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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의 정담이 오고가는 대청마루입니다. 무슨 글이든 좋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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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살바도르의 로메로 대주교는 정의(正義)가, 뱀처럼, 오직 맨발인 사람들만을 문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자기 나라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저주받고 공격받는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말했고, 그 때문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이것은 우루과이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최근에 쓴 에세이에서 한 말이다.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감고, 진실이 핍박을 당하고, 거짓이 활개를 치며, 거의 모든 게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오늘의 이 뒤틀린 세계를 이보다 더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는 말이 또 있을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갈레아노의 이 말이 군사독재 하에 신음하고 있던 어떤 특정 사회 상황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지금 우리는 적반하장이라는 말로써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한 사태가 끊임없이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매일매일 기막힌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다. 국가기관, 그것도 막강한 특권이 주어진 정보기관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명확히 드러났음에도, 지금 이 사회는 민주주의의 존망에 관계되는 이 위헌적 범죄행위를 어떻게 처리할지 해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물론 근본적인 책임은 온갖 거짓말과 저열한 술수를 쓰면서 이 사태를 그냥 뭉개고 지나가려는 집권세력과 어용언론, 어용지식인들에게 있음이 분명하지만, 또한 (이미 너무나 많이 지적됐기 때문에 또다시 말한다는 게 정말 지겨운 노릇이지만) 야당의 책임도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지금 국회의 의석분포상 야당은 절대로 미미한 세력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른바 ‘대중과의 소통’을 꾀한답시고, 야당 의원들은 종편 텔레비전의 너절한 오락프로그램에 여당 의원들과 나란히 출연하여 질 낮은 우스개와 잡담을 늘어놓는 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
문제는, 심각한 위기의식의 결여가 직업 정치인들에게만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는 데 있다. 국민주권을 명시한 헌법체제가 뿌리에서부터 허물어지고 있는데도 대부분의 국민은 이 사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식을 못하고 있다. 집권세력은 입만 열면 ‘민생’을 위해 ‘정쟁’을 그만두자고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두렵기 때문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조금만 생각해보더라도 ‘민생’과 민주주의가 별개의 것일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근대국가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과 함께 재분배를 공정하게 행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시스템이다. 그 밖에는 어떠한 명분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원칙이 부정되는 순간, 국가의 정당성은 소멸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대중은 여전히 ‘민생’을 강조하고 민주주의를 경멸하는 자들의 농간에 쉽게 속아 넘어간다. 이 서글픈 현실은 물론 끝없이 거짓말을 하는 주류 (사이비) 언론과 엉터리 교육에 무방비로 노출돼온 탓일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지난 수십년간 소위 경제성장 시대를 거치면서 허다한 사람들이 ‘안락 전체주의’라는 것에 길들여져온 탓도 크다고 할 수 있다. “아파트 생활 20년 만에 (한국인의) 정신은 돈에 찌들어 정의로운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아파트의 안락함은 우리를 무장해제”시켰다는 어떤 인터넷 논객의 말은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을 담고 있다.
실로 비탄스러운 것은, “정의는 맨발의 가난한 사람들만을 문다”는 게 엄연한 현실인데도 가난한 이들의 자발적인 협력 속에서 이 불의의 체제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식과 이성과 최소한의 윤리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한 현실에 절망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나라의 가장 소중한 생태적 보고인 4대강을 돌이킬 수 없이 망가뜨려 놓은 장본인이 엄중한 책임추궁을 당하기는커녕 후안무치하게도 “녹조는 강물이 맑아진 증거”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는 게 오늘의 우리 현실이다.
이렇게 ‘물구나무선’ 세계에 오랫동안 길들여지다 보면 많은 사람들은 체념과 냉소주의에 함몰되기 쉽다. 오늘날 거짓말과 속임수가 아니면 한순간도 지탱하지 못하는 불의의 시스템을 핵심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사람들, 즉 어용학자, 지식인, 전문가들도 특별히 부도덕하거나 비양심적인 인간들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처신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아무리 애써봤자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체념과 냉소주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그러한 체념과 냉소주의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는 점이다. 분노와 슬픔이 깊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싸우다 보면 적을 닮아간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갈레아노는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누구를 죽인 일은 없다. 하지만 그건 내가 용기가 없거나 시간이 없어서였지 그럴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수탈된 대지-라틴아메리카 500년사>의 저자의 말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말에는 ‘혈맥이 절개된 채’ 온갖 극단적인 수탈과 능멸과 압제 하에서 신음해온 땅의 주민이자 수십년에 걸친 정치적 박해와 망명생활을 강요당해온 작가의 고통스러운 진심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갈레아노는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파괴적인 언어로 표현한 적도 없고, 또 무익한 한탄 속에 시간을 허비한 적도 없다. 그것은 물론 액면 그대로 “용기와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불의의 현실에 예리하고 힘찬 언어로 맞서는 그의 글에서는 언제나 해학과 기지에 넘친 비유가 마르는 법이 없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의 작품 전체를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근원적 낙천성, 즉 이 세계가 구조적인 불의와 악행으로 짓눌려있다 해도 삶의 심층에는 늘 보이지 않는 ‘선의’가 작용한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 근대국가란 이 ‘선의’를 가장 악랄한 방식으로 이용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인지도 모른다. 오늘날처럼 완전히 ‘물구나무선’ 세계에서 미치지 않고, 또 무엇보다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때때로 갈레아노와 같은 작가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멀리 갈 것도 없다. 지금 우리는 적반하장이라는 말로써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기괴한 사태가 끊임없이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매일매일 기막힌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다. 국가기관, 그것도 막강한 특권이 주어진 정보기관이 선거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명확히 드러났음에도, 지금 이 사회는 민주주의의 존망에 관계되는 이 위헌적 범죄행위를 어떻게 처리할지 해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물론 근본적인 책임은 온갖 거짓말과 저열한 술수를 쓰면서 이 사태를 그냥 뭉개고 지나가려는 집권세력과 어용언론, 어용지식인들에게 있음이 분명하지만, 또한 (이미 너무나 많이 지적됐기 때문에 또다시 말한다는 게 정말 지겨운 노릇이지만) 야당의 책임도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지금 국회의 의석분포상 야당은 절대로 미미한 세력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른바 ‘대중과의 소통’을 꾀한답시고, 야당 의원들은 종편 텔레비전의 너절한 오락프로그램에 여당 의원들과 나란히 출연하여 질 낮은 우스개와 잡담을 늘어놓는 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실로 비탄스러운 것은, “정의는 맨발의 가난한 사람들만을 문다”는 게 엄연한 현실인데도 가난한 이들의 자발적인 협력 속에서 이 불의의 체제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식과 이성과 최소한의 윤리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러한 현실에 절망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나라의 가장 소중한 생태적 보고인 4대강을 돌이킬 수 없이 망가뜨려 놓은 장본인이 엄중한 책임추궁을 당하기는커녕 후안무치하게도 “녹조는 강물이 맑아진 증거”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하고 있는 게 오늘의 우리 현실이다.
이렇게 ‘물구나무선’ 세계에 오랫동안 길들여지다 보면 많은 사람들은 체념과 냉소주의에 함몰되기 쉽다. 오늘날 거짓말과 속임수가 아니면 한순간도 지탱하지 못하는 불의의 시스템을 핵심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사람들, 즉 어용학자, 지식인, 전문가들도 특별히 부도덕하거나 비양심적인 인간들이 아닐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처신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아무리 애써봤자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체념과 냉소주의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그러한 체념과 냉소주의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는 점이다. 분노와 슬픔이 깊어지면 자기도 모르게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싸우다 보면 적을 닮아간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갈레아노는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내가 누구를 죽인 일은 없다. 하지만 그건 내가 용기가 없거나 시간이 없어서였지 그럴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은 <수탈된 대지-라틴아메리카 500년사>의 저자의 말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 말에는 ‘혈맥이 절개된 채’ 온갖 극단적인 수탈과 능멸과 압제 하에서 신음해온 땅의 주민이자 수십년에 걸친 정치적 박해와 망명생활을 강요당해온 작가의 고통스러운 진심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갈레아노는 자신의 분노와 슬픔을 파괴적인 언어로 표현한 적도 없고, 또 무익한 한탄 속에 시간을 허비한 적도 없다. 그것은 물론 액면 그대로 “용기와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불의의 현실에 예리하고 힘찬 언어로 맞서는 그의 글에서는 언제나 해학과 기지에 넘친 비유가 마르는 법이 없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의 작품 전체를 통해서 엿볼 수 있는 근원적 낙천성, 즉 이 세계가 구조적인 불의와 악행으로 짓눌려있다 해도 삶의 심층에는 늘 보이지 않는 ‘선의’가 작용한다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자본주의 근대국가란 이 ‘선의’를 가장 악랄한 방식으로 이용하고 관리하는 시스템인지도 모른다. 오늘날처럼 완전히 ‘물구나무선’ 세계에서 미치지 않고, 또 무엇보다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때때로 갈레아노와 같은 작가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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