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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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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56245380 |
2008년 10월 26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마태복음 7장 1절~6절
설교제목 : 영성이 깃든 비판
<언론의 한계>
기독교 인터넷 신문에 실린 댓글이 생각납니다. 그 인터넷 언론에 대해서 한 독자가 글을 쓰기를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면서 비판만 하는 글을 읽다보니, 영혼이 너무 메말라 가는 것 같았다”면서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그래요. 맞는 말입니다. 저 역시 기독교 언론에 대략 10년 정도 일하면서 느낀 가장 절실한 고통은 “내가 자꾸 냉소적인 사람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비판한다는 것, 즉 남에 대해서 ‘말과 생각으로 심판한다는 것’, 그것은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어려운 일이기도 하고, 복잡한 일이기도 하고, 예민한 것이고,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해서 ‘비판하지 않는 삶’이란 있을 수도 없고, 또 있어서도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자에 대한 노자의 충고>
얼마 전 어린이 철학동화 『공자와 크는 아이』(도서출판 산하)를 보니까, 공자와 노자와의 만남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공자가 익히 명성이 알려져 있던 노자를 찾아갔답니다. 공자가 예를 갖추어 인사하고, 답을 얻고자 하는 절실한 마음으로 물었습니다. “어찌하면 이 세상을 혼란에서 구하고, 사람의 도리를 할 수 있을까요?”
공자를 유심히 살펴보던 노자가 말했습니다. “큰 장사꾼은 좋은 물건이 있으면 자랑하지 아니하고 깊이 간직한다오. 모름지기 군자도 덕을 내보이지 않는 법이라오. 잘난 척해서도 안 되며, 이룰 수 없는 꿈에 욕심을 부려도 안 된다오. 당신이 덕을 보이면 이를 시기하는 사람이 있을 거고, 당신이 세상을 구하려 하면 당신을 해치려는 무리가 따를 것이오.” … “총명하여 일의 이치를 잘 아는 사람이 자주 죽을 고비를 만나는 것은 남의 행동을 비판하기 때문이며, 공부를 많이 해서 유식한 사람이 자주 위험한 고비에 부딪치는 것은 남의 허물을 잘 지적하기 때문이라오. 부디 몸조심하시오.”
공자에 대한 노자의 충고를 읽다보니, 문득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아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되돌아서서 너희를 물어 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통합을 위한 비판, 원효의 화쟁사상>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 대목에서 원효의 화쟁사상에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원효의 화쟁사상은 ‘분쟁을 일으키는 비판’이 아니라, ‘화합하고 상생케 하는 비판’의 길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원효의 화쟁사상이란 무엇일까요? 제가 아는 범위에서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일반적으로 화쟁사상이란 원효의 사상적 근본을 구성하는 화회(和會)와 회통(會通)의 논리체계를 말합니다. 원효는 그 어느 교설이나 학설을 고집하지도 아니하였으며 또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매양 비판하고 분석하며 긍정과 부정의 두 가지 논리를 융합해서 보다 높은 차원에서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려 했습니다. 모순과 대립을 한 체계 속에 하나로 묶어 담는 이 기본구조를 가리켜 그는 화쟁이라 했습니다. 통일, 화합, 총화, 평화는 바로 이같은 정리와 종합에서 온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나열했다가 합하고(開合), 주었다가 빼앗고(與奪), 세웠다가 무너뜨리고(立破) 하는 논리를 이용하여 불교사상에서 나타나는 온갖 쟁론을 분석하고 총합하여 결국에는 조화롭게 어우러지도록 했습니다. 분석과 통일 또는 긍정과 부정의 어느 한 측면에서 정의하길 지양하고, 객관적인 논리에 근거하여 총합과 회통을 추구하는 논법이 화쟁의 특징입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가 심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너희가 남을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요, 너희가 되질하여 주는 그 되로 너희에게 되어서 주실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에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줄테니 가만히 있거라'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그 때에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에서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아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되돌아서서 너희를 물어 뜯을지도 모른다." (마태 7:1~6, 표준새번역).】
오늘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즉 오늘 단편(斷片)적인 예수님의 말씀 너머에 세워져 있는, 더 깊고 높고 완전하고 더 풍성한 예수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그건 한 마디로 ‘제대로 된 비판’이었습니다. 피상적인 비판이 아니고, 남을 헐뜯기 위한 비판이 아니고, 남 앞에서 잘난 척하기 위한 비판도 아니고, 나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비판도 아니었습니다. 정확한 비판이었습니다. 소름이 끼칠만큼 무서우리만치 냉철한 정신으로 모든 것을 ‘비판’하는 삶, 그걸 예수님께서 일깨워주셨고, 그런 냉철한 비판을 통해서 재구성되는 새로운 교회,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이 곧 하느님의 나라임을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음성’으로 일깨워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비판은 원효의 화쟁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메시지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마태 5:17).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정리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영성이 깃든 비판’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이런 저런 것들에 대해서 ‘비판’하고 ‘심판’합니다. 교회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우리는 ‘비판’하고 또 ‘심판’합니다. 그리고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할 포인트는 ‘살리는 비판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죽이는 비판’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그것-, 교회이건, 사회이건, 역사이건, 사람이건 간에- 그것에 대해서 비판할 때 “그것을 살리기 위해서 냉혹하게 비판하는 삶” 그것을 예수님께서 일깨워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비판의 영성’이고, ‘영성적 비판’인 것입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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