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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히1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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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수도교회 http://blog.naver.com/malsoom/57551877 |
2008년도 11월 23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히브리서 11장 38절
설교제목 : 세상보다 큰 사람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개역성경).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와 산과 동굴을 헤매며 다녔습니다.”(표준새번역, 히 11:38).
<믿음으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주로 쓰는 말중에 “믿음으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특히 히브리서(11장)에 자주 등장하는 성경용어이기는 합니다만, 그런데 이 말이 우리 삶 속에서 뭔가 잘못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무작정 도전할 때 ‘믿음으로’라는 말을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건 대단히 잘못된 용어사용입니다. “믿음으로”의 본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의 본 뜻은 무엇일까요? 제가 이해한 바로는, “믿음으로”는 막연한 고집이나 어거지의 굳은 의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뭔가 다른 용어로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테면 “믿음으로”가 아니라 “봄으로” 혹은 “들음으로” “느낌으로” “앎으로”로 바뀌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아니면, 조금 더 세심하게 정리해서 “봄(들음, 느낌, 앎)에 대한 믿음으로”라는 용어로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의 생각>
바울이 이해한 믿음의 차원을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봄”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바탕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였습니다. 즉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의 뿌리는 ‘믿음의 세계’인데, 그 믿음의 세계는 한 마디로 보이지 않는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보이지 않는 ‘믿음의 세계’가 현실의 보이는 세계로 진입해서 뭔가 위대한 결실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우리가 주목해야할 세계는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라고 말할 때, 그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봄(들음, 느낌, 앎)에 대한 “믿음으로”가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11장)에서 바울은 “봄에 대한 믿음으로” 용감하게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습니다. 몇 사람 구체적 예를 들고 있습니다. △가인보다 더 낳은 제사를 드린 아벨,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으로 옮겨진 에녹, △멀쩡하게 좋은 날씨임에도 산에 올라가서 배를 만들었던 노아,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 △100세에 이르는 노년의 때에 아이를 낳은 사라.
<우리가 사는 세상>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가요? 우리가 몸 담고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해서 보면서 그 봄에 대한 믿음으로 살고 있나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현실세계의 사람들은 ‘보이는 것들’에만 집착하며 살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집, △눈에 보이는 돈, △눈에 보이는 회사실적, △눈에 보이는 학교성적, △눈에 보이는 명예, △눈에 보이는 정치적 출세, △눈에 보이는 사랑, △눈에 보이는 교회건물, △눈에 보이는 교인숫자, △눈에 보이는 교회헌금.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귀함을 분명하게 알고, 그 존귀한 세계의 부름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사람들과 인생관 자체가 틀립니다. 가치관이 전혀 다르죠. 그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살이에 대한 평가>
요즘 미국경제가 위기적 상황에 봉착하면서 일반 매스컴들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주식 가격이 떨어지니, 경제가 죽으니, 실업자가 늘어나니, 소비가 위축되니, 경제공황이 오니 … 물론 저도 현실세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니만큼 어느 정도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만, 솔직히 큰 걱정은 안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태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상했던 상황으로서 “올 것이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현재 삶의 틀로서 형성시킨 ‘현대문명’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현대문명의 핵심적 정신(?)이 무엇인가요? 그건 ‘보이는 세계’에 대한 극도의 집착일 뿐이었습니다. ‘보이는 세계’에 대한 극도의 집착은 결코 영원할 수도 없고, 오래가지도 못합니다. 곧 끝장이 나는 것이지요.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정리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세상보다 큰 사람”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일까요? 그건 한 마디로 ‘세상’보다 큰 사람입니다. 여기서 ‘세상’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가정’보다, ‘직장’보다, ‘교회’보다, ‘민족’보다, ‘국가’보다, ‘지구별’보다 …… 더 큰 사람입니다.
만약 우리가 세상(가정, 직장, 교회, 민족, 국가, 지구별) 안에서 보이는 세계에 대해서 집착하면서 살다가 삶을 마친다면, 이는 하나님의 사람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살 수 있는 더 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가정, 직장, 교회, 민족, 국가, 지구별)을 초탈해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교유하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비록 “세상에 머리둘 곳이 없어서”(예수) “광야와 산과 동굴을 헤매며”(히 11:38, 바울) 다닐 지라도, 그 마음과 생각에 영원한 하느님의 호흡이 살아 있으므로, 언제나 어디서나 평안할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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