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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겔47: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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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58574931 |
2008년 12월 14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에스겔 47장 1절~12절
설교제목 : 생수의 근원
이 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 죽은 물이 살아날 것이다. 이 강물이 흘러가는 모든 곳에 서는, 온갖 생물이 번성하며 살게 될 것이다. 이 물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면, 그 물도 깨끗하게 고쳐질 것이므로, 그 곳에도 아주 많은 물고기가 살게 될 것이다. 강물이 흘러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모든 것이 살 것이다. … 그것은 그 강물이 성소에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에스겔 47:1~12).
<성경 이야기>
오늘 성경말씀은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던 에스겔 선지자가 이제 거의 최종적으로 본 환상 이야기입니다. 이제 곧 멸망당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고, 파괴당한 거룩한 성전이 재건될 것인데, 그 예루살렘 성전의 밑에서 발원된 ‘거룩한 강물’이 이스라엘을 살리는 생수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환상입니다.
며칠 전 이 성경 이야기를 읽는 순간 잔잔한 감동이 제 마음 가운데 일어났었습니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우리 수도교회의 사명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목회자로서 나의 사명도 바로 그것이다. 더 나아가서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과 하나님을 섬기는 한국교회 성도들의 사명이 바로 그것이다. ‘생수의 근원’이 되는 것, 그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치료해 드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우리 신앙인들의 마음 가운데서 발원된 생수의 강이 저 세상을 향하여 흐르고 또 흘러서, 그 생수의 강물을 마시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평화, 기쁨과 행복의 에너지가 퍼지게 하는 일, 그게 우리의 행복한 사명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일순 이야기>
제가 컴퓨터 즐겨찾기 목록에 넣고 가끔 들어가는 사이트 중에 ‘무위당을 기리는 사람들- 장일순 선생의 홈페이지’(www.jangilsoon.com)가 있습니다. 얼마전 그 곳에 들어가보니, 장일순 선생과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들이 실려 있었습니다. 오늘 그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장일순 선생과 가깝게 지내던 최병하 씨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최병하 씨는 원주에서 제재소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에게 돈을 빌려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도대체 돈을 갚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독촉을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화가 난 최병하 씨는 결국 법으로 처리 할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서류를 다 갖추어 놓고 장일순을 찾아갔습니다. 기관에 서류를 내기만 하면 되는 단계였습니다.
그러나 최병하의 이야기를 다 듣고 장일순이 한 말은 이 것 하나였습니다. "너 그 돈 없으면 죽니?" 그 돈이 없다고 최병하 씨가 죽을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최병하 씨는 그때 제재소를 하고 있었습니다. 살만 했습니다. “그 돈 없어도 너는 살지 않니? 네 말대로 하면 그 사람은 죽는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너도 발 뻗고 못 잔다. 평생 그 원한을 어떻게 받으려고 그러니? 포기해라.”
적지 않은 금액이었습니다. 그 돈을 포기하라고 장일순 선생은 말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받아 들일 수 없어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는 최병하에게 장일순은 아주 못을 박았습니다. “니가 그 돈이 없어 밥을 못 먹는다면 내가 쌀 값을 마련해주마,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포기해라, 없는 돈이다 생각하고 편안하게 지내라, 그 사람이라고 속이 편하겠냐. 그 사람도 발 뻗고 못 잘거다 아마."
그날 밤 고민 끝에 최병하 씨는 그 일과 관련된 서류 일체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렇게 하자 그 돈에 대한 집착이 떨어져 나가며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나중에라도 갖다주면 고마운 일이고, 안 가져오면 그래도 그만이라고 마음을 바꾸어 먹었습니다. 그렇게 탁 놓아버리자 비로서 맘 편히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거금을 포기하게 하다’ 중에서).
‘원주에 살다간 예수’라는 호칭을 얻고 있는 장일순 선생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살아계셨을 때 만나 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 하는 아쉬움이 남는 사람들 중의 한 분이 바로 장일순입니다. 몇 년 전부터 장일순 선생에 대한 글들을 관심을 갖고 읽고 있는데, 읽을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곤 합니다. 특히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저의 모난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꽁꽁 얼어붙으려던 생각이 따뜻하게 녹는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잠시나마 행복해 지곤 합니다. 그래서 자꾸 장일순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장일순에 대한 또 다른 글을 최근에 읽었습니다. 윤형근 씨(한살림 ‘모심과 살림연구소’ 부소장)가 쓰신 ‘오늘, 무위당 선생을 생각하다’라는 글입니다. 그 글에는 이런 내용이 실려있었습니다. “길을 잃고 미혹에 빠졌을 때 지혜를 구할 스승이 있는 자는 행복한 사람이리라. 세상이 어지럽고 소란스러울 때, 길을 열어줄 어른이 계신 곳은 성숙한 사회일 것이다. 세상이 요동치는 이즈음, 이미 세상을 떠나셨건만 사람들은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말씀과 발자취를 그리워한다. 시인 김지하의 스승이었고,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이 단 한번 보고 홀딱 반했다는 사람, 목사 이현주가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사람이라 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유홍준이 어디를 가든 함께 가고 싶다 했던 사람, 소설가 김성동과 <아침이슬>의 김민기가 아버지로 여기고, 판화가 이철수가 진정한 뜻에서 이 시대의 단 한 분의 선생님이라는 꼽았던 사람 ….”
누군가에게 ‘스승’이 될 수 있고, 누군가를 ‘한번 보고 홀딱 반하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이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 ‘함께 여행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고, 피가 섞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아버지’가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 ‘단 한 분의 선생’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장일순이었습니다. 오늘 성경 이야기의 언어로 말씀드리자면, 장일순은 ‘생수의 근원’의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일순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평화, 안식과 행복을 나눠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긍휼의 영성으로>
그렇다면 장일순 선생이 ‘생수의 근원’처럼 살아갈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물론 그것에 대해 여러 가지차원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만, 오늘 제 상황에서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장일순 선생이 ‘긍휼의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일순은 긍휼의 사람이었습니다. 긍휼[矜恤], 즉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가족은 물론이고, 그가 만나는 모든 이웃들, 거리의 상인들과 거지들 … 또한 그를 괴롭혔던 독재권력의 하수인들, 그리고 세상 모든 만물의 생명들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영성을 장일순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긍휼의 영성이 그를 생수의 근원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장일순의 어록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주 부드러워야 할 필요가 있어. 부드러운 것만이, 생명이 있는 것만이 딱딱한 땅을 뚫고 나와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거든…… 사회를 변혁하려면 상대를 소중히 여겨야 해. 상대는 소중히 여겼을 적에만 변하거든. 무시하고 적대시하면 더욱 강하게 나오려고 하지 않겠어?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면 다르다는 것을 적대 관계로만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말이야.” ('좁쌀 한 알' 중에서). 장일순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을 허투루 대하지 않고 공감과 연민, 자애로 감싸는 ‘긍휼의 영성’을 가진 이가 바로 무위당 장일순이었습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생수의 근원’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생수의 근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다짐할 수 있는 귀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와 아울러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 이웃들, 원수들, 적들 … 생명들에 대해서 ‘긍휼의 영성’을 소유할 때, 우리는 비로소 ‘생수의 근원자’가 될 수 있음을 유념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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