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히13:16 |
---|---|
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이웃 사랑과 나눔의 정신
본문 : 히브리서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미국의 강철왕 앤드루 카네기는 훌륭한 사업가이면서 동시에 자선사업가였습니다. 그는 『재산을 가지고 죽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카네기는 경제 불황으로 인해 13세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밖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성공했습니다.그는 최선을 다해 돈을 벌었고, 가장 가치 있는 일에 돈을 썼습니다. 사회에서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한 카네기는 문화, 교육, 예술, 국제 평화를 위해 여러 연구소를 설립하고 자선사업에 헌신했습니다. 그는 1892년 뉴욕에 카네기 홀을 만들어 예술 진흥에 주력하고, 1902년 카네기 연구소를 창설했습니다.1904년에는 카네기 기금을 설립했으며, 1905년에는 카네기 교육 진흥재단을 세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1910년에는 카네기 국제 평화재단을 창립했으며, 각 지방의 교회에 약 7000대의 파이프 오르간을 기증하고 2800곳 이상의 도서관에 자금을 제공했습니다.
그가 일생 동안 사회에 기증한 돈은 지금의 화폐가치로 몇 조원이 넘습니다. 엄청난 물질을 이웃을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베푸는 삶을 기뻐하십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에게 과자 한 봉지를 사주고 난 뒤 과자 하나 달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어린아이가 과자를 움켜쥐고 과자 하나를 주지 않을 때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이런 아이에게 과자를 더 사주고 싶습니까? 이 아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움켜쥐고 나누어주지 않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일 때 물질의 복을 주고 싶으시겠습니까? 사람들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아무 것도 가져갈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위해 사용했던 물질은 가져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소자 하나에게 물 한 그릇 준 것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보상해 주십니다. 나누는 삶에서 진정한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손을 모두 폈을 때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물질을 현명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의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기를 잊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십시다. 소유를 위해서만 숨가쁘게 다니지 말고 나눔을 위해 우리의 지혜를 짜냅시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20:35)
이철환 작가의 『못난이만두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저녁 무렵, 만두집 유리문이 다르르 열렸습니다. 꾀죄죄한 차림의 아이가 만두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오늘은 좀 늦었구나?』
아저씨의 말에 아이는 웃기만 했습니다.
만두가게 주인아저씨는 따뜻한 눈길로 아이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잠깐만 기다려라. 아저씨가 얼른 따뜻하게 데워 줄게. 만두는 따끈해야 맛있거든......』
아이는 가지색 피멍이 든 얼굴을 숙이고 한쪽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습니다. 만두집 진열대 위에서 입을 꼭 다물고 앉아 있던 얼굴 뽀얀 만두들이 아이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엄마가 빨리 일어나셔야 할 텐데 걱정이구나. 반년이 넘도록 꼼짝을 못하시니 말이야......』
아저씨는 혀를 끌끌 차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만두를 봉지에 담았습니다.
『오늘 밤엔 눈이 많이 올 것 같구나. 하루 종일 햇무리 한 점 없이 하늘이 온통 잿빛이었거든......』
만두집 아저씨는 환하게 웃으며 말머리를 얼른 돌렸습니다.
『오늘은 못난이만두가 열 개밖에 안 나왔다. 운이 아주 좋은 날이지... 아무리 조심해도 옆구리 터지는 놈들이 나오기 마련이거든. 기술이 좋아도 어쩔 도리가 없어... 팔 수도 없는 놈들 너라도 맛있게 먹어 주니 그나마 다행이지..』
아저씨는 만두를 봉지에 담아 아이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잘 가거라. 내일 또 오구. 알았지?』
『네. 안녕히 계세요.』
만두집 아저씨는 문 앞에 서서 개구쟁이처럼 웃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뒷모습이 어둠에 지워질 때까지 아저씨는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만두집 아저씨는 옆구리가 터져서 팔 수 없는 못난이만두를 매일매일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아빠를 여의고 병든 엄마와 함께 사는 아이에게 주려고 만두집 아저씨는 매일매일 못난이만두를 만들었습니다. 만두 옆구리를 두 번 세 번 일부러 꼬집어서 못난이만두를 만들었습니다. 만두집 아줌마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매일매일 못난이만두를 만들었습니다. 못난이만두는 못난이만두가 아니었습니다. 못난이만두는 사랑이었습니다.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줄 지식이 없느니라』(잠29:7)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58:7)
이철환 작가의 곰보빵 중에 나온 『엄마 친구』 이야기를 하나 더 소개합니다.
저녁 무렵, 음식점 출입문이 열리더니 한 여자아이가 동생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초라한 차림의 아이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주방에서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아저씨, 자장면 두 개만 주세요.』 『언니는 왜 안 먹어?』
『응, 점심 먹은 게 체했나 봐. 아무것도 못 먹겠어.』
일곱 살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나무젓가락을 입에 물고 말했다.
『인혜 누나, 그래도 먹어. 얼마나 맛있는데.』
『누나는 지금 배 아파서 못 먹어. 오늘은 네 생일이니까 맛있게 먹어.』 큰아이는 그렇게 말하며 남동생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아이의 여동생은 건너편 테이블에서 엄마, 아빠랑 저녁을 먹고 있는 제 또래의 아이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영선이 주방에서 급히 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한참 동안 아이들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너 혹시 인혜 아니니? 인혜 맞지?』
『네, 맞는데요…….』
영선의 갑작스런 물음에 아이는 어리둥절해했다.
『엄마 친구야, 나 모르겠니? 영선이 아줌마…….』 『…….』
개나리같이 노란 얼굴을 서로 바라볼 뿐 아이들은 말이 없었다.
『한 동네에 살았었는데, 네가 어릴 때라서 기억이 잘 안 나는 모양이구나. 그나저나 엄마, 아빠 없이 어떻게들 사니?』
그녀는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어루만져 주었다. 그제야 기억이 난 듯 굳어 있던 아이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아줌마가 맛있는 거 해다 줄게.』
영선은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자장면 세 그릇과 탕수육 한 접시를 내왔다. 아이들이 음식을 먹는 동안, 그녀는 내내 흐뭇한 얼굴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히 계세요.』
『그래, 잘 가라. 차 조심하구…….자장면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와. 알았지?』 『네…….』
영선은 문 앞에 서서 아이들이 저만큼 걸어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어두운 길을 총총히 걸어가는 아이들의 등뒤로 흰 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가고 난 뒤 영선의 남편이 영선에게 물었다. 『누구 집 애들이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는데……..』
『사실은, 저도 모르는 애들이에요.. 엄마, 아빠가 없는 아이들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음식을 그냥 주면 아이들이 상처받을지도 모르잖아요. 엄마 친구라고 하면 아이들이 또 올 수도 있고 해서…….』
『그랬군. 그런데 아이들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아이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요. 주방 바로 앞이라 안에까지 다 들리더라구요.』 『이름까지 알고 있어서 나는 진짜로 아는 줄 알았지.』
『오늘이 남동생 생일이었나 봐요. 자기는 먹고 싶어도 참으면서 동생들만 시켜 주는 모습이 어찌나 안 돼 보이던지…….』
상처를 주지 않고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소리 없이 아픔을 감싸 준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3:17)
우리 민족은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훌륭한 상부상조와 협동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계, 향약, 두레, 품앗이 등이고, 이러한 이웃 사랑과 나눔의 정신 이야기가 바로 『흥부전』입니다. 흥부는 청빈을 신조로 삼고 낙천적으로 살면서도 자기보다 연약한 사람이나 미물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흥부는 어느 날 상처입은 어린 제비를 치료, 살려줌으로써 보은의 박씨를 통해 엄청난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놀부는 고의로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려 흥부와 같이 행함으로 복을 받으려다 큰 재앙을 만나는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놀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을 받겠다는 사람들의 대부처럼 현대 사회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몇년 전 어느 여자대학에서 흥부와 놀부 중 신랑감으로 좋은 사람을 택하라는 앙케트 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놀부가 훨씬 더 많았다는 충격적인 사례가 있었습니다. 착하기만 하고 무능한 흥부보다는 사회생활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잘버는 놀부형 신랑감이 좋다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이것이 팽배한 가치관이라면 우리 사회는 확실히 중병에 걸린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복을 받고 성공하는 길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확천금하겠다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져 최근엔 20~30대 사업가들이 대형 금융사고를 저질러 국가경제를 흔들기도 했습니다 흥부이야기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일맥상통하는 것은 그들이 어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선행한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할 사람의 도리를 행한 것뿐이었다는 점입니다. 흥부도 불쌍한 제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치료해서 살려준 것이고 사마리아인도 불한당을 만나서 죽게된 나그네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정성껏 치료해 준 것뿐이다.
고대인들은 도덕교육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를 강조, 선행하면 복을 받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보상받으려고 선행을 하게 된 것이다.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행하는 것으로 보람을 느끼고 만족해야지 조금 행하고 큰 상을 바라는 것은 합당치 않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주는 자가 복이 있다』(행20:35)고 하셨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마6:3)고 가르치신 교훈을 음미해야만 할 것입니다. 서양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고전적인 윤리를 가르친 철인들은 선행을 하면 복을 많이 받는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결국에 가서는 공리주의에 빠져서 상업적인 가치관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폐단을 절감한 임마누엘 칸트는 마땅히 해야할 일을 행할 때 보다 더 높은 가치관을 형성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선행을 많이 하고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조건부 신앙교육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고 먼저 남을 대접하는 사람이 복이 있은 사람이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활동하시던 시대에도 유대교인들은 영생의 복을 받기 위해서 선행을 많이 하고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고 믿었으나 예수께서는 멸시의 대상이었던 사마리아인과 같이 자발적으로 아무런 대가도 없는 일을 마땅히 해야할 도리로 생각하고 행하였을 때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영생의 복이 준비되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구제한다』 『자선을 베푼다』는 사람들의 경우에 자기 것을 베푼다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것을 내가 관리하고 있는데 그것을 어려운 형제와 함께 나눈다는 정신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을 받는 대상이 자존심도 상하지 않고 스스로 설 수 있는 날이 빨라지는 것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중 제일은 사랑입니다.(고전13: 13) 사랑은 인생의 소금이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 8- 10)
또한 사랑하는 자라야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요일4:7) 우리 주위에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이 늘 있습니다. 그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표현합시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잠3:27- 28)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우리 민족의 나눔의 정신을 이어받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함께 더불어 살기를 명령하시는 하나님, 주님의 명령대로 서로 도우며 섬기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이득을 위해 내 이웃을 해하는 일이 없도록 주님 안에서 깨끗하게 하옵소서.주님을 거역한 자를 참고 무궁한 사랑으로 용서하신 은혜를 깨닫고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남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고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성도로 거듭나게 하소서. 하나님께 받은 사랑에 비해 제가 드린 사랑이 너무나도 온전치 못함을 고백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는 자임을 언제나 기억하게 하소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이웃에게 표현하며 살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 갈릴리 공동체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jesuskorea, http://blog.naver.com/allcome)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