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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나의 기존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으로 바꾸는 거다.

요나 궁극이............... 조회 수 678 추천 수 0 2014.10.18 09:2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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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욘1:1-3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2000년대 설교 

1장 1절-3절.

 

1절-3절: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더라.

 

우리 기독교의 3대 핵심이 있는데 그 3대 핵심은 진리와 생명과 사랑입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을 말하는 겁니다. 사랑은 아가페 사랑, 하나님의 사랑. 이 세 가지를 자체화 시키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사람에게 입혀서 자체화 시키는 것.

 

세상 어떤 인간이든지 인간이란 인간은 자기 주관적인 지식이 있고 기존적인 지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의 지식이 아니라면 전부는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야 합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인간의 지식에 비해 하나님의 지식은 근원이 다르고 뜻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혹 ‘다르면 또 어떠냐’ 하겠지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면 자기에게 큰 고통이 오고, 궁극적으로 영원히 자기가 망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지요. 한 마디로 말하면 신령세계 하늘나라 천국이란 천국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스리 되어져 있다 그 말이요. 천국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으로 바꿔야 된다 그 말이요. 천국에 안 갈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천국 갈 사람이기 때문에 바꿔야 된다 그 말이요. 지옥 갈 사람은 안 바꿔도 되겠지요?

 

우리가 쉬운 예를 들면 부모공경 하는 것은 악이 아니고 선입니다. 일반적으로도 선이요. 그런데 성경 하나님의 말씀에도 부모공경 하라는 말씀이 있다 그 말이요. 그래서 이제 처음으로 예수 믿는 사람이 ‘아, 나는 예수 믿기 전에 이미 부모공경을 지키고 있다. 그러니 나는 구태여 예수 믿은 후로 부모공경을 일부러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있다 그 말이지요.

 

그러나 성경에는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으니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주 밖에서 부모공경을 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 밖에서 부모공경을 하는 거라.

 

성경이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하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맞추어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 자기가 믿지 않을 때에 부모공경을 한 그 지식성과는 그만 대립이 된다 그 말이요. 대립이 안 되면 좋겠는데 대립이 돼버려. 그러니까 다르다 그 말이요. 근원이 달라.

 

또 ‘도적질 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거짓 증거 하지 말라’ 등을 사람들은 다 지키려고 노력들을 하고 있습니다. 지키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그런 것들을 주 안에서 지키라’ 하면 그만 대립이 온다 그 말이요. 참 희한하지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라’ 그러면 그만 대립이라 그 말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안 붙이고 ‘부모공경 하라. 도적질 하지 말라’ 그러면 ‘아, 좋은 얘기네요. 그렇게 살아야지요’ 이렇게 하는데 ‘하나님 말씀에 의해 하라’ 하면 그만 튕긴단 말이요. 반대가 돼버려. 다 같이 ‘부모공경 하라. 도적질 하지 말라. 선을 행하라’ 하는데 왜 그게 대립이 되느냐 그 말이요. 참 희한하지요?

 

그리고 또 산소에 가서 고사하는 것, 또 제사하는 것 이런 게 다 성경을 보면 우상숭배이니 하지 말라고 그런다 그 말이요. 그런데 자기는 또 하려고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걸 하지 말라고 하면 그만 대립이 된다 그 말이요. 참 이상하지요?

 

그래,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거냐 그 말이요. 누구의 말이 더 옳고 누구의 말이 그른 거냐 그 말이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 옳은 건데 그만 그게 대립이 돼.

 

대립이 되는 것은 바꾸어야 한다 그 말이요. 온 세상 사람들이 성경이 틀렸다고 해도 성경대로 바꾸어 놓아야 하는 겁니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바꾸라. 너의 타락적 기존적인 지식을 바꿔라. 네가 부모공경 하는 것도 타락적 기존지식에서 나오는 부모공경성이다. 그러니까 그걸 바꾸라. 그 지식을 바꾸라’ 하시니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바꾸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기를 위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당신을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란 말이요. 인간 자기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맞추면 이것은 단일성이지요. 자기 것이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의 것이 아니면 대립이 되는 것이니 하나님의 의사에 모두 다 맞추는 것. 하나님의 의사에다만 맞추는 것, 소원에다만 맞추는 것, 목적에다만 맞추는 것. 이게 단일성이란 말이요. 그 전에 내가 기존적으로 가지고 있던 것은 다 내버리고 하나님의 의사성에다 맞춘단 말이요. 그게 이제 단일성이라.

 

그 다음에 각치성이 있는데, 각치성은 갑 을 병... 열 명이든 백 명이든 각각 자기의 의사가 있단 말이요. 각자 자기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이게 각치성.

 

그 다음에 일치성이 있는데, 갑과 을이 각각 주장한 것을 모아보니까 서로 같다 그 말이요. 서로가 같으니까 이건 하나라. 이건 일치성이라.

 

그러면 서로가 주장한 것이 다 똑같기 때문에 이게 단일성이 아니냐? 그건 아니지요. 백 명의 의사가 똑같다고 해서 이걸 하나님의 의사라고 할 수는 없지요. 하나님의 의사는 하나님의 의사고, 백 명이던 천 명이던 의사가 똑같다고 하더라도 그거는 인간 자기들이 좋아하는 의사고. 거기에서 일치를 보았다고 해서 그게 하나님의 것과 같으냐? 다르단 말이요. 아니란 말이요. 각치성도 단일성이 아니고, 일치성도 단일성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합치성이 있는데, 이 합치성은 내가 절반쯤 양보하고 너도 절반쯤 양보하고 이렇게 해서 합력을 해가지고 제 삼의 의사를 뽑아내는 것. 그러면 이것이 단일성이냐? 그것도 아니란 말이요.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것이다 그 말이요. 인간의 의사를 합친 것, 인간의 일치성, 인간의 각치성이 있어도 단일성과는 다르다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 그런 명령을 했다 그 말이요. ‘니느웨로 가서 외치라.’ 말하자면 ‘심부름을 해라’ 한 건데 이 요나는 ‘꼭 니느웨로 가서 회개시킬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더 멀고 먼 다시스로 가서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그랬단 말이요.

 

하나님도 ‘가서 전하라’ 하는 거고, 요나는 ‘나는 그리로 안 가고 더 멀리 가서 전하겠습니다’ 했단 말이요. 여기서 전한다고 하는 것은 같아요, 달라요? 같단 말이요. 목적은 같아. 목적은 같은데 하나님과 대립이야. 하나님은 ‘오른쪽으로 가라’ 하니까 요나는 왼쪽으로 간단 말이요. 하나님은 오른쪽으로 가서 전하라고 하는데 요나는 왼쪽으로 가서 전한단 말이요. 그러나 전하는 것은 똑같은데 목적이 달라.

 

인간의 재세목적이 무엇이냐? 또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원하시는 목적이 무엇이냐? 곧 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내가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그 목적과,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목적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같아야 돼요, 달라야 돼요? 같아야 되는 거지요.

 

왜 그러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어 내놓으실 때는 분명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어서 인간으로 만들어서 이 땅에 살게끔 했단 말이요. 그렇다면 인간 자기는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으며 무슨 목적으로 살 것입니까’ 하고 나를 만드신 하나님에게 가서 물어야 할 거란 말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목적이나 인간 자기가 세상에 사는 목적이나 똑같아야 된단 말이요. 그런데 그걸 찾는 사람이 쉽겠느냐? 참 드물지요.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목적이 무엇이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거? 보통 그 말을 많이 하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이 부족해서 나보고 영광을 돌리라고 하더냐? 그건 아니지요.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하면 하나님은 완전자입니다. 인격자요 생존자요 독존자요 실존자요, 느끼심이 있으시고, 그 느낌이 예민하고 민첩하고 아주 민활하십니다. 기쁨과 만족과 향락과 쾌락과 영광 면에서 조금도 부족성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자체적이며 발생적입니다. 충만하다 그 말이요.

 

우리 인간은 누가 나에게 어떻게 해주어야 자기가 기쁘거나 슬프거나 한다 그 말이요. 그러나 하나님은 자체적이요 내발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누가 괴롭히겠느냐 그 말이요. 신령계와 물질계가 다 달려들어서 ‘우리가 하나님을 괴롭게 하자’ 해서 하나님을 괴롭힌다고 할 때 하나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변해지면 그건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에 움직이지 않는다 그 말이요.

 

그러면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냐? 우리 인간은 동화적이요 수동적이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이런 인간이 누가 나에게 고통을 줄 때에 나는 이걸 느낄 수도 있고 안 느낄 수도 있느냐? 그대로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외부에서 나에게 쾌락을 줄 때에 나는 즐겁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우리 인간처럼 그런 분이냐 그 말이요. 외부의 어떤 조건에 의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기쁘고 슬프고 그러냐 그 말이요. 하나님을 꼭꼭 묶어서 지옥에 던진다면 하나님도 느끼는 존재이시기 때문에 유황불이 주는 그 고통을 안 느낄 재간이 있을까?

 

하나님은 영광도 존귀도 행복도 쾌락도 기쁨도 모두 충만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이 기뻐하셨다’ 하는 말씀이 있는데 이게 사건 자체를 보고 기뻐하시는 것이냐, 아니면 어떤 딴 뜻이 계서서 기뻐하는 것이냐? 쉬운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사도 틀리고 곡조도 틀리고 다 틀렸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그걸 듣고 즐거워하거든요. 그래서 그 부모가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다른 집 아이가 그렇게 또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면 남의 집 아이가 가사도 곡조도 죄다 틀리게 부른다면 남의 집 아이가 그렇게 부르는 것을 듣는 그 부모가 자기 집 아이가 부르는 것처럼 마음이 그렇게 즐거운가 그 말이요.

 

우리가 무엇을 잘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느냐? 창조 전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셨을까? 만물을 창조하기 전에 천국에서 당신 홀로 계실 때 심심해서 어떻게 견뎠을까? 혼자 독존하고 계셨으니 얼마나 쓸쓸하셨을까?

 

신령계에 속하는 것은 천군천사들 그리고 우리의 영혼 그리고 마귀입니다. 마귀도 영물이니까 신령적인 존재라 그 말이요. 또 영생계는 하나님 당신 홀로 누리시는 그 나라. 그 세계에는 하나님 당신의 쾌감에 맞는 것으로만 다 되어 있습니다. 색상도 하나님의 눈에 들게, 디자인도 하나님의 눈에 들게. 천국 신령계는 모든 모양이 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만물을 짓기 전에 그 세계에서 하나님께서 홀로 독존하셨지만 생명도 사랑도 향락도 쾌락도 만족도 존귀도 영광도 전부는 충만이었어요. 이 모든 것이 당신 자체적으로 철철 넘쳐 나오는데 누가 거기에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내가 좀 보태드릴까요’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그 말이요.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 천국을 누리고 느끼려니까 그 신령천국이 너무나도 좋아서 당신 혼자 누리기에는 무척 아깝습니다. 그래서 ‘나와 같은 자(존재가 아닌 성분적으로)를 만들어서 나와 함께 이 천국을 누리고 느끼게 하자’ 해서 만든 것이 바로 인간이더라 그 말이요.

 

그러니까 먼저 인간을 만들고서 천국을 주자고 한 것이 아니고 당신이 혼자 누리고 느끼시는 그 천국의 누림성이 쾌감성이 너무나도 좋기 때문에 ‘나 혼자 이 천국을 누리기가 아깝다. 나처럼 누리게 할 존재를 하나 만들자’ 해서 인간을 만들게 된 것이니 즉, ‘보시고 좋으니’ 했으니 이건 사건선택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존재선택 이전에 사건선택이 먼저 되는 거지요.

 

우리가 그렇지 않아요? 보통 보면 어디 가서 즐겁고 기쁜 것을 보면 ‘아, 참 좋다. 누구도 데리고 올 걸. 누구도 같이 왔으면 좋을 걸’ 그런 거 있지요? 이걸 신앙적으로 말하면 그런 마음이 있어서 전도를 하게 되는 거고 증거를 하게 되는 거지요. ‘신령천국이 이렇게 좋단다. 그러니 예수 믿읍시다’ 이렇게 되는 거.

 

그 다음에 이제 그곳이 너무 좋기 때문에 ‘이곳을 나와 함께 나처럼 누릴 존재를 짓자’ 하셨으니 이건 존재선택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이제 인간을 만드는 거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이 창조가 된 건데, 인간을 만들되 목석과 같이 만들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자로 만드신 이유는 영생의 그 나라는 신령계로서 그 나라를 하나님처럼 누리고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당신이 천국을 누리고 느끼는 것처럼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성분을 가진 존재로 지어야 하겠기에 그렇게 만들었다 그 말이요.

 

동물들은 촉감적으로 감각적으로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그러니까 이성적 느낌이라든지 지각성이라고 하는 그런 느낌은 없습니다. 깨닫는 느낌 그런 건 없다 그 말이요.

 

또 이성 위에 보다 더 차원이 높은 영감이 있는 것인데 동물들은 이성이 없기 때문에 이 영감을 느끼지 못하지만 인간은 영적 신령한 것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얼마나 특수하냐 그 말이요.

 

그런데 같은 인간이지만 미중생자들은, 쉽게 말하면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적 쾌락을 못 느낍니다. 그건 왜 그러냐? 영이 죽어있기 때문에. 영이 죽어있으면 영적 쾌감을 못 느껴요. 전혀 못 느껴요. 짐승이 우리 인간의 세계를 못 느끼는 것처럼 그렇다 그 말이요.

 

인간에게는 촉감성이 있는데, 이 촉감성으로 쉽게 말하면 추위와 뜨거운 것을 느끼지요? 그리고 칼질을 하다 잘못해서 손을 베면 따갑고 아프고 한 그런 것도 느낍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는 본능성이 있는데, 이 본능적 느낌은 속에서 느껴지는 것. 피부에 닿기 전에 속에서 느끼는 것. 이 본능적 느낌이 강할 때에는 촉감성이 물러간다. 쉬운 예를 들면 불이 났을 때 얼마나 뜨겁습니까? 그 뜨거운 것도 불구하고 자기 속에서 나오는 그 느낌성에 의해서 불이 뜨거운 것도 모르고 불속에 있는 사람을 구조하러 들어갑니까?

 

세 번째는 지각성. 이 지각성은 인격을 두고 말하는 건데, 이 지각성은 촉감적으로 못 느끼는 것을 느끼는 것으로 이를테면 박사학위나 명예 등 그런 것은 촉감적으로는 못 느껴요. 그러나 인격적으로 그런 걸 느낀단 말이요. 지감적으로 느낀다 그 말이요.

 

그 다음에 네 번째는 영감성으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영생의 나라, 하늘나라, 신령계에는 영각성이라야 느껴집니다. 이런 게 인간에게 또 있단 말이요.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만큼은 지각성 영감성으로 창조하신 이유가 바로 영생계 곧, 천국이 있기 때문이라 그 말이요. 우리 인간을 그렇게 창조한 이유가 바로 그렇다 그 말이요.

 

하나님의 충만은 자체성 능동적 내발적이요, 인간은 수동적 피동적입니다. 사람은 사건에 따라서 그 느낌의 강도가 각기 다 다릅니다. 창조에 따라서도 느낌이 다릅니다. 그리고 느낌의 감도가 또 달라질 수가 있는 거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왜 이렇게 인격자로 만들었느냐? 왜 도덕성자로 만들었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최종적 궁극적 목적적인 뜻은 그 나라에서 그 나라의 모든 존귀와 영광과 쾌락을 당신처럼 느끼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최종적 목적인 천국의 누림이 있으니 그 최종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이 이 세상에 살다가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인격을 가지고 도덕적으로 부지런히 자신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적이며 세상적이며 타락적인 것은 부지런히 버리고 하나님의 것을 넣고 가는 것. 왜? 신령한 그 세계에서 존귀와 영광과 쾌락성으로 느끼게 해주려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말이요. 그걸 우리가 알아야지요.

 

여러분들이 오늘 저녁에 가서 가만히 한 번 생각해 봐요. “하나님께서 왜 나를 생각하는 자로, 뭘 느끼는 자로, ‘이것보다 이것, 이것보다 더 이것’ 하며 더 나은 것을 선택하는 거라든지, 손해가 안 나게 하려는 것이라든지, 명예 영광을 좋아하는 것이라든지 왜 이런 나로 만들었을까”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정답은 궁극적인 신령세계에서 나를 존귀 영광자로 만들어 주려고 그러신다고 하는 이것을 떼놓으면 인간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해답을 그 어디에서도 찾을 도리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공부를 잘한다고 해서 다 명예 영광자입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또 전혀 못 배웠다고 해서 전부 다 가난뱅이로 삽니까? 그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가난한 나라에, 어떤 사람은 부자 나라에 태어나게 했고, 더 나아가서 어떤 사람은 가난한 집에, 어떤 사람은 부잣집에 태어나게 했단 말이요. 그 이유가 뭐냔 말이요.

 

그러니까 ‘하나님, 나를 왜 이렇게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집에 태어나게 했습니까? 지지리도 못 사는 집에 왜 나를 태어나게 했습니까’ 하고 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대해 할 말이 있다 그 말이요. ‘임시적인 이 세상에서 네가 가난하니까 고통스러우냐? 그러나 가난한 그곳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갈 수가 있다. 그러니 그 환경에서 영원히 존귀 영광자가 되거라’ 하신단 말이요. 그 얼마나 좋습니까? 굉장히 희망적이지요.

 

‘아이고, 나는 부자인데 이 부자가 싫습니다. 영원한 부자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하면 ‘오, 그러냐? 현재 너의 세상적인 부자는 임시성적인 부자이니 잠깐이다. 네가 죽으면 다 내버리고 갈 것이 아니냐? 그러니 영원한 부요자로 만들어서 신령천국으로 들어오너라’ 하시지요.

 

그러니까 가난한 자가 재세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갈 그 열심이나, 부자가 제세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도덕성의 성품을 입어갈 그 열심이나 똑같이 열심을 내야 한다 그 말이요. 그 면에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이 열심을 내야 돼요.

 

어떻게 보면 가난한 사람이 부자보다 오히려 더 많이 입어갈 수도 있는 겁니다. 가난한 사람은 그 가난이 얼마나 고통스럽다고 하는 것을 피부로 직접 느꼈으니까 더 결심을 하고 노력을 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더 많이 입어갈 수 있는 하나의 좋은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그 말이요. 얼마나 좋으냐?

 

‘아이고, 하나님이 날 부자로 만들어 보십시오. 그러면 내가 얼마나 예수 잘 믿겠는가?’ 천만에. 그건 제 생각이고 제 말이지 가난한 것을 탓을 하는 사람이 부요를 줘 봐요. 그 사람이 예수 잘 믿어요? 천만의 말씀이요. 이런 사람이 부자가 되면 ‘아, 부자가 됐구나. 누리자’ 이렇게 되는 거지. 가난한 속에서도 못 깨닫는 주제에 부요한 가운데서 그게 깨달아지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부요가 되면 무뎌진다 그 말이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든지 그런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내가 그런 걸 많이 보는데 방송에 어린아이들끼리만 사는 가정의 아이가 ‘핫도그도 먹고 싶고 피자도 먹고 싶고 행복하게 잘 살고 싶다. 뭣도 사고 싶고 뭣도 사고 싶다’ 그런 말을 하는 걸 봅니다. 물론 그 말을 옆에서 들을 때는 불쌍하고 측은하지요.

 

물론 그런 아이들을 어느 정도는 도와줘야지요. 그렇지만 가난한 환경일수록 영원한 것에 대한 애착심이 더 들어가야 되거든요. 그런데 가난하다고 해서 현세의 부요성만 자꾸 소원하게 되면 나중에 그 아이가 자라서 부요해지면 망한단 말이요. 사람이 망한단 말이요. 인격적으로 망한다 그 말이요.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이 있는 거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해서 하나님께서 어려운 환경을 거치게 하는 그 뜻을 못 찾는 겁니다. 그게 참 안타깝더라 그 말이요.

 

우리가 성경을 깨닫고 보면 살아가면서 그 어떤 환경을 만나더라도 얼마든지 저 신령계를 향해서 박차를 가해서 믿음성장 인격성장으로 고상한 존귀 영광자가 될 수 있다 그 말이요.

 

자식이 좋아하는 것을 보니 부모가 좋고, 또 부모가 좋은 것을 보니 자식이 또 기쁘다 그 말이요. 서로가 그래요. 마음속에서 오고 가는 그런 게 있다 그 말이요. 그런 것처럼 ‘네가 좋아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이 좋다’ 하는 게 있습니다. 그러나 촉감성이나 본능성이나 시감성이나 영감성이나 영각성이 둔감하거나 모르면 하나님이 슬픕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런 걸 보고 슬퍼하시느냐? 사랑과 애정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1차적으로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않고 인간의 인격인 촉감성 본능성 지각성만을 가지고는, 타락성적인 저질적인 인격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고 통치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현재 내가 예수를 믿고 있다고 해도 이 실력을 가지고서 천국에 데려다 놓으면 뭐든지 사용할 수 있겠느냐? 사용을 못한다 그 말이요. 믿음실력이 없기 때문에.

 

돼지에게 박사 학위증을 주는 것과, 안 주는 것 중에 돼지는 어느 것을 더 좋아하겠습니까? 돼지에게는 그런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습니까? 돼지에게 박사 학위증을 준들 좋아하겠어요? 안 주면 안준다고 싫어하겠어요? 돼지는 그런 게 필요가 없단 말이요. 돼지를 천국에 갖다 놓으면 돼지가 좋아서 ‘와, 천국이 이렇게 좋구나’ 하고 느껴져서 돼지가 뛰어다닐까요?

 

하나님과 인관과의 관계는 마치 인간과 돼지보다 더 멉니다. 돼지와 인간이 더 가깝다면 가깝지 하나님과 인간은 더 멀단 말이요. 하나님은 창조주요 조물주요,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지음을 받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인간과 돼지는 둘 다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피조물이란 말이요. 인간과 돼지는 둘 다 똑같이 피조물이야. 그러니까 말하자면 인간과 인간은 둘 다 피조물이니까 서로 가깝다고 할 수가 있겠지만 인간과 하나님은 피조물과 조물주의 관계니까 인간과 돼지보다도 더 멀다 그 말이요.

 

그래서 우리 인간은 1차적으로 기본구원의 성품을 입지 못하면 2차적인 성품을 입지를 못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못하면 하나님의 진리말씀의 깨달음으로 성품이 입어지는 것은 안 된다 그 말이요. 이런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 최고로 가까워지라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보혈로 중보사역을 이뤄놓은 거지요. 하나님과 우리를 짜맸단 말이요.

 

그래서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1차적인 것은 동일하게 입었지만 2차적인 것은 동일하게 입지 못하고 차별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니 10년 전에 태어나나, 지금 태어나나, 천 년 전에 태어나나, 수천 년 전에 태어나나 그리스도의 기본적인 구속성은 똑같아요. 뜀을 뛰려고 하면 출반선이 있단 말이요. 땡 하고 출발하는 1차적인 그리스도의 구속은 똑같단 말이요. 그러나 언제 태어났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가지고 성화구원으로 입어져 나가는 그 면은 차별이 있다 그 말이요. 이 면에 게으른 사람이 있고 부지런한 사람이 있고, 많이 깨닫는 사람이 있고 조금 깨닫는 사람이 있고 하나도 못 깨닫는 사람이 있고 이렇게 차이가 있다.

 

또 천국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천국에서는 뒹굴어도 말리는 사람이 없어요. 천국에서는 내 몸 밖의 외래적인 것이 나를 제재하는 것은 없지만 무엇이 금지를 하고 있느냐 하면 자기 자체적인 실력에 의해서 스스로 금지가 된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인가 하니 자기 실력이 그만큼이면 그만큼밖에 안 된다 그 말이요.

 

어린이 놀이터에서 어린애들이 노는 거 가만 보면 어떤 아이들은 모래만 갖고 놀지요? 신발 한 짝 벗어서 모래 실어서 끌고 다니고. 그러나 어떤 아이들은 그네를 탄단 말이요. 어떤 아이들은 무서워서 못 타고. 모래밭에서 노는 아이도 즐겁고 그네를 타는 아이도 즐겁고. 그러나 어른의 입장에서 그걸 보면 그네를 타는 아이보다 흙구덩이에서 모래장난 하는 아이가 덜 즐겁게 보인단 말이요.

 

그러니까 천국에서는 각자가 제 나름대로의 실력적 차등성적으로 즐겁고 더 즐겁고 기쁘고 한 것이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하라, 마라’ 하는 외래적 금지가 없어. 다만 자기 자체 실력에 의해서 금지다 그 말이요. 실력이 그만큼밖에 안 되니까.

 

실력은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것이 실력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것만큼 인격이 민감해지고 예민해집니다. 둔탁하지를 않습니다. 예를 들면 사탕 자체는 달지만 단 맛을 느끼는 면에 마비가 되면 그 사람은 단 사탕을 먹는데 달지를 않다 그 말이요.

 

신령계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서 구원을 이룬 양에 따라 각기 다릅니다. 일단 천국에 들어가면 더 기쁜 사람이 있고 덜 기쁜 사람이 있을까요? 있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에 들어가서는 덜 기쁘면 거 기쁘던 각자 자기 실력 만큼이란 말이요. 그리고 아주 기쁘면 아주 기쁜 대로 그것이 영원히 가는 겁니다. 자기 실력으로 그 상태로서 영원히 가는 거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영육을 입고 있을 때에,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부지런히 바꿔야 합니다. 단일성의 하나님이요 단일성의 천국이요,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은 전부 다 이질이기 때문에 그 천국에는 이질이 된 것은 못 들어갑니다. 천국은 질로서 된 양적 차이가 있습니다.

 

생명과 자체가 변질이 되어서가 아니라 자기의 미각성이 둔감하면 생명과가 맛이 없게 느껴지기 때문에 못 먹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많이 볼 수 있지요? 어떤 사람은 신 걸 잘 먹는데 어떤 사람은 실 걸 맛이 없다고 안 먹잖아요. 얼마든지 그런 게 있거든요. 느끼지 못하면 아무리 생명과라도 그 자기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경을 주고 사건을 주고, 또 하나님 당신의 종들을 주었습니다. 그러니 문제는 자기 할 탓이다. 이것이 자기 자체적인 심판으로 나오게 되는 거지요. 예를 들면 베토벤 곡을 틀어놓으면 그것을 느끼는 느낌성이 듣는 사람의 청각과 청감성에 의해 다 다르게 느껴지지요. 이 세상에서도 된 것만큼 그렇게 다른 것을 볼 수가 있어요.

 

천국을 제일 민감하게 예민하게 100% 느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다음은 누구든지 다 나라 그 말이요. 내가 돼야 그게 정답인데 각자 내가 아니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 말이요. 천국을 민감하게 느낄 나인데, 예수님 다음에 나인데 문제는 하나님의 성품을 제일 많이 입은 자가 제일 많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많이 입는 방편은 기도 많이 하고 회개 많이 하고 금식 많이 한다고 해서 입혀지느냐? 아닙니다. 순종을 통해서만이 되는 것이지요. 이 순종도 무조건적 맹종적 순종이 아닙니다. 깨달아져서 인격화 되어서 자원적 순종입니다.

 

기도 많이 해서 악령의 능력을 받을 수는 있지만 기도만으로는 자체구원은 입혀지지를 않습니다. 자원적인 순종을 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성품이 입혀지는 것이지요.

 

기도 올립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요나의 패역적인 성격을 보고 우리가 여러 가지 면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두고 깨닫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믿으면서도 요나 같은 사람이 무척 많은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치를 못 깨달으니 요나 짓을 하고도, 패역적인 성질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못 깨닫고 그렇게 살다가 죽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줄로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들을 만들어 놓으신 분명한 목적이 있고, 현재적으로 사건과 환경과 존재를 교체시키시는 목적이 있으니 저희들이 이런 세상에 살면서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성품을 많이 입고 많이 깨닫고, 또한 나만 깨닫고 갈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깨달음의 월등한 자로, 천국에서 월등한 자로, 고상한 자로, 주님 다음에 자기가 누릴 자로 성화구원을 잘 입고 갈 수 있는 복되고 지혜로운 당신의 자녀들이 다 될 수 있도록 축복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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