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겔37:1-14 |
---|---|
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57216817 |
2008년 11월 16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에스겔 37장 1절~14절
설교제목 : 바람의 영성
그 때에 그가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생기에게 대언하여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렇게 일러라. '나 주 하나님이 너에게 말한다. 너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불어와서 이 살해당한 사람들에게 불어서 그들이 살아나게 하여라.” 그래서 내가 명을 받은 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 속으로 들어갔고, 그래서 그들이 곧 살아나 제 발로 일어나서 서는데, 엄청나게 큰 군대였다.(에스겔 37:9~10, 표준새번역).
<성경 이야기>
며칠 전 새벽에 일어나서 읽고 있던 성경을 펼쳤는데, 그 유명한 에스겔서 37장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에스겔서는 바벨론 제국에 포로로 잡혀가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기록된 예언서입니다. 특히 에스겔서 37장은 절망감에 휩싸여 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서, 그 이스라엘 사람들의 위대한 역사가 다시금 찬란하게 부활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에스겔서의 백미’입니다.
그 새벽에 에스겔서 37장을 읽고 잠깐 묵상하는 중에, 저는 문득 ‘생기’라는 말에 관심이 갔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금 찬란하게 부활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생기’, 즉 바람(숨, 영, 호흡)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바람’에게 대언할 것을 명령하셨고, 그 대언을 통해서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와, 죽어 있는 이들에게 들어가서, 그 죽은 자들을 다시 살려내는 놀라운 기적이 있어났던 것입니다. 즉 바람을 매개로 해서, 죽은 이스라엘이 다시 살아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람’은 하느님의 호흡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그 코에 ‘바람’을 불어넣으심으로 말미암아 최종적으로 아담이 창조물로서 완성되는 이치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生靈)이 된지라 /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기 2:7).
<바람에 대한 명상>
바람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기압의 변화 또는 사람이나 기계에 의하여 일어나는 공기의 움직임”입니다. 그러나 이건 바람의 본질이 아닙니다. 사전적인 정의, 혹은 과학적인 탐구로서는 바람이 갖고 있는 신령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바람’에 담겨져 있는 더 깊고 높은 의미와 메시지는 오직 ‘신앙’적 맥락에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곧 영성적 탐구를 통해서만, 바람이 갖고 있는 본래의 메시지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람이 갖고 있는 영성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건 앞서서 잠깐 말씀드린 것처럼, “하느님의 호흡”입니다. 이건 그냥 상징적 표현도 아니고, 문학적 표현도 아닙니다. 문자 그대로 “바람은 하느님의 호흡”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바람을 맞으면 ‘죽은 것들’이 살아납니다. 죽어 있는 생명체가 살아나고, 죽어 있는 ‘마음과 생각’이 살아나고, 죽어 있는 교회가 살아나고, 죽어 있는 사회가 살아납니다.
<바람을 맞이하는 산책>
최근 들어서 산책(걷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걷기가 비만치유에 좋을 뿐 아니라 당뇨병과 골다공증을 예방하고, 뇌졸중과 심장마비 발생 가능성을 낮춘다”는 의사들의 전문적 소견이 널이 퍼지면서, 걷는 운동이 이곳저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듯 합니다. 물론 좋은 일입니다만, 그러나 걷는 산책에 육체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걷는 산책에는 철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고 더 나아가서 걷는 산책에는 영성적 메시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걷는 산책을 통해서 천 갈래 만 갈래로 얽혀 있던 ‘생각과 마음’이 정돈되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지혜들을 찾아내는 … ‘걷는 산책의 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소중한 또 한 가지 차원, ‘걷는 산책’에는 영성적 메시지가 있습니다. 걷는 산책을 통해서 하느님의 호흡인 바람을 감격스럽게 맞이할 수 있고, 그 바람을 통해서 우리는 죽어 있는 것들을 다시금 살려낼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정리하면서 마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바람의 영성”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폴 발레리라는 프랑스 시인(1871.10.30~1945.7.20)이 있었습니다. 그가 쓴 시 중에 『해변의 묘지』가 유명합니다. 제가 상상해보건대, 어느 날 폴 발레리가 고독감과 절망감,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 같은 무력감, 삶의 어떤 것에서도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삶의 회의에 빠져 있는 때, 즉 절망과 공포, 고독의 늪에 빠져 있던 어느 날, 그는 바닷가로 갔습니다.
그리고 바닷가 묘지에서 ‘바람’을 만났습니다. 즉 우리 식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느님의 호흡이신 ‘바람’을 맞이하면서, 그의 내면에서 죽어 있는 것들을 다시금 살려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해변의 묘지’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마셔라, 내 가슴이여, 바람의 탄생을! / 신선한 기운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 나에게 내 혼을 되돌려준다 ……오 엄청난 힘이여! / … /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폴 발레리가 발견한 ‘바람의 영성’은 에스겔 선지자가 발견한 ‘바람의 영성’과 동일한 맥락이었습니다. 폴 발레리는 해변의 무덤가에서 불고 있었던 하느님의 호흡을 맞이한 후에, “바람이 분다 살아야 겠다”고 외쳤고, 에스겔 선지자는 억울한 주검들이 흩어져 있는 어둠의 골짜기에서 하느님의 생기로 말미암아 마른 뼈들이 되살아나는 기적을 목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람입니다. 하느님의 호흡입니다.
죽어가고, 병들어 있는 것을 고치고자 한다면, 바람을 맞이하면 됩니다. 산으로 가서, 바다로 가서, 들판으로 뛰어가서 ‘바람’을 맞이하면 ‘회복’됩니다. 그걸 에스겔 선지자와 폴 발레리가 일깨워 주었습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