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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일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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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이성과 믿음
본문: 요일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벌써 저녁이네. 우리 내일 만나자.』 하루살이가 묻습니다. 『내일? 내일이 뭔데?』 메뚜기는 자세히 설명해 줍니다. 『잠시 후면 온 세상이 캄캄해지고 하늘에서 별이 반짝일 거야. 그렇게 어둔 밤이 지나고 나면 다시 날이 밝아 오는데, 그게 바로 내일이야.』 하지만 하루살이는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내일』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루살이에게는 오늘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하루살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메뚜기는 할 수 없이 옆에 있는 개구리와 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한 계절이 지납니다. 날이 추워지자,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말합니다. 『메뚜기야, 우리 내년에 놀자.』 『내년? 내년이 뭔데?』 『메뚜기도 한철』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메뚜기는 도대체 『내년』이 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자 개구리가 친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날이 점점 더 추워지면 온 세상은 하얀 눈으로 덮여. 그러면 나는 따뜻한 땅속에 들어가 잠을 잔단다. 그러다 새싹이 돋는 봄이 오면 땅 위로 나오지. 그게 바로 내년이야.』 하지만 메뚜기는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내년』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생각으로 부활의 약속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해할 수 없어도 믿어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고 평생을 걸어간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에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유명한 과학자가 자신의 이론을 황제에게 장황하게 설명하였답니다. 설명을 듣고 난 황제는 『그런데 왜 당신의 이론에는 신이 자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그 과학자는 자신있게 “전하, 제게는 이제 더 이상 신이란 전제는 필요 없습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계몽주의적 이성만을 믿는 사람들에게 신앙이란 과학의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에 불과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없음을 자랑스러운 지식으로 자부하던 이들 과학자도 하녀가 들어오면 이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진다고 합니다. 그들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쉿! 저 하녀 앞에서는 절대로 신이 없다고 해서는 안되네. 그렇게 되면 하녀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
하나님을 떠난 이성은 하나님마저 자신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뿐입니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로 근대인과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성이었습니다. 이성이 만물의 척도이었습니다. 이성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이 폐기 처분되었고, 이성을 탐구하는 지식이 근대인과 현대인의 우상이었습니다. 반이성적이라든가 반지성적이라는 말은 모든 논의의 근거를 부인하는 사형 선고처럼 받아 드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계 제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이런 이성 만능주의의 신앙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소위 포스트 모던의 시대를 살게 되었습니다. 후기 모던의 사람들은 더 이상 이성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인간 이성이 고작 만들어 낸 결과가 세상을 잿더미로 만든 재앙의 마당이었으니까. 비로소 후기 현대인들은 이성이 아닌 영성의 마당으로 복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더러는 뉴 에이지 신앙으로 더러는 폐기처분했던 삼위일체 신앙으로 복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비의 문을 다시 두드리게 된 것입니다. 포스트 모던의 세상에서는 사실상 더 이상 이성이냐 영성이냐의 선택이 이슈가 아닙니다. 어떤 영성이냐가 이슈일 따름입니다. 뉴 에이지인가, 하나님인가 입니다. 불타 영성인가 그리스도 영성인가 입니다. 이슬람 영성인가 기독교 영성인가 입니다. 그런데 이 분별을 위해 우리는 다시 이성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은 아직도 우리의 이성을 조명하시고 계몽하신다고 믿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복음주의 신학자인 앨리스터 맥그라스는 넓은 의미에서 삼위일체를 믿는 모든 사람은 다 신비가(mystic)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신비주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비의 영역에 대한 탐험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신비주의자가 되지 않고도 신비의 여행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기독교가 영성을 등지고 만일 우리가 방황하는 후기 현대인들에게 해답을 주지 못하면 오늘의 기독교와 교회는 박물관의 유물로 전락할지도 모릅니다. 이 위대한 영성의 여행을 위해서 이성과 신비는 화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화해의 촉매자는 오직 성령과 말씀이십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우리의 이성은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그리고 이성은 말씀의 권위아래서만 온전히 그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또 한편 성령의 인도를 통해서만 신비는 그 신비의 궁극자이신 하나님께로 온전하게 나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울타리 안에서만 신비는 가장 안전하게 그 얼굴을 드러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성과 신비의 화해로 풍성한 미래 교회를 꿈꿉니다.
종교와 과학은 대상을 보는 관점부터가 다릅니다. 종교는 대상을 볼 때 “왜”라는 의문에서 시작하여 대상의 존재 이유와 가치에 대해서 말하고, 과학은 “어떻게”라는 방법에서 시작하여 대상의 분석과 현상을 논합니다. 종교는 사물을 신앙의 눈으로 보고, 과학은 이성의 눈으로 봅니다. 이렇듯 두 영역은 출발부터가 다르기 때문에 종교를 비이성적이라 단정해서도 안 되고, 과학을 비신앙적이라 매도해서도 안 됩니다. 서로 약점을 보완해 나갈 뿐입니다. 하나님을 과학적 이성으로 분석, 비평해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구소련의 우주 비행사 티토프가 시애틀에 와서 기자 회견을 하는 중에 『내가 이 지구 위에 올라가서 지구를 몇 바퀴 돌아보았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더라』라고 말했습니다. 얼마 후에 같은 장소에서 미국의 우주 비행사 글렌은 『나는 우주여행을 하면서 우주의 찬란한 광경을 구경하였는데 지구 위에나 이 공간에나 똑같은 자연법칙이 운행되어서 우주여행을 완전히 마치고 돌아올 수 있음을 보니 과연 하나님은 계시더라.』라고 말했습니다. 똑같은 광경을 보았지만 그들의 관점은 이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은 먼저 믿고 아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과 이성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맙시다.
찬송가 545장 (통 344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를 함께 부르겠습니다.
1.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2. 이 눈에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이미 얻은 증거대로 늘 믿으며
이 맘에 의심없이 살아갈 때에 우리 소원 주 안에서 이루리
3. 당신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한 주 하나님 아버지는 참 미쁘다
그 귀한 모든 약속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무슨 일이 있을까
<후렴>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 버리고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성경학자 토레이는 성경을 보며 큰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며 구원에 확신은 있었지만 학자로써 지식을 점점 쌓아갈수록 성경말씀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인생에서 어떤 문제에 처할 때 성경이 말하는 답과 자신의 이성이 내리는 답은 언제나 달랐고, 또 자신이 내린 답이 더욱 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갈림길에 설 때마다 언제나 자신의 이성에 따라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고 그는 이런 결정들을 후회하며 말했습니다.
『제가 옳다고 생각하며 내린 결정들은 당장은 그래 보였지만 결국엔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제가 느꼈던 것은 하나님이 나보다 더 많이 알고 계신다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성경의 답이 결국엔 정답이었다는 토레이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아무리 많이 지식을 쌓아도 하나님의 지혜에는 티끌만큼도 미치지 못합니다. 성경을 따르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인생의 방법임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믿음으로 살 때 반드시 세상에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 기도: 굳건한 믿음을 기뻐하시는 주님, 이성을 통해 말씀을 의심하지 않고 이해하게 하소서. 믿음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우리에게도 백부장의 믿음과 혈루증 여인의 믿음과 야이로의 믿음과 가나안 여인과 같은 주님께 칭찬받는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늘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큰 믿음과 산 신앙을 가지고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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