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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마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390 추천 수 0 2014.10.03 09:5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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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14:22-33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4년 8월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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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마14:22-33, 성령강림후 제9주,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대구샘터교회 근처에 수성 못이 있습니다. 대구에서는 가장 유명한 못입니다. 어떤 사람이 수성 못의 물위를 저벅저벅 걸어 건너가는 장면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외계인이나 유령처럼 보일 겁니다. 아니면 신발에 특수 장치를 장착한 것으로 보이겠지요. 사람을 비롯해서 네발 가진 짐승은 아무도 물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물위를 걸었다는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둘 중의 하나일 겁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얼마든지 물위를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든지, 또는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더라도 물위를 걷는 건 불가능하다고, 그런 이야기는 제자들이 뭔가를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이에 관해서 보도하고 있는 오늘 설교 본문을 우선 찬찬히 살펴보겠습니다.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이 있은 뒤에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라 말씀하시고, 당신은 혼자 기도하러 산에 오르셨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바람이 크게 일어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가 앞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제자들 중에 어부들이 여러 명 있었지만 풍랑이 너무 심한 탓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이 밤새도록 계속되었습니다. 새벽이 가까워올 때쯤 예수님이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까이 왔다고 합니다. 그 순간에 제자들이 얼마나 놀랬을지 상상이 갑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26, 27절에서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호수 위를 걸어오는 예수님을 보고 저건 유령이지 사람이 아니라고 한 제자들의 말은 옳습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고민에 빠집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무조건 믿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성경이 전하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럴 때는 우선 가장 확실한 사실부터 확인해나가는 게 좋습니다.

 

가장 확실한 사실은 마술을 통해서 사람의 눈을 속이거나 일부러 거짓말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이 물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부력을 이용해서 수영은 할 수 있지만 물위를 두 발로 걸을 수는 없습니다. 물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는 유령입니다. 또 하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 즉 사람은 물위를 걸을 수 없다는 사실과 예수님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볼 때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물위를 걷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기자를 비롯해서 똑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마가복음과 요한복음 기자들이 없는 이야기를 꾸며냈다는 말이냐, 하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성서기자들은 거짓말을 하거나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물위를 걸은 게 아니라 호숫가를 걸었을 뿐인데, 밤새 풍랑과 싸우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제자들이 물위를 걸은 것으로 착각했다는 겁니다. 또 하나의 다른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기억과 구전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원래 일어났던 사건의 실체와는 조금씩 다를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설명이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약간의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셨는지의 여부가 여기서 핵심 사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물위를 걸으셨다는군, 정말 신통한 능력이 있으신 분이야.’ 하고 생각하는 건 성경읽기에서 크게 빗나간 겁니다. 본문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평소 나서기를 좋아하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고 자기도 물위를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예수님이 ‘오라.’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물위로 뛰어내렸습니다. 그 순간에 그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면서 물속으로 빠졌습니다. 당황한 그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베드로의 언행이 돌출적으로 보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밤새도록 풍랑과 싸우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러다가는 난파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을 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보고 빨리 안전한 곳으로 먼저 피하시라고, 우리가 곧 뒤따르겠다고 말하는 게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기도 물위를 걸어보겠다고 불쑥 제안한 겁니다. 그러다가 물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와 얽힌 이 에피소드는 똑같이 본문 사건을 이야기하는 세 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에만 나옵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베드로의 이런 에피소드를 통해서 본문의 핵심을 더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 핵심은 나를 구원해달라는 베드로의 외침이 있은 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설명에 담겨 있습니다. 본문 31, 32절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베드로라는 이름은 ‘주는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의 한 사람인 시몬에게 새로운 이름으로 주신 것인데, ‘반석’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믿음이 반석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거꾸로 믿음이 작은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그의 믿음이 작은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호수로 뛰어들기는 했지만 풍랑으로 인해서 그런 믿음이 흔들렸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 개인이 아니라 마태공동체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였습니다. 믿음이 반석처럼 강한 것 같아 보였는데 실제로는 믿음이 작고 약했습니다. 풍랑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계속 흔들렸습니다. 이들에게 풍랑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요?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입니다.

 

1) 인생살이의 실제적인 어려움들이 하나의 대답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인생살이가 늘 편안하게 전개되는 게 아니라 어려운 일들이 부단히 일어납니다. 병이 들고, 실업자가 되기도 하고, 배신도 당하고, 큰 사고를 당해서 크게 다치거나 죽기도 하고 가족이 그런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도 반복해서 일어납니다. 이럴 때 신앙이 흔들입니다. 2) 삶의 무의미가 또 하나의 대답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도 없고, 생명의 충만감도 없고, 삶이 지루하고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로 인해서 늘 기쁨이 넘칠 줄 알았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 베드로가 본 풍랑처럼 우리를 두렵게 하고, 우리의 신앙을 근본에서부터 허뭅니다. 3) 다른 하나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는 뭔가 믿음의 확신이 있었던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게 희미해집니다.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지는 겁니다. 이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삶에서 별로 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초기 기독교와 기독교인들은 우리와 달리 아주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그래서 믿음이 출중했을 거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직접 목회를 하던 시대였고, 성령의 활동이 지금보다 훨씬 강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 그들의 믿음이 우리보다 좋았다고 여기면 곤란합니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영성가들과 신학자들과 수도자들은 늘 믿음이 확실해서 어느 한 순간도 흔들림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상대적으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두 다 신앙적으로 흔들립니다. 요즘도 자신의 믿음이 굉장히 강해서 남을 가르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를 비롯한 교회 명망가들에게서 그런 언행들이 많이 보입니다. 기도했더니 기적처럼 모든 일들이 해결되었다거나, 하나님으로 인해서 늘 기쁨이 차고 넘친다고 말합니다. 그런 말에 속지 마십시오. 어느 한 순간에 그런 경험을 할지 모르나 계속 그런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에서도 ‘작은 믿음으로 인해 흔들리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삶이 계속 흔들립니다. 그걸 감추고 있을 뿐입니다. 자신이 행복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 하고, 더 나가서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행복한 조건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합니다. 그런 조건들을 성취하지 못하면 불행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더 행복한 거 같다거나, 거꾸로 저 사람은 나보다 불행할 거 같다고 판단합니다. 모든 관심이 거기에 쏠려 있습니다. 티브이 드라마는 그런 생각을 우리에게 주입시킵니다. 그런 걸 보면서 부러워하고, 또는 대리만족합니다. 거기에 나오는 것은 실체가 아니라 허상입니다. 티브이를 바보상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허상을 실체로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행복과 불행의 문제는 물질적인 것에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남을 위해서 희생봉사 하는 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 자기 삶을 헌신했다고 해서, 그리고 그런 일로 괜찮은 상을 받고 명예를 얻었다고 해서 행복한 건 아닙니다. 가끔 이런 연예계 뉴스를 들을 수 있습니다. 티브이에 잉꼬부부로 나왔는데 결국 이혼했다고 말입니다. 잉꼬부부 행세를 할 때 이미 폭행이나 돈 문제로 멀어진 상태였다는 겁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전(前)대법관이었던 분의 자제가 며칠 전에 자살했다고 합니다. 뉴스 보도에 따르면 그 이유가 취업 문제였다고 합니다. 크고 작은 일들로 인해서 우리의 삶은 계속 흔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벗어난 사람은 없으니,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포즈에 속지 말도록 하십시오.

 

물속에 빠진 베드로의 손을 잡으신 예수님은 그를 향해서 ‘왜 의심하였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심은 믿음이 작은 사람의 영적 태도입니다. 의심은 헬라어로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베드로에게는 풍랑을 피해야 하는 길과 예수에게 가야 하는 길이 동시에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길을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의심입니다. 결국 물속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두 가지 길이 우리의 삶에서 실제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여러분은 잘 아실 겁니다. 이것은 우리의 운명과 연관된 것입니다. 하나의 길은 예수에 대한 전적인 믿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얻는 삶의 조건에 대한 염려입니다. 이 두 가지 길을 동시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지, 이것과 더불어 저것은 안 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음 생활을 한다고 하나 실제로는 세상에 대한 염려를 떨치지 못합니다. 우리의 운명에 무언가를 채워서 좀더 안전한 길을 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풍랑을 보고 무서워지고, 결국 물에 빠집니다. 어떻게 예수에 대한 믿음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냐, 그것은 신앙적으로만 타당한 거지 실제 삶에서는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으신가요? 노골적으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아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제법 많을 겁니다. 이런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 거는 없지만, 그게 바로 믿음이 작은 자라는, 즉 의심하는 자라는 사실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그런 시행착오를 많이 거쳤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기자는 앞으로 그런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말라는 뜻으로 바른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예수에 대한 전적인 믿음의 길로 나서라는 겁니다. 물에 빠진 베드로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물속에서 베드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절대적으로 무기력한 절체절명의 상황에 빠졌습니다. 스스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밖에서 와야 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손을 붙들고 말씀하신 뒤에 함께 배에 오르시자 곧 풍랑이 그쳤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존할 때만 구원이 임하고 풍랑과 같은 세상의 모든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뜻입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은 예수와의 관계입니다.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완전히 맡길 수 있느냐 하는 게 관건입니다. 그게 안 되면 우리는 의심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숙명입니다. 

 

당신 말을 들으니 예수를 잘 믿어야 한다는 것은 알아듣겠으나 그게 현실로 와 닿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걸 제가 억지로 설명하기는 힘듭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히 교회에 잘 나와서 헌금과 전도 많이 하고 교회에 헌신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거지를 예로 들겠습니다. 제가 딸들에게 설거지의 즐거움에 대해서 간혹 말합니다. 그릇을 손으로 만질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해봐라, 손과 수세미와 세제와 그릇 사이에서 요정처럼 움직이는 물을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그걸 존재론적으로 느껴봐라, 그러면 설거지 행위와 일치되는 기쁨을 발견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설거지 영성이라고 그럴듯하게 이름 붙인 이런 말이 딸들에게 전달될까요? 아버지의 말이니까 어쩔 수 없이 설거지는 하겠지만 즐거움까지는 모르겠다고 하겠지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와 닿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의심이 많으면 무서움이 많아지고, 무서움이 많아지면 물속에 빠집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

 

초기 기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도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는 한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반복해서 풍랑을 무서워할 것이고, 물속에 빠질 것입니다. 삶의 무의미와 절망으로 빠져듭니다. 거꾸로 삶의 환락에 도취하는 것도 역시 무의미와 절망의 다른 모습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잠시 물속의 상황을 망각할 수는 있어도 거기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과 구원이, 즉 인생살이가 꽤 복잡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단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곧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여러분은 물속에서 나와 예수님과 함께 배에 오르신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 경험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신가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생명과 구원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온전히 믿을 때 여러분의 인생에서 바람이 그치고 영혼의 평화가 은총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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