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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에게 인간다운 존엄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초생활비가 무조건 보장되어 있는 사회에서 살 수 있다면 어떨까? 그게 단지 유토피아적인 몽상에 그치지 않고 과연 인간 세상에서 현실화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우리는 그것은 가능하고, 현재 세계의 여러 곳에서 비록 부분적이지만 실제 시행되고 있는 제도라고 대답할 수 있다. ‘기본소득보장제’가 바로 그것이다.
지난해 10월 스위스에서 기본소득제 도입을 국민투표에 부치기 위한 서명운동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이후, 한국에서도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그런데 종래의 사회복지 프로그램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기본소득’이 재산이나 건강, 취업 여부 혹은 장차 일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등, 일절 자격심사를 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모든 사회성원에게 일정한 돈을 주기적으로 평생 지급한다는 데 있다. 얼핏 황당무계하게 들리지만, 그러나 ‘기본소득’은 이미 2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개념임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미국 독립전쟁의 사상적 원동력이었던 <상식>을 쓴 18세기 영국의 정치사상가 토머스 페인이 만년의 저작 <토지분배의 정의> 속에서 행한 제안에 이미 기본소득의 핵심 논리가 들어 있었다.
페인의 제안은, 원래 미경작 상태의 토지는 ‘인류의 공유재산’이라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어떤 개인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은 토지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토지를 경작하거나 개량한 부분에만 한정된다. 따라서 토지 소유자는 ‘기초지대(ground-rent)’를 사회에 지불할 의무가 있다. 그러면 그 지대를 모아 ‘국민기금’을 만들어, 토지사유제도로 인해 ‘토지에 대한 자연적 상속권’을 잃은 데 대한 보상으로 21세가 되는 청년들에게 정액의 일시금을, 또한 50세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남은 생 동안 매년 얼마간의 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페인의 이러한 ‘국민기금’ 구상은 단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공적 부조나 자선 프로그램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페인이 강조한 것은, 근대적 토지사유제가 확립된 사회일지라도 원래 토지란 만인의 공통재산인 만큼 그 토지로 인한 이익의 상당부분은 사회 구성원 전체가 나눠가져야 하며, 따라서 그것은 누가 누구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모두가 누려야 할 자연적 권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국민기금’을 통해 지급되는 돈은 국가에 의한 생활지원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국민 각자가 응당 자신의 몫으로 지급받아야 할 ‘배당금’인 셈이다.
‘기본소득’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게 바로 이 ‘배당금’이라는 개념이다. 토머스 페인 이래 ‘기본소득’ 사상은 간헐적이지만 꾸준히 계승되어 왔고, 그 연장선에서 최근 세계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져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다시 전 세계적으로 활발히 논의되고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기 시작했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대로 가면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평생 한 번도 정규직 일자리를 가져보지 못하고 생애를 마칠 공산이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지배층은 여전히 경제성장을 지향하고, 경제성장을 통해 누적된 사회문제들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는 지금까지의 가정에 매달려 있지만, 지난 수십년간 세계경제의 성장·확대에 기여한 근원적 요인, 즉 석유자원이 급속히 고갈되어 가는 상황에서 종래의 성장패턴이 부활하고, 또 그것이 지속 가능한 것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적으로 냉정히 생각한다면, 석유에 기반을 둔 지금까지의 성장 논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유지되는 삶을 구상하는 것 이외에는 출구가 없음이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극히 매력적인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일정한 직업에 종사함으로써 얻는 소득 없이도 인간답게 품위를 지키며 살 수 있다면, 경제성장이 멈춘 세상에서 그보다 더 긴요한 방책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게다.
그러나 여기서 바로 ‘기본소득’에 대한 적잖은 오해와 혼란이 생겨날 수 있다. 즉 노동을 하지도, 할 의사도 없는 사람에게까지 기본소득을 보장한다는 게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지에 대한 흔한 의문이 그렇다. 사실 우리는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전통적인 노동윤리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그것은 뿌리깊은 고정관념이 되어 있다. 그러한 관념으로 보자면, 기본소득 개념은 생경하다기보다는 부도덕한 것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해서(즉 토머스 페인의 논리에 의거하여), ‘기본소득’을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에게든 마땅한 권리로 주어져야 할 ‘배당금’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그러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본래 인간은 토지 외에 공기와 물, 숲, 바다와 같은 공유지(혹은 공유재)를 원천으로 해서 살아온 존재이다. 토지의 사유화가 본격화되기 이전만 하더라도 대다수 민중은 이런 공유지를 근거로 생활을 유지하고 문화를 창조했다. 그러므로 기본소득의 형태로 지금 다시 그 공유지를 민중에게 돌려주는 것은, 이미 막대한 생산력을 이룩한 현대 산업기술 사회가 반드시 실현해야 할 역사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기본소득’과 관련한 또하나의 흔한 질문은, 재원은 어디서 마련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기본소득’이 꼭 필요하다고 합의만 된다면 그것은 어떻게든 해결된다는 사실이다. 기본소득 도입을 가로막는 최대 장벽은 역시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고정관념이다. 이것만 극복한다면 오늘날 사실상 노예노동을 강요당하고 있는 우리들 대다수의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페인의 제안은, 원래 미경작 상태의 토지는 ‘인류의 공유재산’이라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어떤 개인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은 토지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토지를 경작하거나 개량한 부분에만 한정된다. 따라서 토지 소유자는 ‘기초지대(ground-rent)’를 사회에 지불할 의무가 있다. 그러면 그 지대를 모아 ‘국민기금’을 만들어, 토지사유제도로 인해 ‘토지에 대한 자연적 상속권’을 잃은 데 대한 보상으로 21세가 되는 청년들에게 정액의 일시금을, 또한 50세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남은 생 동안 매년 얼마간의 돈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페인의 이러한 ‘국민기금’ 구상은 단지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공적 부조나 자선 프로그램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페인이 강조한 것은, 근대적 토지사유제가 확립된 사회일지라도 원래 토지란 만인의 공통재산인 만큼 그 토지로 인한 이익의 상당부분은 사회 구성원 전체가 나눠가져야 하며, 따라서 그것은 누가 누구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모두가 누려야 할 자연적 권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국민기금’을 통해 지급되는 돈은 국가에 의한 생활지원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국민 각자가 응당 자신의 몫으로 지급받아야 할 ‘배당금’인 셈이다.
‘기본소득’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게 바로 이 ‘배당금’이라는 개념이다. 토머스 페인 이래 ‘기본소득’ 사상은 간헐적이지만 꾸준히 계승되어 왔고, 그 연장선에서 최근 세계경제가 장기 침체에 빠져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다시 전 세계적으로 활발히 논의되고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기 시작했다. 이것은 매우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대로 가면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평생 한 번도 정규직 일자리를 가져보지 못하고 생애를 마칠 공산이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의 지배층은 여전히 경제성장을 지향하고, 경제성장을 통해 누적된 사회문제들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는 지금까지의 가정에 매달려 있지만, 지난 수십년간 세계경제의 성장·확대에 기여한 근원적 요인, 즉 석유자원이 급속히 고갈되어 가는 상황에서 종래의 성장패턴이 부활하고, 또 그것이 지속 가능한 것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적으로 냉정히 생각한다면, 석유에 기반을 둔 지금까지의 성장 논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유지되는 삶을 구상하는 것 이외에는 출구가 없음이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기본소득’은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극히 매력적인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일정한 직업에 종사함으로써 얻는 소득 없이도 인간답게 품위를 지키며 살 수 있다면, 경제성장이 멈춘 세상에서 그보다 더 긴요한 방책이 어디 있겠는가? 지금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게다.
그러나 여기서 바로 ‘기본소득’에 대한 적잖은 오해와 혼란이 생겨날 수 있다. 즉 노동을 하지도, 할 의사도 없는 사람에게까지 기본소득을 보장한다는 게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지에 대한 흔한 의문이 그렇다. 사실 우리는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전통적인 노동윤리에 오랫동안 길들여져 왔다. 우리들 대부분에게 그것은 뿌리깊은 고정관념이 되어 있다. 그러한 관념으로 보자면, 기본소득 개념은 생경하다기보다는 부도덕한 것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해서(즉 토머스 페인의 논리에 의거하여), ‘기본소득’을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에게든 마땅한 권리로 주어져야 할 ‘배당금’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그러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본래 인간은 토지 외에 공기와 물, 숲, 바다와 같은 공유지(혹은 공유재)를 원천으로 해서 살아온 존재이다. 토지의 사유화가 본격화되기 이전만 하더라도 대다수 민중은 이런 공유지를 근거로 생활을 유지하고 문화를 창조했다. 그러므로 기본소득의 형태로 지금 다시 그 공유지를 민중에게 돌려주는 것은, 이미 막대한 생산력을 이룩한 현대 산업기술 사회가 반드시 실현해야 할 역사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기본소득’과 관련한 또하나의 흔한 질문은, 재원은 어디서 마련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기본소득’이 꼭 필요하다고 합의만 된다면 그것은 어떻게든 해결된다는 사실이다. 기본소득 도입을 가로막는 최대 장벽은 역시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고정관념이다. 이것만 극복한다면 오늘날 사실상 노예노동을 강요당하고 있는 우리들 대다수의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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