·스위스)의 10만명당 살인건수를 비교해보면 1300년에서 1900년 사이에 크게 떨어지는 추세다. 영국의 경우 중세에는 살인율이 10만명당 4~100건이었으나 1950년대에는 0.8건으로 떨어졌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는 어떨까. 7세기부터 20세기까지 벌어진 주요 전쟁의 사망자 수를 비교해보니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8세기 중국의 ‘안녹산의 난’으로 4억2900만명이 사망했다. 2위는 13세기 몽골이 정복 전쟁을 벌였을 때로 2억7800만명이 사망했다. 반면 2차 세계대전으로 사망한 사람은 5500만명이었고, 스탈린 시기 폭정으로 희생된 이들은 2000만명이었다.
핑커는 100여개의 그래프와 표, 그림을 제시한 후 ‘20세기는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 나는 세기였다’는 통설은 망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20세기 최악설’은 우선 인구 변화를 감안하지 않은 착오라는 것이다. “20세기의 폭력적 사망 건수가 이전보다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20세기의 인구 자체가 많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1950년의 세계 인구는 25억명이었다. 그것은 1800년의 약 2.5배에 해당하고, 1600년의 4.5배, 1300년의 7배, 기원후 1년의 15배이다.” 20세기가 가장 폭력적인 세기였던 것으로 기억되는 또 다른 이유는 ‘역사적 근시안’이다. 상대적으로 가까운 시기의 일들을 더 잘 기억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빚어지는 혼동이라는 얘기다. “우리가 여러 시대들의 살해 밀도를 비교하면서 수치를 조회하지 않는다면, 제일 최근에 벌어졌고 제일 많이 연구되었고 제일 많이 이야기된 분쟁들에 가중치를 두게 될 것이다.”
핑커는 인류가 비국가 사회에서 국가 사회로 이행하는 평화화 과정, 사회 규범의 발달에 따른 문명화 과정, 계몽주의에서 발원한 인도주의 혁명, 국가 간 교역과 민주화를 통한 긴 평화의 시기, 시민권·여성권·아동권·성소수자 권리·동물권 운동이 잇달아 일어난 권리혁명의 시기를 거치면서 폭력이 감소해 왔다고 말한다.
이처럼 폭력이 감소하는 경향은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인류 역사에서 폭력은 늘 존재했지만 분명히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 안에 ‘내면의 악마들’과 ‘선한 천사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폭력이 감소한 것은 내면의 악마들을 억제하는 선한 천사들(감정이입, 자기 통제, 도덕 감각, 이성)의 힘이 강해졌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먼저 국가와 사법제도의 성립이다. 국가와 사법제도는 복수 충동을 억제한다. 유럽의 경우 법제도가 정비되자 살인율은 30분의 1로 줄었다. 다음으로 상업의 발달이다. 상업으로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서는 타인을 악마화하지 않는 것이 이익이다. 실제로 상업이 팽창한 중세 이후 폭력에 의한 사망률이 감소했다. 문화가 전반적으로 여성화한 것도 폭력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 이동성이 증가하고 매스미디어가 발달하면서 타인의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확대된 것, 그리고 헛된 폭력의 악순환을 멀리하려는 이성적 사고의 확산도 폭력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핑커는 “우리가 살면서 겪는 온갖 시련에도 불구하고,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온갖 문제에도 불구하고, 폭력의 감소는 분명 우리가 음미할 업적”이라며 “그 일을 가능하게 만든 문명과 계몽의 힘들을, 우리는 마땅히 소중히 여겨야 하리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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